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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제임스 감독에 대해서 제법 이것저것 들었다. 그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 일에 그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게 영화 촬영장이라면 제임스 감독 말이 맞아.’
현장에서는 촬영 감독, 총감독이 있어서 이들이 감시를 각각 한다.
색감과 조명을 사전에 염두에 둬야 한다.
촬영 감독만이 가지는 독특한 관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그 의도를 알기 어렵다.
따라서 제임스 감독이 이들 스태프를 관리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기존 연설이 핵심이다.
영화 촬영장이 아니었다.
스티븐은 내심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의혹을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이 제임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을 끌어들였다.
그가 의도 없이 그런 일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의 압박도 무난하게 처리한 최민혁 실장이라면 말이다.
‘가만, KM 블룸버그를 설립한다고 했던가? 설마 이 일 때문은 아니겠지?’
스티븐은 우물쭈물한 채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나 보군요. 감독님이 이렇게까지 집중하다니.”
제임스 감독은 스티븐 안색이 다양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그는 촬영 대본을 툭툭 치면서 관객석 손잡이에 엉덩이를 걸친 채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전 스티븐이 부럽습니다. 이번 기조연설은 다른 기조연설과는 다를 겁니다. 분위기 자체가 아주 특별할 거예요.”
스티븐 역시 제임스 감독의 옆자리에 같은 포즈를 취하며 앉았다.
그는 진지한 제임스 감독의 얼굴을 본 후에 바쁘게 리허설을 준비하는 이들을 살폈다.
영화 촬영 전문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습니까?”
제임스 감독은 스티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을 말했다.
“이 기조연설 장소 자체가 자연광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천장에 달린 인공 광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비현실적인 부분이 연출될 수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공 광을 기조 연설장 곳곳에 설치해야 했다.
“현실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면 광원이 너무 어둡고, 그렇게 너무 밝아도 안 됩니다. 최적의 광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더욱이 이번 일은 최민혁 실장이 기대하는 최대한 극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한 것이 컸다.
제임스 감독은 최민혁 실장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CG 효과를 넣을 수 없다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따라서 이 기조연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극적인 효과를 살려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네.”
스티븐은 제임스 감독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도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간혹 들었던 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전문성이 떨어져서다.
제임스 감독은 힐끗 송도연을 쳐다보았다. 송도연은 조감독의 지시를 받아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노래까지 동시에 해야 했다.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기조연설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그녀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컸다.
그럼에도 그 좁은 공간을 잘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를 정작 어렵게 하는 것은 그녀의 대리인과 호흡을 같이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은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송도연은 가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조감독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건 다른 스태프들 역시 비슷했다.
자세한 정보를 아는 스태프는 그저 일방적인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송도연은 울상을 지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얼마나 귀중한지 잘 알았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스티븐은 안쓰러운 송도연의 모습에 혀를 찼다.
“도대체 기조연설과 같이 진행하는 무대가 어떻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하지만 제임스 감독은 스티븐의 푸념에 오히려 반박했다.
“글쎄요. 스티븐은 기조연설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스티븐은 기분 나쁜 말에도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블룸버그와의 협상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한 것인지 잘 알았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면 차라리 사전에 말씀해 주셔야죠.”
제임스 감독 역시 그걸 잘 안다. 그가 보기에 가장 고생하는 것은 송도연이었다. 그녀는 CES 기조연설 날짜보다 몇 달 전에 와서 온갖 연습을 다 했다. 거기에 음원 작업도 있었다. 전문가가 붙어서 도와준다고 해도 강행군이었다.
고작 고등학생의 나이로 묵묵히 그런 지시에 따른 것이 신기했다.
‘아, 돈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 사채업자가 울고 갈 정도로 교묘하게 자기 사람을 착취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차기작 영화 비용 때문에 이러고 있으니.’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비록 차기작 영화 제작 일정은 한 달 정도 연기되기는 했지만, 자본이 없어서 중간에 영화 제작 일정이 미뤄지면 손실이 더 크게 날 테니까.
제임스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정 문제 때문에 최민혁 실장을 욕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티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저도 압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이런 일을 밀어붙이지 않을 테니. 그리고 숨기는 일도 보안 때문일 거고요.”
제임스 감독은 오히려 스티븐 말에 반박했다.
“아뇨. 스티븐은 모릅니다. 저도 지난주에 이지수 박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미니 드론 때문입니까?”
“글쎄요. 놀람의 여지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아마 스티븐이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
스티븐은 영문을 몰라서 제임스 감독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임스 감독은 오히려 스티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보안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티븐 역시 모르는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점을 고려해서 이번 기조연설 무대가 만들어질 겁니다. 스티븐은 기조연설 준비에만 집중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만약 스티븐이 실수한다면 뒤에서 진행한 일이 헛되게 될 테니까.”
스티븐 역시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마이클 블룸버그 사태 이후에 최민혁 실장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럼에도 제임스 감독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 감독은 어깨를 으쓱한 채 기조연설 준비에 여념이 없는 스태프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무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꼼꼼하게 동선을 확인했다.
“이상하군.”
스티븐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인공지능 미니 드론을 이번 기조 연설에 투입한다는 정도였다.
‘가만, 미니 드론 외에 뭔가 새로운 것이 더 있다는 건가?’
그는 힐끗 기조연설 공연장 뒤편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곳 무대를 담기 위한 다양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카메라 중에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블룸버그 마크가 달려 있는 최고급 카메라였다. 어제까지는 없던 물건이었다.
물론 그 카메라에 달라붙어 기기를 작동하는 블룸버그 직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진짜 KM 블룸버그 직원인가?’
스티븐은 힐끗 자신을 주기적으로 쳐다보는 이들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뭔가 또 다른 일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지.’
뭔지는 몰라도 이 무대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 제임스 감독이 놀랄 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일까?’
* * *
최민혁 실장은 처음에 케이블 TV 사업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최용욱 회장에게는 이 사업은 남다른 바가 있어서 좀 더 살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에플 제품을 좀 더 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다.
‘에플 공매도에 큰 충격을 주려면, 홍보 활동을 더 키울 필요가 있어.’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미국 언론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에게 전화해서 확인해 봤다.
[…으음, 그건 최 실장님 추론이 맞을 겁니다. 상황에 따라서 스티븐의 기조연설에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꼭 직접적인 압력이 아니어도 기조연설에 맞추어서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낼 수도 있을 겁니다.]
일테면 전쟁이나 암살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 혹은 할리우드 배우 관련 스캔들이 될 수도 있었다.
최민혁 실장도 처음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은 진지하게 충고해 주었다.
[차선책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겁니다.]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이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릭 모건 이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다른 대안을 찾을 터였다.
‘마이클 회장의 기조연설 방해가 아니라면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도 있어. 굳이 직접적인 방해가 아니어도 되잖아. 흐름만 막아도 될 테니까.’
최민혁 실장은 결국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기획 팀을 통해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려이기는 해도 단순하게 여길 일은 아니에요. 에플 차세대 제품이야 어차피 잘 팔려도 초기 단계에서는 다를 겁니다. 그렇다면 에플 공매도 처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우리 뜻대로 에플 주가가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약이 걸리든지 말이죠. 대안은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제가 없도록 확인해 보겠습니다.”
* * *
정성근 대리는 출근과 동시에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조성돈 팀장을 봤다. 그는 회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회의실로 가야 했다.
조성돈 팀장은 간단한 아침 인사와 더블어서 최민혁 실장의 지시안을 설명했다.
그는 여기서 마이클 블룸버그의 이야기를 듣자 화들짝 놀랐다.
다른 기획실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배종대 과장은 탄식했다.
“설마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이 직접 나서서 우리 최민혁 실장님을 압박했다는 말입니까? KM 블룸버그 설립이 그 과정에서 타협으로 나왔고요?”
“…그래.”
“맙소사!”
배종대 과장은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했다.
과한 포즈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박상기 차장 역시 어느 정도 내막은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하면 샐로먼 브러더스가 직접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방해하려고 한 겁니까? 설마 이번 에플 차세대 제품 때문입니까?”
“…네. 이미 다들 예측은 했을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다는 증거가 없어서 확신하지 못할 뿐이지.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 배후로는 최문경 부회장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아!”
기획 팀은 그제야 다들 탄식하고 말았다. 여기에 최문경 부회장이 있다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샐로먼 브러더스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조성돈 팀장은 더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는 외부에 돌고 있는 정보 중에 사실만 몇 가지 확인을 해주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사 역시 이번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그걸 대비해서 대안을 찾아두는 겁니다.”
다들 입을 쿡 다문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격적인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 최민혁 실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마이클 블룸버그’, ‘스티븐’, ‘샐로먼 브러더스’와 관련된 음모론에 대해서 들었다. KM 그룹 임직원 중에는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의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실에 대한 확인까지는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소름이 돋았다.
배종대 과장이 그 점을 지적했다.
“맙소사. 아니, 그러면 샐로먼 브러더스 같은 거대 투자 은행이 우리 KM 전자, 아니, KM 그룹을 노리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아니,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입금 출처도 따지고 보면 샐로먼 브러더스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그 차입금도 우리 KM 그룹을 노린 미끼였다는 말 아닙니까?!”
“…….”
조성돈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보를 알았다. 그게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