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73화 (873/1,021)

#873.

권재홍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그는 지금까지 당하면서도 여러가지 대안을 연구하기는 했다. 다만 현실성이 없어서 그냥 넘어간 계획을 꺼냈다.

그 계획은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최문경 부회장 눈빛 역시 무섭게 반짝였다.

"…한번 해봐. 단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해. 괜히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

최문경 부회장이나 권재홍 비서실장이 최민혁 실장을 높이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가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아주 집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최민혁은 심지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터라 김여정의 동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는 김여정이 최문경 부회장을 바로 만났다는 정보를 받았다.

다만 그 내막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이나 권재홍 비서실장의 동선을 파악하면 되기 때문이다.

"서광수 과장을 만났다고요?"

김명준 과장 역시 보고를 받았지만 난감한 얼굴이었다.

다행히 서광수 과장에 대한 프로필은 있었다.

서광수 과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아큐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아큐텍은 반도체 관련 기술과 관련된 사업 쪽이었다.

그가 원래 했던 케이블 TV 쪽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회사 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빚이 1억이라……."

최민혁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이 빚은 황당하게도 주식 투자 과정에서 얻은 것이었다.

서광수 과장은 원래 KM 전자 주식 투자로 재미를 단단히 봤다.

많이 벌었을 때는 무려 3억 넘게 벌었다.

그런데 최근 와서 KM 전자는 조정국면을 거치면서 초기 상승세를 반납하고 말았다. 손해는 보지 않아도 이익도 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광수 과장은 결국 주식에 대한 탐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종목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한국 주식 시장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서광수 과장은 욕심을 너무 내서 종목을 골랐는데, 고른 종목마다 폭락했다.

결국 그는 빚을 내서 투자했는데, 그게 전부 다 손실로 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서광수 과장의 개인 환경 역시 관련이 있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직 개편이 있었는데, 팀 단위로 전환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서광수 과장은 설 자리를 잃었고, 불안에 떨었다.

그는 대리, 사원과 같이 현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윗선은 이사가 팀장을 맡으면서 스트레스를 더 크게 받았다.

KM 전자 계열이었다면 인사 팀에서 중재를 해줬을 것이다.

불행히도 KM 그룹은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서광수 과장 처지에서 살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는데, 그게 주식이었던 것이었다.

"이것 참. 뭐 좋습니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서광수 과장을 이용해서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이라고 합니까?"

김명준 과장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살 시도를 하게 만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네? 설마 서광수 과장한테 자살을 종용해서 절 공격하려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분노한 최민혁 실장.

김명준 과장도 곤혹스럽기만 했다.

다행히 조성돈 팀장이 슬쩍 나섰다.

"저도 박상기 차장을 만나서 좀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요즘 KM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장승일 실장 말로는 최용욱 회장님이 사장단 회의에서도 최문경 부회장을 그다지 질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 계속해 보세요."

"최 실장님의 추측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KM 그룹이 안정화되어서 회사 성장은 문제가 없지만 구조조정여파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 역시 냉혹한 구조조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에 기생하려는 임직원까지 끌어안고 갈 수는 없었다.

장승일 실장이 한 일은 그런 임직원은 가차 없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도려 내는 것이었다.

적어도 회사에서 일할 임직원들은 다른 계열사로 다 보냈고 말이다.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데 임직원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 역시 언제라도 이런 식으로 회사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라고 해도 안 듣겠군요."

"네."

그는 이 일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IMF 역시 다르지 않았다. IMF의 가혹함은 단순히 경제 문제로만 생각하기 힘들다.

'다만 이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이 문제는 고민할 필요가 있어. 구조조정을 서두른 덕분에 문제가 많이 생겼어.'

"…이번 일은 일단 막을 수 있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도를 계속한다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블룸버그를 이용해서 일을 좀 더 밀어붙이죠. 우리 최문경 부회장도 블룸버그 사업에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할 텐데, 그걸 뒤집어보죠.

아, 박스는 가져왔죠?"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진행하면서 블룸버그 측에 한번 연락해 보세요. 이왕이면 저번에 보여준 것을 이번에 할 것이라는 말도 전해주고요. 아마 블룸버그가 예측한 미래와 관련이 있다고 해보세요. 보면 깜짝 놀랄 물건이라고 말하면 반응을 보일 겁니다."

"…네."

***

경제 성장 혜택을 입어서 80년에 입사한 직장인에게 경제 신화 따위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다.

그들은 3저 호황에 힘입어서 쉽게 신입 사원이 되기는 했다.

호사다마라 지금은 오히려 인사 적체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KM 그룹 구조조정은 이런 직장인에게는 최악의 악몽이었다.

서광수 과장이 살인적인 스트레스로 고생한 이유였다. 그는 때문에 권재홍비서실장의 제안을 받자 순순히 수락했다.

진짜로 자살하는 것도 아니고, 자살시도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 대안으로 선택한 일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거다.

그는 수영에 자신이 있는 터라 한강에서 죽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거리도 충분히 고려했고 말이다.

다만 그는 한강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를 덮친 세 사람 때문이었다.

김명준 과장이 경호원 세 사람을 데리고 서광수 과장을 막은 것이다.

서광수 과장은 황당한 사태에 영문을 몰랐다.

김명준 과장이 그때 보여준 것은 서 광수 과장 자신과 민상수 부장의 녹취록 내용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만 잘 끝내면, 3억을 바로 현금으로 줄 테니까. 계약금으로 1억은 가져왔으니 여기 받으세요.]

[저, 정말입니까?]

[돈을 확인한 후에 이야기합시다.]

[맙소사, 진짜 1억이잖아.]

[다만,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최민혁 실장이 압력을 넣어서 진행한 구조조정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서광수 과장도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듣고서야 민상수 팀장이 왜 이일을 꾸미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김명준 과장이 내민 명함을 보자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사실 더 말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결국 김명준 과장의 눈치를 봤다.

김명준 과장은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최민혁 실장입니다.]

[아, 네, 전서, 서광수 과장입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뒤늦게 한 사과.

최민혁은 굳이 서광수 과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자료는 다 챙겼다. 서광수 과장이 있다면 증인이 될 일이다.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5억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이번 최문경 부회장 자살 음모와 관련해서 증인이 되어줬으면 합니다.]

[그건…….]

[어차피 빚도 문제고, 이미 가정도 엉망이더군요. 5억이라면 결혼 생활도 다시 정상화시킬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지금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게 끔 해드리겠습니다.]

[…….]

서광수 과장은 살인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회사에 잘 다닌사람이었다. 그는 이성을 찾자 최민혁 실장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 라인에 줄을 서든, 최민혁 실장 라인을 잡든 한 가지를 해야 했다.

[최 실장님, 이번 일은…….]

[걱정 마세요. 이번 일은 잊어버릴 테니까.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저 역시한 원인입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손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알겠습니다. 실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좋네요. 일단은 김 과장님이 안가 하나를 소개할 겁니다. 그곳에서 당분간 조용히 지내세요. 가족에게는 미리 급한 미국 출장이라고 이야기하시고요.]

[…네. 저기 실장님.]

[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

최민혁은 서광수 과장 일을 마무리지은 후에 KM 그룹 계열사와 구조조정했던 기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폈다.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최용욱 회장이 어느 정도 금전적인 보상을 했다.

그런데 이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KM 전자 내부가 급격하게 조직이 개편되면서 KM 그룹에도 영향을 줬다.

KM 그룹은 요즘 사내에 누가 과장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이지수 박사가 만든 솔루션을 적용한 덕분에 사내 결재 시스템도 대폭 변화기 일어났다. 이제는 굳이 결재판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대기업 몇 곳만 이렇게 하는데, KM 그룹은 벌써 적용한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이런 점을 깨닫자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이 고마웠다. 그가 지금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몰랐을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사내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갈등이 폭발했을 거야.'

KM 전자 인사 시스템은 시대를 앞선 것이 맞다.

그런데 그 대상인 이들조차 시대적인 추세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발전된 인사 시스템을 쫓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최민혁은 일단 최문경 부회장과 권재홍 비서실장이 당황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갑자기 사라진 서광수 과장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는 굳이 두 사람에게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가만 놔두면 불안에 떨겠지?'

가짜 자살 교사 행위가 만약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다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일을 성급하게 벌이지 않았다. 어차피 터뜨려 봐야 밑의 민상수 부장을 이용해서 꼬리 자르기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보다 블룸버그 쪽에 더 신경을 썼다.

이대로 사업이 진행되면 KM 블룸버그라는 새로운 회사가 설립될 것이다.

다만 시간이 너무 걸린다.

마이클 블룸버그 역시 관록을 갖춘 경험자로 신중하게 사업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최민혁 자신이 CES 전시회를 앞두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런 점을 노리겠지만.'

이전에 자신이 한 제안은 보고서상의 문제였다.

따라서 충격을 줄 수 있어도 위기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최민혁은 마이클 블룸버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는다면 생각이 바뀔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이미 블룸버그 측에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마이클 블룸버그는 다행히 이런 최민혁 실장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한국으로 들어와서 최민혁을 만났다.

최민혁은 다소 흥분한 마이클 블룸버그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아마 이번 물건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네?"

마이클 블룸버그는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이지수 박사가 무인 항공기 디버깅이 반영된 가장 최종 OS가 탑재된 인공지능 미니 드론이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는 보안 버튼을 눌러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충격을 방지 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고, 그 속에 다시 둘둘 접혀 있는 동그란 물체가 놓여 있었다.

바로 애니 드론이었다.

박스가 열리자 애니 드론의 LED가 바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애니 드론 초기화 정보가 작은 LCD 화면을 통해서 드러났다.

애니 드론은 자동 시스템 체크가 끝나자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5분 동안 사무실을 360도 회전하면서 정보를 모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저가 사무실 공간 정보를 담는 것 같았다.

"……!"

마이클 블룸버그는 화들짝 놀라서 벽쪽에 바짝 붙고 말았다.

그는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애니 드론을 쳐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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