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
옆에 자리한 최두진 사장 역시 사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사용인에게 눈짓해서 몰래 가져온 사과를 조용히 먹었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의 푸념을 들었다. 최용욱 회장 가정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김여정이 왜 저러는지도 말이다.
'진짜 청산가리를 탔을까?'
사소한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김여정은 전혀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다행히 사용인 한 사람이 끼어들어서 최용욱 회장을 구해주었다.
[최민혁 실장님이 오셨습니다.]
***
"어? 민혁이 네가 웬일이냐?"
호들갑을 떠는 최용욱 회장은 김여정에게서 피할 수 있다는 마음에 최민혁을 살갑게 환영했다. 그는 최민혁의 방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자 최민혁을 안아주면서 평범한 할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 사용인에게 눈짓으로 과일을 치우게 했다.
최민혁은 갑작스러운 최용욱 회장의 환영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일찍이 최용욱 회장의 이런 환대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의 심사가 어떨지 한창 고민에 잠겨 있다가 최용욱 회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기에 지금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런 그도 김여정을 보면서 화들짝 놀랐다.
그도 김여정이 최용욱 회장 저택에와 있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사용인 옷을 입고 있는 김여 정의 모습에 또다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최민혁은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주연이라도 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하지만 김여정은 그런 점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밝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 따스한 미소가 정말 무시무시했다.
"어머, 민혁이 왔구나. 미국에서 고생많지. 마실 거 뭐 내올까?"
"주, 주스……."
최민혁 실장은 반사적으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려."
김여정은 후다닥 일어나서는 부엌 쪽으로 뛰어갔다. 사용인은 눈치껏 김여정에게 달려가서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
최민혁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면서 이게 영화 속인지, 현실인지 알수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자신만 놀란게 아니었다.
뒤따라 들어온 조성돈 팀장 역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김명준 과장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크게 당황했다.
두 사람이 아는 김여정은 절대로 런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최두진 사장에게 인사하면서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최용욱 회장도 눈치는 있어서 자리에 앉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분 때문이다."
"아, 지분이라면, KD 통신 지분 증여 말입니까? 설마 그것 때문에……."
"그래, 민수 그 녀석이 지분 증여를 받은 일주일 후부터 저러고 있다. 지분이 좀 작기는 해. 욕심이 생긴 게지. 조금 더 노력하면 지분을 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불편해서 그만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구나."
"설마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무시할까요?"
"다른 녀석들도 불렀으니까."
최용욱 회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자식인 최지연, 최정수도 호출했다. 그는 심지어 셋째인 최동영 상무의 자식도 불렀다.
이들을 불러서 지분 증여에 관한 야기도 넌지시 해버렸다.
최문경 부회장, 최동영 상무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아예 경고까지 했다. 지분 증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는 자신의 나이도 있으니 증여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최민수가 방아쇠가 된 셈이다.
최민수가 지분을 많이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증여 행위 자체가 최용욱 회장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에게 올라온 최용욱 회장 관련 보고의 정체성을 알고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럴 수 있기는 한데…….'
최용욱 회장 역시 의도와는 달리 지분 일부를 증여하고 나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 역시 자신의 나이는 잘 아니까.
비록 최근 최민혁 실장 때문에 건강이 좋아졌다고 해도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힐끗 사용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치우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그제야 최용욱 회장이 사과 먹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설마 독?'
최용욱 회장도 최민혁 실장의 표정을 보자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그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최용욱 회장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자신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아, 사업 때문입니다."
"혹시 KM 센서 말이라면……."
최민혁은 굳이 최용욱 회장이 마이클블룸버그처럼 행동하는 것을 원치 았다. 그는 아예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아뇨. 그거 말고 새로운 사업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원래 케이블 TV 쪽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 이야기라면 나가서 하자꾸나."
최용욱 회장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 쪽으로 나섰다.
최민혁 실장은 조용히 최용욱 회장 뒤를 따랐고 말이다.
그는 힐끗 김여정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김여정도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았다. 그녀는 고집을 부려야 하나 망설였다.
최민혁은 참 사람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전생 기억으로 김여 정은 저런 모습을 죽어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대단하구나. 역시 탐욕 때문이겠지.'
***
최용욱 회장은 정원으로 나와서 천천히 산책하듯이 걸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꾼 정원수를 하나씩 살폈다.
다양한 다년초는 키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온도, 습기를 잘 고려해서 이것저것 신경을 쓰야 했다.
손자 최민혁 덕분에 자신감을 가져서 취미 시간을 대폭 늘렸다.
그는 손자 최민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달랐다.
손자 최민혁은 잘나가도 너무 잘나갔다.
재정경제원조차 손자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려다가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들 역시 갑자기 들어온 외국 자금의 배후가 최민혁과 관련이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니 불안한 것이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이 한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바로 케이블 TV.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내심 손자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이 사업에 정말 애착을 뒀다.
원래는 TRS 지오텍 합작 회사를 설립하면서 계열사를 통해서 케이블 TV 사업에 발을 얹었다. 그런데 이번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각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KM 그룹이 아직 케이블 TV 기반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계열사 중에는 케이블 TV와 관련된 인력이 소수이지만 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그 일을 아직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네 녀석이 정리하라고 해서 매각했다."
최민혁은 퉁명한 최용욱 회장의 말에 혀를 찼다. 사소한 일 같아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생겼다.
"압니다. 하지만 그 인원이 전부 다 나간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더욱이 아직 핵심 인재는 다른 계열사로 편입시키려고 협상 중인 것으로 압니다. 할아버지가 다시 케이블 TV 사업을 하려고 하면 어렵지 않게 진행될 겁니다."
케이블 TV 사업은 최민혁이 추구하는 기업 철학과 맞지 않았다.
최민혁이 굳이 케이블 TV 사업을 꺼낸 것은 자신을 생각해서다.
최민혁 실장이 일을 잘해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영문을 몰라서 최민혁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손자 최민혁의 태도는 최근에 와서는 차가웠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전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새삼 손자 최민혁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때마침 정원으로 나온 김여정을 보면서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를 굳이 쫓지는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눈빛을 마주한 채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 역시 김여정이 옆으로 바짝 접근한 것을 봤다.
하지만 피식 웃었다. 그 역시 인공지 능, 샐로먼 브러더스에 너무 집착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는 그 사업 영역을 넓힐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맥도 없었습니다. 제가 원래 목표한 사업 방향과는 맞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좀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제삼자가 보기에도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한 번쯤 제 주변을 점검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케이블 TV 사업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이렇게 할아버지를 찾은 겁니다."
"……."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혀를 찼다. 불과 지난주까지 최민혁 실장은 잘나가도 너무 잘나갔다.
감히 그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웠다.
최민혁 실장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한곳을 향해서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주변 변화는 아예 외면한 채 말이다.
최용욱 회장조차 최민혁의 냉담한 모습이 무섭기만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최민수 증여를 통해서 알았다.
이대로 최민혁 실장을 밀어줘도 될지 말이다.
최민혁 실장이 경영권을 승계받는다면 KM 그룹 자체는 무섭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KM 그룹의 이전 모습은 다 사라질 것이다.
최씨 일가는 최민혁 실장을 제외하고는 다 스러지고 말 것이다.
이건 최용욱 회장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설마 지금은 다르다는 소리야?"
"네. 마침 괜찮은 사업 파트너가 생겨서 말입니다. 더욱이 상대가 적극 돕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못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본인들 미래를 개척하려면, 해야 할 사업이니까."
최용욱 회장은 눈치를 보던 김여정이 주스를 정원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화들짝 놀랐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은 김여정을 쳐다보았다.
최민혁도 그 모습을 봤다. 그도 잠깐 고민했다. 김여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내보내거나, 아니면 최용욱 회장과 산책하러 갈까 고민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녀를 이용할 방법이 많았다.
'어차피 최문경 부회장이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 아니, 오히려 나을 거야. 이 일이 최문경 부회장을 통해서 데릭 모건에게 전해질 테니까.'
데릭 모건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데릭 모건 이사가 마이클 블룸버그에게 하소연하는 정도겠지.'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결국 마이클 블룸버그는 자신의 아군이 될 테니까.
'아니, 둘 사이에 대립을 더 부추기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최민혁이 굳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까지 와서 최용욱 회장을 찾으면서 내심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그린 큰 그림이었다.
그는 슬쩍 김여정을 인정한 듯한 표정을 짓으면서 말했다.
"할아버님이 좋아할 일 한 가지는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냐? 하지만 그 일이 쉽지는 않아."
당연한 일이었다.
최민혁은 잘 안다. 다만 그는 지금 괜찮은 인맥이 있었다.
"블룸버그에 대해서 아시죠? 창립자인 마이클 블룸버그를 만나서 몇 가지 사업 협상을 했습니다. 아, 스티븐 때문에 만난 겁니다."
"블룸버그라니?"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미국에서 일어난 에피소드가 최민혁 실장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기자들이 들었다면 꽤 흥미를 보일내용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그는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집착을 벌이지 못한 사업 중의 하나가 케이블 TV였다. 블룸버그 쪽에도 사업제휴 때문에 협력을 요청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막대한 자금까지 내놓아 가면서 말이다.
물론 실패했고 말이다.
"브, 블룸버그 TV? 설마 마이클 블룸버그를 직접 만나서 협상했다는 소리야?!"
최민혁은 마치 마실 나가서 이웃집아저씨를 만난 것처럼 소탈하게 말했다.
"네. 아마 블룸버그의 기존 콘텐츠사용자를 기반으로 해서 사업 영역을 넓혀가면, 꽤 의미가 있는 사업이 될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우리 KM 그룹영업과 마케팅용으로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