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
그녀는 겉으로는 알았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나자마자 최민혁을 욕했다.
‘민혁 이놈은 정말 양심도 없구나!’
최민혁이 자신에게 지금까지 한 일.
특히 남편인 최훈열 전무를 감옥으로 보낸 일을 생각하면 욕을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최훈열 전무가 최민혁에게 한 일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 자신의 처지에서만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여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이 이렇게 전화까지 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지분을 일부 증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민혁야, 나다. 미국으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너무 아쉽구나. 가족 모임에서 얼굴이라도 보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는데…….]
[…괜찮습니다.]
[아니야. 사람이 그럴 수는 없잖아. 우리는 다 같은 가족이잖아. 늘 연락하고 지내야지.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최민혁 실장을 걱정한 적이 없는 것을 고려하면 실로 이례적인 말이었다.
최민혁은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친근한 김여정의 말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저 정말 신경 안 씁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 민수를 생각해서 해준 일이잖아.]
같은 말은 계속 반복되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김여정의 애교가 가득한 어조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민수 형 지분도 있으니, 그걸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런 점을 간과했을 수도 있어서 제가 끼어든 것뿐입니다.]
[그렇게 마음 써준 게 어디야. 이번 지분 증여는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암담하구나. 그이 일 때문에 잠깐 널 미워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 잊었어.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최민혁은 그녀 말이 영락없는 악어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이미 전생에서 한 번 죽은 적이 있었다. 애초에 김여정 말 따위는 믿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과거 내가 한 말은 다시 한번 사과하마. 그때는 내가 너무 욱했어. 가족끼리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건 아니었어.]
사과.
애교.
후회.
[…….]
최민혁은 괜히 전화하라 했나 싶었다. 하지만 김여정의 상태를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이 정도면 다음 공작을 꾸미기에 좋았다.
하지만 김여정은 최민혁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
[앞으로 우리 정말 잘해보자. 내가 네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도와줄게.]
[…그러죠.]
최민혁은 딱히 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끊었다.
그가 원한 바는 다 얻었다.
김여정의 태도를 알아야 다음 작업을 진행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김여정은 물론 전화를 끊고 나서는 쌍욕을 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들은 최민수는 조심스럽게 김여정에게 말했다.
“민혁이 전화예요?”
“그래. 이 개놈의 새끼가 이번 일을 도와줬다고 감사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나 보다. 아니, 글쎄 아버님까지 동원했지 뭐니. 지가 지금까지 한 일은 싹 다 잊고 말이야. 뭐 이런 새끼가 있나 모르겠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최민혁에게 한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최민혁이 KM 전자의 기획실장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일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학대였다.
최민수은 그나마 김여정이 최민혁에게 한 일을 떠올리고는 흠칫했다. 다만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일을 잘 기억했다. 실로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이전의 풋내기가 아니었다. 이제 최민혁 실장에게 당할만큼 당해서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그보다 이번에 얻은 지분이 걱정이에요. KD 통신 지분 2%, KD LCD 지분 2%가 작은 것은 아니지만, KD 통신, KD LCD 매출이 불안해서요.”
김여정은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너희 첫째 큰아버지가 괜찮다고 했지 않니? 거기에 나도 알아보니, 이번에 샐로먼 브러더스가 외국인 투자자를 꽤 끌어들였어. 돈이 안 되는 일에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잖아?”
최문경 부회장은 두 회사 지분을 통째로 인수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샐로먼 브러더스 도움을 청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두 회사의 지분이 미심쩍기는 했지만, 최문경 부회장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KD 통신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일은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지분 인수 과정에서 KD 통신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정부가 CDMA 사업에 대한 속도를 올리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역시 설마 CDMA 사업이 중국 내 IP 시티폰에까지 영향을 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영향을 준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에 빠지지 않은 것은 최민혁 실장의 태도였다.
그가 최용욱 회장과 갈등까지 하면서 탐욕을 부린 것에 집중했다.
결국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만든 쇼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김여정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최민수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전과는 다르게 소극적으로 나온 모습을 보자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번에 두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잖아요?”
“너도 참 답답하다. 상황이 이제 달라졌잖아. 세계적인 투자 은행이 인정한 회사야. 그러니 이제는 의문을 가지지 마. 이제는 쿡 참고 버티는 게 최고야.”
최민수는 갑자기 태도가 바뀐 김여정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김여정과 같은 의견을 내놓기는 했지만, 막상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을 통해서 감사 인사를 원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떠보려고 전화한 걸까? 아니,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더욱이 그는 최민혁 실장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두 회사 지분 매입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바로 가버린 최민혁 실장의 행동 말이다.
* * *
최민수는 당연히 최민혁의 의도를 잘 알지 못했다.
그건 단순히 최민수가 식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꾸민 계획이 너무 광범위하고,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김여정과 통화한 후에 곰곰이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겉으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뒤돌아서면 뒤통수를 칠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덫은 완벽히 깔아놓았으니까.’
IP 시티폰은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CDMA에 밀려서 말이다.
아니, 최민혁 자신이 미국 정부를 이용해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다음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CDMA가 탑재된 스마트폰이라면, 영상통화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야말로 신세계지.’
최민혁은 혼자 자기 계획을 다시 검토하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김여정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뭐가 문제지? 스마트폰 시장이 가장 빨리 열린다면 더 이상 자금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텐데…….’
시간적으로 봐서는 몇 년을 앞당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입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이 한 생각을 프로그램 코드 디버거처럼 하나씩 확인하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초기 CDMA로 영상 통화가 되나? 어, 안 되잖아.’
그랬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휴대폰이 2G 폰이었다.
영상 통화가 되려면 3G가 필요했다.
바로 IMT-2000이었다. 개발 시작은 1985년에 진행되었지만, 앞으로 2,000년대가 되어서야 서비스가 진행된다.
“…아.”
최민혁은 전혀 생각도 못 한 오차에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뒤늦게야 자신의 전생 기억에만 집착해서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만든다고 바로 사용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반 통신 환경도 필요했다.
다만 그가 스마트폰 개발을 진행하게 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2G 폰을 통해서 수익이 날 테니까.’
더 중요한 것은 차세대 수익 모델이다.
KM DVR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건 KM 센서의 먹거리였다.
KM 전자의 먹거리는 없었다.
최민혁은 콜린스 매각 이후에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된다고 해도 KM 전자 내의 많은 임직원이 자칫하면 놀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당장 신사업을 꾸리기에는 좀 그랬다.
지금 있는 것 중에 바로 할 수 있는 일은 드론 사업이었다. 군사용 드론은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니 일단 통과였다.
결국 인공지능 미니 드론이 되어버린다.
‘응용 분야는 많으니까.’
최민혁은 전생의 기억을 쭉 떠올려 보았다. 지금 이 시기에 인공지능 기술이 활성화가 되지 않은 이유는 인공지능 기술의 안정성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은 좀 달랐다.
이지수 박사가 만든 애니 인공지능은 한 세대 이상을 앞선 기술이다.
자신이 도와준다면 기술 수준을 더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이것 참.’
최민혁은 곰곰이 인공지능 애니의 응용 기술을 떠올렸다. 가전제품과의 연동이 그 하나였다. 아이컴이 그 좋은 예였다. 그렇다면 다른 기업과의 연대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KM 전자가 주도할 부분만 찾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결국 이지수 박사와 헬렌을 호출했다.
이지수 박사는 평소와는 좀 다른 복장을 한 채 나타났다.
기름기가 묻은 복장을 봐서는 마치 차량 수리 엔지니어 같았다.
머리도 돌돌 말아서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시선을 끌었다.
벨린 소프트를 오가는 임직원들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 역시 얼굴에 뭔가를 잔뜩 묻힌 채 평소처럼 툴툴거렸다.
“지금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 가라 하는 줄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건방진 헬렌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 성품이 그랬으니까. 괜히 건드려 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테일러 박사가 그랬지.’
“미안해요. 중요한 일 때문이니까.”
“그게 뭐죠?”
“스마트폰 말입니다. 그 개발에 좀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헬렌은 ‘스마트폰’이란 말에 힐끗 이지수 박사를 쳐다보았다.
이지수 박사는 지금 인공지능 무인 드론을 개발하면서도 스마트폰과 관련된 일도 순조롭게 잘 처리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 당장 다른 계열사 쪽에서는 스마트폰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새롭게 구현하는 부분에서 지연이 좀 생기는 것뿐입니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민혁 역시 이지수 박사가 자신의 지시에 충분히 따르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 양을 보여주었다.
음성 통화뿐만 아니라 영상 데이터에도 필요한 전체 값 말이다.
당연히 기존의 2G 대역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지수 박사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자료를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도 다른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가만, 이건 좀 무리겠네요. 아, 서, 설마 새로운 망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네.”
“아, 이런!”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화들짝 놀랐다. 헬렌 역시 눈치는 빨랐다. 두 사람 다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CDMA 관련 망 분석 자료를 살폈다.
MPEG-2와 관련된 필수적인 데이터 요구량도 있었다.
시간을 두고 자세히 분석을 해봐야 확신할 수 있지만 결과는 좋지가 못했다.
기존 2G망으로는 스마트폰을 활용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크, 큰일이네요!”
이지수 박사는 크게 당황했다. 평소 그녀의 모습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헬렌 역시 당혹감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스마트폰 개발을 총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벌써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스마트폰 프로젝트를 중지해야 했다.
막대한 손해는 덤이었다.
최민혁은 마치 다음 날에 수능 시험 통보를 받은 고등학생 같은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네? 그, 그게 뭐죠?”
둘 다 진짜 패닉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대단했다는 거다. 그런데 막상 까보니 자신은 자기가 받는 연봉만큼의 역할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