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4.
“그 일은 건드리기 힘듭니다. 이미 국세청에서 한 번 조사한 일이고,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데릭 모건 이사는 피식 웃었다.
“그거야 KM 전자와 KM 그룹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외국에서 난 수익까지 고려하면 상황이 좀 다를 겁니다. 더욱이 한국은 그런 것을 잘하지 않습니까. 죄가 없어도 언론을 통해서 흔들기 말입니다.”
정확히는 수사와 세무 조사를 질질 끄는 방식이었다.
설사 죄가 없다고 해도 조사를 끄는 방식으로 누명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실상 판결이 나지 않는 이상에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검찰이 주로 써먹는 수법이다.
지금 정부도 하려면 하면 못 할 것도 없다.
아니, 실제로 마녀사냥 방식으로 사용해서 정적을 죽이기도 했다.
다만 그 대상이 최민혁 실장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다른 재벌가와는 달리 최민혁 실장의 자산 형성 과정은 꽤 투명했다.
더욱이 세금도 1원 한 푼도 안 깎고 다 냈다.
아무리 이환채 재정경제원 차관이라도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월가의 큰손인 데릭 모건 이사님이 왜 뜬금없이 한국인의 상속세에 관심을 두는 겁니까?”
데릭 모건 이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샐러리맨은 세금을 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면 불공정한 것이 아닐까요? 전 그런 면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그 좋은 예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억지다.
이환채 차관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데릭 모건 이사는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았다.
“한국 정부가 상속세법 전체를 원점에서 검토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최민혁 실장이죠. 에플 지분이나 ARN 지분 매각은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불법행위입니다. 우리 투자자들은 최민혁 실장의 투자 방식을 좋아합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연합 SB와 같은 투자 방식은 없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 은근한 협박이었다.
논리라고는 전혀 없으니까.
더욱이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차익은 최민혁 실장이 노력해서 번 돈이었다.
상속세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환채 차관은 겉으로는 동조하면서도 속으로는 데릭 모건을 비웃었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가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저러지 않았잖아?’
작년에 만난 데릭 모건 이사는 영국 신사에 가까웠다.
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지금은 그 반대였다.
‘설마 최민혁 실장 때문일까?’
그는 내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을 상대한 인물 중에서 멀쩡한 이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데릭 모건 이사는 이환채 차관의 표정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
“그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최용욱 회장이 편법으로 증여를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 KM 전자 아닙니까. 그러니 KM 전자 주가가 폭등할 것이라는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번 돈입니다!”
“그거야…….”
이환채 차관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나오는 이야기였다.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의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주가를 끌어올린 일 말이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는 증권 관련 수사 팀에서 은밀히 내사까지 했다. 하지만 해당 수사로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이 일도 상속세와 관련이 된다.
편법 증여 말이다.
결국 이런 주가 조작을 통한 불법 증여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결국 상속세법 원점 재검토라는 이야기로 변질하였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가 있었다.
한국 상속세의 최고 세율은 무려 50%였다.
현실성이 없어서 지키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특히 재벌가의 피상속인이 문제다. 경영권 세대 교체가 이미 이루어졌음에도 증여나 상속세 납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공익 재단 출현이 단적인 예다.
데릭 모건은 이 점을 계속 걸고넘어졌다.
“최민혁 실장의 주식 분산을 통한 변칙 증여 역시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ARN 지분 매각 말씀이군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일의 당사자인 국세청은 입을 꿰매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습니다.”
국세청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했다.
더욱이 국세청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 소위 말하는 친최민혁 파벌이었다.
그들 눈을 속이고, 최민혁 실장 뒤통수를 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환채 차관은 술잔을 연이어서 들이켰다. 이번 일은 확실히 데릭 모건 이사의 말이 맞았다.
물론 여론 자체는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최민혁 실장에게 반발하는 여론은 그렇게 높지가 않았다.
그래서 최민혁 실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간간이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위 관료 중에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환채 차관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넌지시 한 가지 일을 물어봤다.
“그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손을 쓰려면 뭔가 좀 알아야 합니다. 혹시 미국 재무부 일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데릭 모건 이사는 슬쩍 말을 돌렸다.
“그건 단순한 세금 문제일 겁니다. 최민혁 실장이 지분을 팔아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봤기 때문입니다. 다만 대다수가 편법을 사용해서 IRS도 손을 쓰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무부가 나서서 정치적으로 손을 썼다는 말이었다.
이환채 차관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뒤늦게야 미국 정부 내에도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는 이가 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최민혁 실장은 미국에 가서도 변치 않나 보군요.”
“최민혁 실장이 만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불법적인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한다고 하면 편법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 자체에 불편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긴.”
이환채 차관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처음에 데릭 모건 이사가 왜 갑자기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데릭 모건 이사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나서야 그 원인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최민혁 실장이라…….’
골치 아픈 인물이었다.
이미 한국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을 노렸다가 핵심 고위직 몇 사람이 갈려 나갔다. 섣불리 최민혁 실장을 건드렸다가는 재정경제원 역시 무사하기는 힘들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그렇게 만들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바로 미국 재무부 미팅이었다.
미국 언론을 통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가 나왔지만 말이다.
‘미국 IRS조차 손을 쓸 수 없어서 압력을 넣으려고 했을 거야. 그런데 별다른 일이 없었잖아. 가만, KM DVR 납품 일이 그다음에 나왔으니, 설마 미국 재무부가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건가?’
그는 슬쩍 데릭 모건 이사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감이 사라졌고, 초조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아는 데릭 모건 이사가 아니었다.
‘뭔가 있구나.’
* * *
이환채 차관 역시 나름의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이 일을 혼자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중에는 국세청장도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국세청장은 이미 따로 최민혁 실장에 관해서 조사 중이었다.
물론 이미 한번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어서 아예 조직을 따로 부설해서 진행했다.
이환채 차관은 화들짝 놀랐다.
만약 최민혁 실장 귀에 들어가면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느냐고.
하지만 현임 국세청장 문영욱도 이번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했기에 나름 철저히 준비했다. 국세청 건물이 아니라 감사원 내에 따로 사무실을 만들었다.
다행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이동빈 조사국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밑의 실무진 몇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이 일은 문영욱 국세청장이 무리수를 둔 거라고 생각했다.
최종철 조사기획과 과장이 사무실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이동빈 조사국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한 이야기가 나와서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문 청장님이 따로 팀을 만들어서 관리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설마 사조직을 만들어서 내사라도 한다는 소리야?”
“…편법이기는 한데, 윗선의 지시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국세청장의 밑에 특수한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이런 일은 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야 할 일이다. 따로 비밀리에 진행했다는 이야기는 합법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동빈 조사국장은 내심 움찔 놀랐다. 그는 순간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최종철 과장을 데리고 슬쩍 국세청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말해보게.”
“그게, 문영욱 청장님이 윗선의 지시를 받아서 따로 일을 처리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팀에 속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설마 최민혁 실장님과 관련된 건가?”
“네. 그렇지 않다면 이 국장님을 따로 배제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
이동빈 조사국장은 황당해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도 친최민혁 실장 파벌의 우두머리라고 알게 모르게 알려진 덕분에 권력의 맛을 누렸다.
하지만 정작 알고 보면 권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문제가 될 만한 일 자체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테면 뇌물과 같은 방식 말이다.
‘차라리 정보를 넘겼지.’
실제로 그 역시 최근 최민혁 실장에게서 괜찮은 주식 정보를 얻었다.
그 정보로 10억이 넘는 이익도 봤고 말이다.
이동빈 조사국장은 최종철 과장의 은근한 눈빛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최민혁 실장님에게 얘기할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 * *
최민혁 실장은 이동빈 조사국장을 통해서 문영욱 국세청장이 비밀리에 자신을 내사한다는 정보를 얻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동빈 조사국장 덕분에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모른다.
일단 일을 안 이상 그 일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다.
문영욱 국세청장 지인을 따라서 쭉 추가 조사를 해보면 된다.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번 일은 한국 행정부가 자신을 노리는 것이니까.
“이것 참.”
“…괜찮겠습니까?”
조성돈 팀장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는 KM 전자 기획실을 총동원했다. 추가로 파악한 정보는 정말 좋지가 않았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나 보군요.”
“아무래도 미국 재무부와 접촉 때문에 단단히 틀어진 것 같습니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정부 고위 관료 처지에서는 아무래도 자신을 무시한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이 생겼다면 정부 측에 사전 조율을 부탁해야 하니까요.”
미국 재무부 일이다.
공적인 일이었다.
최소한 상식이 있다면 미국 재무부 접촉 전에 한국 정부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 정부를 무시한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개인이 미국 정부를 상대한다면 한국 정부의 존폐 위기나 마찬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한국 정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합쳐져서 오해를 부른 셈이다.
최민혁은 물론 조성돈 팀장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하죠. 이번 일은 잘 풀리지 않으면 미국 재무부를 이용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설마 그게 가능할까요?”
“왜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 일이란 게 참 쉽다면 쉬운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수입니다. 한국 쪽에도 인력을 총동원해서 상황을 점검해야합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실장 얼굴을 쳐다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었다. 실로 대범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님은 일이 점점 꼬여가는데, 크게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셔.’
그로서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보다는 위기에 대응하는 태도 자체에 더 감탄했다.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이제이라고 하지 않나.
미국 정부에 이권을 주고, 한국 정부를 길들이는 방법이다.
오히려 미국 재무부를 상대하는 일보다 더 쉬웠다.
최민혁은 물론 조성돈 팀장의 뜨거운 시선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