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30화 (827/1,021)

#830.

이 보고서에는 한국을 포함해서 일본의 통화 흐름까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몇몇 부분은 두 사람이 그토록 알려고 한 고급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민혁은 넌지시 두 사람에게 충고했다.

“제가 예언자가 아니라서 미래의 경제 흐름을 예측하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최근 최민혁 실장 자신이 미국 재무부를 상대로 힘겨루기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KM DVR를 세팅하면서 일어난 단기 자금 흐름을 통해서 통화 흐름에 대한 감을 잡았다.

단순히 IMF가 어떻게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금 흐름을 볼 때 시기적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파악했다.

최민혁은 이제 단순히 전생 기억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어느 정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보고서를 잘 보면, 국제 통화 흐름 윤곽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분석한다면 지금 한국의 외환 흐름이 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김우석 심의관은 최민혁 실장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더 황당했다. 최민혁 실장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이니까.

하지만 그는 곧 최민혁 실장의 이력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의 성과를 볼 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정말 사람 맞아?’

최민혁은 경의, 불안, 혼란에 가득한 김우석 심의관의 눈빛을 무시했다.

“…그걸 알면 충격에 대한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게 모범 정답은 아닐 겁니다. 한국 정부에 맞는 형태로 바꾸어야 할 테니까.”

“도, 도대체 이런 자료를 어떻게…….”

“미국에 와서 이리저리 아는 지인을 만나면서 얻은 정보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내의 정부 고위 실무진 한 사람 정도는 그 정보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김 심의관님이 마침 KM 전자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을 초청한 겁니다.”

딱 여기까지였다.

최민혁은 두 사람과 더 대화하는 것을 거절했다.

두 사람은 경호원에게 붙잡혀서 저택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최, 최 실장님, 자, 잠깐만…….]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던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최민혁은 패닉에 빠진 김우석 심의관의 모습에 아주 만족했다. 그가 딱히 김우석 심의관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일은 냉정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무리수를 둬서 나대다가는 벌레가 꼬일 겁니다. 당장 국제 투기 자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 정부 역시 미국 재무부처럼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나올 테니까. 두 사람 분위기를 보면서 느꼈을 텐데요? 지금 고위직은 상식이 통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일은 재정경제원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에요.”

“…….”

조성돈 팀장은 순간 머뭇거렸지만,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 사람만 해도 그렇다. 나름의 대화가 통하는 인물인데, 가끔 보이는 기질은 소통이 아니라 강압이었다. 그 윗선은 아마 더할 것이다.

간혹 사람을 구해주면,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빠진 보따리를 잃었다고 보상해 달라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최민혁은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뭐, 당분간은 날 견제하기보다는 개정판 X 리포트를 열심히 살피겠지. 아주 바보는 아닐 테니 말이야. 하지만 그런다고 윗선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거야.’

나름 미래에 변화가 생기면 좋을 것이다.

최민혁 실장도 나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IMF로 인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당했던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다만 그가 굳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사람들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내가 감당한 문제가 아니야. 차라리 운명에 맡겨야지.’

* * *

김우석 심의관은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 통화 흐름이 추가된 X 리포트 보고서 하나만 받았지만, 미국행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보고서를 받은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만큼 보고서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맙소사 X 리포트가 이런 내용이었다니.”

과거 X 리포트가 언론을 통해서 돌 때 자료를 구해서 확인했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해서 비웃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X 리포트를 옆에 두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러다가 지방 저축 은행과 지방 건축 업체 파업을 확인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야 안 것이다.

구체적인 부분에서 빠져 있지만, X 리포트가 말하는 큰 맥락이 일치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보는 X 리포트는 기존 보고서의 업그레이드판이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X 리포트 보고서의 내용은 단순히 예측이 아니라 통화 흐름을 토대로 일어나는 변화였다.

그 결과는 자신이 만든 외화 보유액 분석 자료와 거의 일치했다.

자금 흐름을 더하기 빼기 해보면, 한국으로 흘러들어 왔다가 나가는 자금 성격도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조동석 과장 역시 표정이 달랐다. 그는 이 글로벌 X 리포트를 토대로 만약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긴다면 한국 자금 흐름에 심각한 경색이 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저, 정말 이렇게 될까요?”

“그,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떻게 해! 이 보고서 작성에는 자네도 같이 작업했잖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고서입니다!’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조동석 과장조차 외환 보유고 분석 자료를 만들기는 했지만, 최악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추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준 X 리포트와 같이 조합해 보면 아닐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여러 가지 가정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 가정이 문제입니다. 이걸 윗선에서 수긍하려고 할까요?”

당장 이 글로벌 X 리포트에 대응되는 방안을 세우려면 지금 진행하는 외환 자금 흐름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

그건 곧 국내 자금 흐름에 영향을 준다.

경기 하락이다.

그것도 큰 폭으로 말이다.

“…그게 문제야.”

김우석 심의관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막상 문제를 알아도 대응책이 만만치 않다. 무리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더 빨리 재정경제원에서 퇴출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외환 보유고를 관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 그래, 맞아, 다, 당장 가야 해!”

김우석 심의관은 조성돈 팀장이 미리 준비해 둔 리무진에 다급하게 올랐다. 그는 곧바로 공항 쪽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외환 보유고의 위험과 관련된 부분을 이미 윗선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을 지금 자리에서 찍어내려고 한다는 소문만 돌았다.

그는 그제야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최민혁 실장이 설사 자기 일을 돕는다고 해도 일이 계획대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는 힐끗 조동석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심의관님, 이 일 할 수가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봐야지.”

“글쎄요.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 봐도 최악엔 다시 지방행일 것 같아서요. 어쩌면 최민혁 실장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 아닐까요. 괜히 정부 기관에 바른 소리 했다가 찍힐 수 있죠. 그럴 바에는 입 다무는 것이 최선이죠. 그나마 할 수 있는 대안이라면 우리 같은 반골에 정보를 흘리는 거죠. 그래서 이 문건만 넘긴 것이 아닐까요?”

“…….”

그는 최민혁 실장의 소극적인 태도에 내심 화가 났다.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을 생각해 보니, 최민혁 실장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갈 일이다.

아니, 그 반대다.

그나마 국가 경제를 걱정하기에 이런 정보를 넘긴 것이 아닐까.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도움을 청할 명단을 쭉 떠올렸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 했다.

‘사람 일은 모르잖아!’

* * *

최민혁은 일단 김우석 심의관을 통해서 재정경제원이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번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든, 안 되든 나에게는 큰 문제가 없지. 일단 나에 대한 견제가 약해질 테니.’

그는 문득 CES 전시회 마지막 리허설 부분도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스티븐이 주도한 덕분에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스티븐은 선동의 귀재다. 그 자신이 하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CES 전시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행사 자체가 쇼킹한 일이기는 하지.’

보다 중요한 것은 CES 전시회 이후다.

최민혁 자신이 이번 일을 위해서 이것저것 해둔 것 때문에 문제가 꽤 커질 것이다. 특히 에플 공매도 규모 자체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파급 효과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우존스 지수 자체가 영향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그 여파는 IMF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큰 흐름은 같다고 해도 디테일한 부분에서 큰 차이가 존재했다.

당장 가장 큰 관건은 역시 KM 그룹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최용욱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냐?]

뚱한 최용욱 회장의 반응이었다.

[죄송합니다. 자주 연락을 해야 하는데,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고작 그런 이야기나 하려고 이렇게 전화를 한 거냐?]

[혹시 바쁘십니까?]

[바쁘지!]

그런데 일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니었다.

건강을 회복한 최용욱 회장이 요즘 즐기는 것은 골프였다. 일테면 비즈니스 골프 말이다. 오늘도 전경련 회장 몇 사람과 같이 골프를 즐기는 중이었다.

실제로 핸드폰 소리에는 자잘한 잡음이 들렸다.

[아니, 최 회장 손자야?]

[설마 최민혁 고놈이 전화한 거야?]

[와, 최 회장, 이거 섭섭하네. 손자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전화까지 하는 사이였어?!]

손자와 전화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이상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미국 재무부 인맥 때문이었다.

이번에 최민혁 실장이 재무부를 방문하면서 일으킨 소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방송되어서 이슈가 되었다.

특히 한국 경제인이라면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민혁이 미국 백악관하고도 인맥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최민혁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곳 미국 일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진행하는 일은 별문제가 없습니까?]

[있지. KD 통신과 LCD가 문제야. 비록 우리 쪽에서 투자를 줄이기는 했지만, 손실이 계속 누적되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차라리 DL 그룹 쪽에 매각하시죠?]

[지분 전량을 말이냐?]

[네. 뭐 다른 사람 지분은 할아버지가 어떻게 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할아버지 지분은 이야기가 좀 다르죠. 그거야 할아버지 마음대로 매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가 처음에 했던 이야기와 다르잖아?]

최민혁은 마치 지난 일을 다 잊은 것처럼 툴툴거렸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저라고 해서 모든 투자에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투자가 그렇습니다.]

[…….]

잠깐 대답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도 중요한 안건이라서 슬쩍 자리를 옮긴다고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 진심이야?]

[네. 장기적으로 가면 손해는 안 볼 겁니다. 다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죠. 할아버지도 이제는 아실 것 아녜요? 재정경제원 내부에서도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요.]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안 거냐?]

[재정경제원 공무원 몇 사람을 직접 만나봤습니다. 대충 이야기 들어보니, 재정경제원 실무진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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