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
김우석 심의관과 조동석 과장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최민혁이 보내준 리무진에 탑승한 채 멍하니,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인접한 저택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저 멀리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가끔 쳐다보는 곳은 다름 아닌 지금 자신이 탄 리무진이 가고 있는 대저택이었다.
대저택 입구는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위치가 대도시에서 먼 곳도 아니었다.
저 멀리 실리콘 밸 리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곳이니까.
도대체 땅값이 얼마나 될까.
두 사람은 멍하니 최민혁 실장에 대한 명성을 하나씩 떠올렸다.
‘ARN 지분을 팔았다고 했지. 하지만…….’
최민혁 실장에 대한 명성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재정경제원에서 잘나가는 공무원이라고 해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 * *
차량이 도착한 곳은 대저택 안이 아니라, 해안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실내 수영장이었다.
그 안에는 최민혁 실장이 마침 수영을 끝내고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치 비서처럼 조용히 입을 여는 조성돈 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김우석 심의관님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그쪽은 조동석 과장이죠?”
조동석 과장은 평소에 최민혁 실장을 씹던 모습과는 태도를 달리했다. 그는 마치 대통령을 접견한 9급 공무원처럼 넙죽 허리를 숙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 그러지 좀 마세요.”
“아닙니다. 언론에서만 최민혁 실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직접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명불허전이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아예 작정한 노골적인 아부에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번 ARN 지분 매각 소식을 듣고 전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건 스탠리를 상대로 세금을 다 떠넘기는 일은 아무나 하기 힘듭니다.”
실상 ARN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모건 스탠리가 미쳤다는 소리도 있고 말이다.
그나마 오성 그룹 역시 5% 지분을 사들인 터라 다들 쉬쉬할 뿐이다.
“…….”
김우석 심의관은 슬쩍 조동석 과장을 째려봤다. 두 사람끼리 대화할 때는 최민혁 실장을 그렇게 씹더니, 그런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은 손짓으로 다과를 내왔다. 저 멀리 해수욕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조망을 보면서 포도주 한 잔을 음미하면서 두 사람에게도 권했다.
김우석 심의관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런 모습을 보일지는 몰랐다. 그래도 자신을 초청했으니, 뭔가 격식을 갖출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실제로 최민혁은 김우석 심의관 도움이 필요해서 부른 게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게 자기 내심을 밝혔다.
“일단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재정경제원 내부 이야기 말입니다. 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그쪽은 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네?”
“쉽게 말해서 저를 압박하려고 뭔가 행동을 취하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하하,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계속해서 주제를 이어 갔다.
“언론에서 나오는 정보가 제법 있지만 그걸 다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부에서 남발하는 헛소리와 실무진이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니까.”
실제로 이 말은 미국 재무부를 통해서 경험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서 내부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재정경제부 관료의 입을 통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김우석 심의관은 슬쩍 말을 돌렸다.
“최민혁 실장님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언론사 통해서 나가는 정보도 마냥 틀리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팩트가 기준이니까요.”
“절 우습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그쪽이 바보가 아닌데, 현황을 잘 모르겠습니까. 무리한 팩트를 언론에 전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죠. 전 재정경제원에서 이야기된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 그게…….”
김우석 심의관은 크게 당황했다. 당연히 최민혁 실장에 관한 이야기가 좋을 리가 없다. 이전과는 달리 최근 특히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더욱이 그도 나름 정부에서 한자리한다. 그런데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압박하는 경제인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미국 재무부를 상대하면서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깨달았다. 미국 내무부와 싸울 수준은 아니어도 한국 행정부 내에 국장급 고위 관료 정도는 밟을 수 있었다.
‘좀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지만.’
실상 김우석 심의관을 굳이 초청한 이유였다.
한국 정부를 돕거나 정보를 흘린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자존심이라면 재정경제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김우석 심의관은 크게 당황했다. 그도 KM 전자를 방문해서 충고까지 할 때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그는 자존심이 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최 실장님, 말씀이 너무 지나칩니다. 지금 재정경제원에서 최민혁 실장님을 조사한다는 것을 아시면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지 못합니다!”
실제로 화가 나서 한 말이지만 재정경제원이 최민혁 실장을 따로 조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재정경제원 내의 최민혁 실장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미국 내에서 최근 한 행적 때문에 정작 된서리를 맞는 곳 중의 하나가 재정경제원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자신이 한 자극 때문에 흥분한 김우석 심의관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면 재정경제원이 절 내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 그게,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크게 당황한 김우석 심의관은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사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었다. 도대체 정부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걸 재정경제원의 태도로 확인할 요량이었다.
방금 걸로 이미 대충 내심을 파악했으니, 굳이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해서 시차 때문에 힘든 것 같은데,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가, 감사합니다.”
김우석 심의관은 크게 당황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 *
최민혁이 굳이 미국 재무부와 협상을 잘 끝내고 나서도 한국 재정경제원을 신경 쓰는 이유가 있다.
재정경제원도 명색이 한국 행정부 기관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이들이 최민혁 자신을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한국 내에서만 놀았던 최민혁이 미국 내에서 논다.
관점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지금까지는 최민혁 실장을 옹호했다고 해도 앞으로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다.
탐욕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최민혁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
비교 대상으로 꼽는 것은 역시 한국의 대외 여건인데, 당장 대미 적자가 6배로 늘어난 것도 문제다.
그런데 대일 전자는 무려 155억 달러라 된다.
엔화 강세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점은 다른 동남아와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높았다.
문제는 대일 적자가 앞으로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그런 일본에서 MPEG-2 원천기술을 비롯한 첨단 기술을 날로 먹었다.
당연히 무능한 한국 정부와 최민혁 실장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에 미국 정부조차 최민혁 실장의 MPEG-2 기술과 ARN 지분에 관심을 뒀다.
재정경제원이라고 해서 그냥 조용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재정경제원 윗선에서 기생하는 정치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들이 아직 최민혁 실장에게 마수를 뻗치지 못한 이유가 있다.
최민혁 실장은 계속 미국에 거주하면서 사업을 벌이는 중이었고, 심지어 미국 재무부 측과 미팅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KM 센서가 미국 연방 정부와 KM DVR 납품 계약까지 한 상황이다.
이 미묘한 시기에 최민혁 실장을 부담스러워서 지켜만 볼 뿐이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김우석 심의관은 계속해서 다들 쉬쉬하는 외화 보유액을 가지고 재정경제원 내부를 시끄럽게 했다.
그러니 이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상 김우석 심의관이 KM 전자를 몇 번이나 방문한 이유였다.
최민혁 실장은 김우석 심의관 초청을 병행하면서 따로 재정경제원 내부 동향을 살폈다. 이 일은 이동빈 국세청 조사국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다행히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재정경제원뿐만 아니라 몇몇 행정부 기관에서 이미 최민혁 실장 자신에 대해서 다시 내사하는 중이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적이 생각보다 많이 늘어났나 보군요.]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님과 비교 대상이 되면서 여론이 안 좋아졌습니다. 특히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습니다.]
최민혁 실장 자신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복수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 정부의 행보와 비교가 된다.
제3자가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이 오히려 정부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했다.
그러니 이전 최민혁의 행보와는 다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행정부 윗선에서 직접 지시를 한 것이었다.
이제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최민혁은 김우석 심의관이 흥분해서 한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는 조성돈 팀장이 내민 보고서를 살피면서 혀를 찼다.
“이거 고민스럽네요. 한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에플 지분 매각에 연이어서 한 ARN 지분 매각 때문에 정부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배가 아프겠죠.”
“…….”
조성돈 팀장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2조 6천억에 이어서 25억 달러 대박은 아무리 낮게 평가하더라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하물면 세후 수익이니 말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무역 적자 확대가 늘어나는 것도 결국에는 한국 상품 경쟁력이 회복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인데, 우리 쪽을 탓합니까?”
“그건 정부에서도 잘 압니다. 가장 개방된 시장인 미국에서 우리 상품 경쟁력이 밀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안이 첨단화라는 것이 말이 쉬울 뿐이지, 어렵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우리 탓만 합니다.”
“하면 MP3 플레이어 시장을 연 것도 안 좋은 눈으로 보겠군요.”
“…네.”
실상 MP3 플레이어 업체와 KM 전자는 특허 협상을 끝냈다. 실제로 MP3 업체는 이 사전 협상에 꽤 만족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모든 업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재정경제원이 나서서 이들 업체를 부추겨서 문제를 만드는 것도 있었다.
이게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다만 재정경제원도 아직은 본격적으로 최민혁 실장을 견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 찔러보는 분위기였다.
이왕이면 재정경제원에 고분고분 협조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최민혁도 미국 재무부와의 협상 경험이 없었다면 한발 물러날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IMF를 눈앞에 둔 한국 정부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요. 역시 김우석 심의관을 초청하기를 잘했습니다. 그 양반을 협박하면, 재정경제원을 좀 흔들어서 저를 상대로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내일 오전 10시에 보자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이미 재정경제원과 김우석 심의관 입장을 충분히 파악했기에 어제 일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굳어 있는 김우석 심의관을 상대로 냉랭하게 말했다.
“아, 어제 한 이야기는 노파심에서나 하는 말이지만 아부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아요. 전 두 분을 만나서 재정경제원 내부의 실질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김우석 심의관은 내부 첩자가 되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국 경제 미래와 관련해서 두 분에게 꼭 필요한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방안을 재정경제부 내에서 실제로 써먹기는 어렵겠지만’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