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그는 태국 바트화 사태와 최민혁 실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살폈다.
얼핏 봐서는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한국에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은행, 증권, 보험과 같은 금융 서비스 분야의 개방이었다.
이건 단순히 말로 하는 개방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외국 투신사와 국내 투신사 사이에 합작 회사 설립을 알선해 주었다.
미국 투자 은행조차 처음에는 한국 정부의 이런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 금융 시장은 아직 미국 투자 은행과 대응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외국인 투자 한도를 대폭 늘리는 것이었다.
올해 와서 일반 상장 법인은 15%에서 18%까지 늘어났다.
다만 한전과 같은 공공기관은 12% 한도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이거나 연관이 된 일.
콜린스, 아이컴, KMP-02B, 차세대 배터리, 음성 인식, 영상 인식, MPEG-2, KM-DVR, 인공지능 미니 드론이 튀어나왔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결국 이쪽을 파볼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이 일과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최민혁 실장의 이전 행보를 중심으로 정보를 구했다.
당연히 모건 스탠리의 이전 행보와는 많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은 모건 스탠리의 이 독특한 반응에 한숨보다는 오히려 혀를 찼다.
‘하, 이 시기에 이랬나. 제대로 미쳤구나.’
미래를 아는 그로서는 지금 한국 정부가 하는 불장난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일 따위는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 일과 관련이 있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단지 눈으로 쓱 살핀 결과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한국 정부의 외국인 투자 한도는 나름 긍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당장 40억 달러 규모의 외국 자본이 국내 주식 시장으로 더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금 중에 태반은 KM 그룹 쪽에 흘러 들어갔다.
그 흐름에 KM 전자의 주가가 폭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KM 그룹 주가 역시 덩달아서 치솟아 올랐다.
최민혁은 정부 관련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만히 놔뒀다간 자신 역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신이 나서서 KM 전자 방파제를 만들어둘 경우다.
이것도 음모론으로 끌고 갈 수가 있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구나.’
아니면 지금 자신이 하는 에플 공매도, 아니, 샐로먼 브러더스가 한 몫 단단히 노리는 에플 공매도의 수위 조절을 해야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조성돈 팀장 역시 KM 그룹 투자처 현황을 보여주면서 안색을 굳혔다.
“이번 KM 그룹 주가 손바뀜은 좀 더 진지하게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걱정하는 겁니까?”
“네. 이번 모건 스탠리의 행보를 봐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플 공매도, KM 전자 주가 폭등과 같은 일은 다 같은 선상일 수도 있습니다.”
조성돈 팀장 말은 나름 그럴듯했다.
하지만 최민혁의 생각은 좀 달랐다. KM 그룹 주식 때문에 외국의 자본이 국내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자본 자유화에 따른 주식 시장 개방과 투자 자유화가 그 원인이었다.
‘아, 샐로먼 브러더스의 자금은 또 다르구나. 그건 KM 전자나 KM 센서 때문일 수도 있어. 아니, 두 가지 요인이 다 결합한 것이겠지.’
최민혁은 골치가 아팠다. 지금 자신이 진행하는 일 때문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 흐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결국 이런 변화는 IMF 사태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그 범위 자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곤란했다.
자신이 수도꼭지 물을 어떤 식으로 트느냐에 따라서 IMF 사태가 영향받을 수도 있었다.
‘혹시 재무부가 압력을 넣은 것도 이런 문제를 걱정한 것일까? 별로 안 좋네. 이건 내 능력 밖이야. 지금부터는 무리수를 둬서는 곤란해.’
“그래도 일단 모건 스탠리 측에서 딴짓을 하는 것은 아니죠?”
“네, 에플 공매도와 관련해서는 특별히 손을 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에플 주가가 계속 60달러를 횡보하는 것을 봐서는 꾸준히 매집하는 것 같습니다.”
에플 주식 매입 세력은 이제 단순히 모건 스탠리뿐만이 아니다.
미국 연기금을 통해서 다양한 자금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모건 스탠리만 딴짓하지 않는다면 별문제는 없겠지만.’
최민혁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는 결국 전생의 기억을 다시 한번 들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떠오른 이는 IMF 이전에 나름 재정경제원에서 노력한 한 사람이었다.
“아, 혹시 김우석 심의관은 아시죠?”
조성돈 팀장은 뜻밖에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혹시 KM 전자를 찾아와서 달러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경고한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네. 김우석 심의관은 재정경제원뿐만 아니라 행정부 내의 요직을 두루 거친 실무형 관료입니다. 크게 튀는 성격도 아니고, 성격도 원활합니다.”
“혹시 그 사람 당장 만날 수 있을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좋네요.”
* * *
선출직 공무원과 늘공은 성격이 좀 다르다.
몇 년 안 하는 선출직 공무원은 아무래도 여론을 더 신경을 썼다.
하지만 늘공은 평생 공무원에 있는 터라 안정적인 행정 운영에 더 집중한다.
재정경제원이 진행하는 자본 시장 개방 확대 조치 역시 마찬가지다.
선출직 공무원이야 여론을 의식해서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인다.
그런데 늘공은 좀 다르다.
이 조치가 실행된 후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김우석 심의관은 소위 말하는 늘공 고위직으로 그렇게 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 시장 개방 확대 조치 기본 골격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맹목적인 개방 조치 자체에는 반대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반대만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국인 주식 투자 한도 확대 이후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검토했다.
그가 한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실로 우려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특히 단기 투자가 문제였다.
그것도 투기에 가까운 단기 투자 말이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대기업도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DL 그룹이었다. 실제로 DL 그룹에는 비공식적으로 경고도 했다.
주거래 은행을 압박해서 자제하라는 경고도 계속했다.
하지만 DL 그룹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자기 인맥을 총동원해서 오히려 자신을 압력을 밀어 넣었다.
‘답답하네. 최민혁 실장의 반만 닮아도 이런 짓을 하지 못할 텐데.’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관한 조사를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당장 생기는 것이 환율 변동이었다.
조동석 과장이 이 문제를 전담해서 검토했는데,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주목했다.
아니,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무려 2조 6천억의 미국 투자 수익.
충격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그 이후 행보는 두 사람의 기대와는 달랐다.
KM 전자는 자신이 마치 은행이라도 되는 양 사내 금고에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보유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금도 포함된다.
심지어 벨린 투자를 통해서 번 수익은 아예 외국 법인에 그냥 내버려 뒀다.
김우석 심의관은 하도 황당해서 KM 전자를 찾아가서 우려를 표시했다. 혹시 외압 문제를 염려해서 언론까지 부르고 말이다.
하지만 KM 전자는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아예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덕분에 곤란해진 사람은 김우석 심의관과 조동석 과장이었다.
재정경제원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최민혁 실장 때문이 아니었다.
김우석 심의관이 불필요하게 국내 지역 경제, 일본 자금, 미국 자금을 같이 분석해서 재정경제원 내에 분탕질을 쳤기 때문이다.
[단기 외환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지어 경고까지.
김우석 심의관은 덕분에 지금 있던 자리로 내놓게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최민혁 실장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인 조성돈 팀장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는 조동석 과장을 만나서 결국 휴가를 내고, 같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우석 심의관은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가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되지?”
조동석 과장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툴툴거렸다.
“후회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다시 재정경제원에 복귀한 것도 심의관님 덕분입니다.”
“아니, 좀 더 버텼다면 괜찮은 자리에 갈 수 있었을 거야.”
“저랑 코드가 맞는 사람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오래 못 버팁니다.”
조동석 과장은 뜻밖에 김우석 심의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김우석 심의관의 무난한 성품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꼭 이렇게 무리해야 하나 싶습니다. 외국인 투자 확대는 이미 하기로 된 일 아닙니까?”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난 이 일에 반대하지 않아. 그저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대처를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게 되겠습니까?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클린턴 정부의 압력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것만 보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작년 대미 적자가 62억 달러인데, 병신같이 당하기만 하니까요.”
김우석 심의관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모든 것이 일본 때문이잖아. 일본을 때려잡는 중에 한국까지 두들겨 맞았으니까. 다만 우리 입장을 우겨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하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커.”
“아니, 때리려면 일본만 패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우리까지 넣어서 같이 두들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유럽이나 아시아 쪽에 따가운 시선을 받잖아. 그러니 같이 때려야지. 우리는 그 사이에 껴서 고통받는 것이니까.”
그랬다.
애초에 미국 정부가 노리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대일 흑자의 타깃인 일본이었다. 그렇다고 일본만을 때릴 수는 없었다.
한국, 대만을 같이 넣어서 일본과 같이 때리는 식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협상 과정에서 자동차, 철강, 조선 쪽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우석 심의관은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의 행보를 떠올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최민혁 실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조동석 과장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입니다. 한국인 기업가 중에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순히 재벌 3세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없고요.”
김우석 심의관 역시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굳이 KM 전자를 직접 찾아가서 은행 놀이 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그는 KM 전자에게 경고하기보다는 한번 이 회사가 어떤 곳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국세청 자료만을 믿지 않았다.
‘달랐지.’
조동석 과장은 그제야 슬쩍 입을 열었다.
“최민혁 실장이 왜 우리를 보자고 한 것일까요?”
“모르지. 이제까지 정부에 그 어떤 부탁을 한 적도 없고, 단 한 푼도 뇌물 따위를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국세청 내에 소문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거짓일까요?”
“글쎄.”
“괜한 자리에 가서 약점으로 잡히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국세청에 한 짓을 봐서는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도 없어. 우리를 죽이려는 이들에게 슬쩍 약만 쳐도 충분하니까.”
“하긴.”
김우석 심의관도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눈을 감았다. 그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한국 경제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특히 투자 개방과 관련해서 지금 정부가 하는 짓 말이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살 특공대 같았다.
최민혁 실장의 초청을 굳이 거절하지 않는 이유다.
‘정말 괜찮을까?’
그는 솔직히 정경유착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최민혁 실장이 정경유착까지 해서라도 정부의 정책을 바꾸었으면 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최민혁 실장이 독재한다면……. 난 찬성표를 던지고 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