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
놀라운 것은 서머스 부장관의 태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실을 직접 찾아가서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말했다.
“솔직히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루빈 재무장관은 크게 고민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일단 규모도 규모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이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백악관 내의 핵심 어젠다와 관련이 있다.
정보 초고속 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였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하지만…….”
그는 곧바로 백악관에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통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고속 인터넷 실용화는 이미 클린턴 행정부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사업이었다.
다만 이 사업을 홍보할 수단에 관해서는 결정하지 못했다.
고속 통신망이 왜 21세기를 주도하는 데 가장 필요한지 말이다.
거기에 KM DVR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안건은 이미 백악관 내에서 검토된 사안이었다.
[기다려 보세요.]
보고는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올라갔다.
* * *
클린턴 대통령은 또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나오자 짜증을 냈다.
“아직 그 일이 안 끝난 거야?!”
다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번 일이 이랬다저랬다 한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이미 아는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말이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재무부에 전화를 걸어서 또 다른 제안을 할지는 몰랐다.
앨 부통령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황당한 얼굴이었다.
“최민혁 실장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클린턴 대통령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앨은 아직 듣지 못했죠.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그를 대신해서 나선 이는 재무부 쪽에서 나온 보좌관이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앨 부통령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DVR이라, 흥미로운 아이템이군요.”
클린턴 대통령이 피식 웃었다.
“그냥 단순히 흥미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자료를 디지털 도서관으로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관점이니까. 보안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현실 데이터를 자료화할 수 있어요.”
그랬다.
정보 초고속도로와 관련해서 나온 이야기 중에 가장 핵심은 역시 정보였다.
1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곳은 대학교수나 대학생이었다.
이들이 도서관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 있는 콘텐츠를 올리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혼자만이 아는 정보가 아니라 정보의 공유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앨 부통령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기반으로 한 창의적인 이론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정보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 수단이 DVR이라면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앨 부통령이 슬쩍 입을 열자 눈치만 보던 다른 장관도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콘텐츠는 미국 기업가 정신을 자극할 겁니다!”
“기업가 활동이 활성화되면 새로운 기업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겁니다.”
“기회가 열렸으니, 회사를 떠난 중간 관리자가 독립하기 더 좋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실업 문제 역시 해결될 겁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의견은 다들 DVR 사업에 찬성표였다.
클린턴 대통령 역시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혹시 반대할 사람?”
“…….”
없었다.
정확히는 모건 스탠리와 알게 모르게 이권을 쥔 이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앨 부통령을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앨 부통령이 진행한 일이니, 마무리를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앨 부통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처지에서 큰일은 아니었다. 이미 정보 초고속도로와 관련해서 진행하는 업체는 넘쳐나니까.
최민혁 실장은 그런 이들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실무진 한 사람이 곧바로 로버트 루빈 장관에게 연락했다.
[이미 결정이 난 대로 처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 * *
“그것참.”
로버트 루빈 장관은 백악관의 전광석화 같은 결정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아는 바로 아무리 사소한 안건이라도 이렇게 빨리 처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일 놈의 쓰레기 자본가들.’
다만 그도 부담스러워서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다.
서머스 부장관 역시 너무 빠른 백악관의 의사 결정에 화들짝 놀랐다.
“서, 설마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받을 생각입니까? 10만 대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아마 더 필요할 거야. 보안 장비라고 하잖아. 음성 인식과 영상 인식 기능은 이미 증명까지 다 한 것으로 아니까.”
“그건 그렇지만 너무 특혜 아닐까요?”
“자네가 반대할 이유가 있어? 아니, 최민혁 실장 제안을 거절하면 문제가 될 거야. 최민혁 실장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말이야. 알면서 그래?”
“…….”
서머스 부장관은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의 말이 짜증스러웠다. 아예 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하지 말든가, 도대체 그사이에 마음을 바꾼 자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제 말은 미국 기업 중에는 얼마든지 후보자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ARN 지분으로 퉁칠 수는 없습니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와락 구겨진 얼굴을 한 서머스 부장관을 힐끗 쳐다보았다.
옆에 동행한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최민혁 실장을 견제하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자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더니 이젠 최민혁 실장을 지원하라고 생난리였다.
“이봐 서머스, 자네도 알잖아. 나라고 해서 마음대로 의사 결정 할 수는 없어.”
서머스 부장관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돈에 영혼까지 판 미국 정치인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반드시 후일 문제가 될 겁니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피식 웃었다.
“그 반대일걸?”
당연히 이유가 있다. DVR이 정보 초고속도로에 들어간다면 이 정책이 꽤 큰 탄력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백악관 입장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손뼉을 칠 일이었다.
게다가 설사 최민혁 실장을 알았다고 해도 여러 이익집단의 압력 때문에 순탄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비아냥대는 로버트 루빈 장관의 표정을 뒤로한 채 서머스 부장관은 재무장관실을 나서고 말았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한숨을 내쉬다가 결국 전화를 들었다.
[…10만 대면 됩니까?]
* * *
[네.]
[계약서 관련 서류를 이쪽에서 보내겠습니다.]
[화끈해서 좋네요. 그러면 그때 만나서 이번 안건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이 전화를 끊자 숨을 죽이고 있던 KM 센서 이사회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이들을 대변이라도 한 것처럼 최영란 본부장이 소리쳤다.
[미, 민혁아, 그, 그러면 정말로 미국 연방 정부에 KM DVR 10만 대 공급을 하는 거야?]
최민혁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본부장님이랑 장난하는 것 같아?]
최영란 본부장은 그제야 손수건을 꺼내서 식은땀을 닦았다. 그녀는 지금 이야기를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KM DVR 10만 대.
대당 가격이 무려 400만 원이었다.
[맙소사, 무려 4천억 매출이잖아!]
어지간해서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이기수 기획실장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김희수 부사장이 한 가지를 지적했다.
[이, 이거 순이익 대당 30%잖아. 그러면 1,200억 순이익이란 말이잖아!]
그랬다.
DVR은 애초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으로 이익이 다른 제품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았다.
이번 계약으로 무려 1,200억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전화 단 한 통에 말이다.
[…….]
최민수는 공황에 빠져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 재무부 고위 관료를 상대로 이런 갑질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최민혁 역시 겉으로는 대범한 척했지만 내심 쫄아 있었다.
‘뭐, 되긴 했는데…….’
그는 아직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최민수를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나도 놀랄 일이니까.’
그 역시 최민수를 자극하기 위해서 나름 연극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재무부 측에서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물론 그다음에 굳이 너무 나대지 않았다. 자랑도 어느 정도다. 너무 선을 넘으면 오히려 반감을 사니까.
다만 KM 센서 이사회 분위기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4,000억 매출도 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홍보.
미국 연방 정부에 무려 4,000억 매출고를 기록했다는 것은 유럽 시장 역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이걸 믿어야 하는 거야?’
최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미 계약이 진행된 일이다. 다 밝혀진 일인데, 최민혁이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 * *
“하, 씨발.”
최문경 부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동안 욕만 내뱉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KM 센서 측에 박아놓은 인사를 통해서 들어온 정보를 계속 확인 중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잘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최민수는 두 사람의 따가운 시선에 다시 천천히 이사회 분위기를 말해 주었다.
“저도 KM 센서 이사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그 자신이 느낀 소감을 바탕으로 한 실제적인 이야기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최민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최민혁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긴 한 것 같았다.
“어차피 알려질 정보라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알린 걸까?”
권재홍 비서실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품 납품 단가와 관련해서는 협상을 할 겁니다. 그것만 해도 몇 달은 족히 걸립니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 되잖아. 미국 재무부 고위층에 바로 전화해서 거래하다니. 아니 그게 된다는 것이 말이 돼?!”
“…….”
권재홍 비서실장도 입을 쿡 다물었다. 이번 일은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안다.
다만 그게 미국 재무부에 압박을 넣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론 바보가 아니었다.
“혹시 ARN 지분 20%를 매각한 것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모건 스탠리 측에 넘기기는 했지만, 실소유주는 다른 사람일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10억 달러인데? 그것도 세후 금액이잖아. 세금을 포함해서 추가로 붙는 금액이 얼마인지나 알아?!”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숨겨둔 카드를 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오성 그룹에 5% 지분을 넘긴 것은 모건 스탠리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랬다.
최민혁이 굳이 오성 그룹에 5% 지분을 넘긴 것은 의미가 있었다.
모건 스탠리 측에 다 넘기는 것보다는 한국 기업인 오성 그룹에 분산하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
오성 그룹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하.”
최문경 부회장은 ARN 지분 25% 거래의 밑바닥에 깔린 의미를 읽고는 탄식하고 말았다.
‘하긴, 민혁이 그놈의 똥고집은 알아주는데, 지분을 넘긴 것이 이상하기는 했어.’
최문경 부회장은 아직도 패닉에 빠져 있는 최민수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조차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 KM 센서에 입사한 최민수가 이해할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정말 독하다니까.’
그래도 명색이 재벌 3세였다. 설마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을지는 몰랐다.
한편으로 새삼 조카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다만 그는 머리를 계속 굴렸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이유가 뭘까 하고 말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받자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보 초고속도로를 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