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
“민수 씨는 정말 운이 좋아요. 우리 KM 센서는 정식으로 사람을 뽑지 않거든요. 어떻게 입사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네요.”
인사 팀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수합병을 통해서 늘어난 직원 외에는 새롭게 사람을 뽑지 않았다. 현재 검토 중인 것 역시 KM 그룹 내에서 사람을 뽑는 것이다.
실제로 KM 전자 쪽에서 어느 정도 검증을 거친 이들이 그 대상에 올라 있었다.
과거 최민혁 실장이 굴린 직원을 주로 선택해서 인원을 충원했다.
때문에 KM 센서는 애초에 따로 채용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최민수는 완전히 외부에서 뽑혀 온 사람이니, 이상한 일이다.
인사 팀은 그런 점을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
최민수는 이미 최민혁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어서 그저 듣기만 했다. 그는 새삼 놀랐다. 최민혁 실장이 이 정도로 빡빡하게 직원을 관리하는지 몰랐다.
그 역시 DL 그룹 측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서 일을 해 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민수에게 기회를 준 김현탁 사장이 새 계열사로 이동하면서 최민수를 버려뒀다. 그 탓에 그는 이제까지 DL 그룹 내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집에만 있었다.
최용욱 회장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서 이 자리를 잡아준 것이었다.
“민수 씨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거예요. 우리 회사가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니까. 정말 빡빡하게 굴려요!”
최민수는 재벌 3세는 고사하고 3개월 인턴보다 더 구박을 받았다. 황당한 일이지만 그를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최훈열 전무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최민수를 어느 정도 배려했을 테지만 상황이 그러지 못했다.
김여정은 아직도 남편 최훈열 전무와 최민혁 실장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최민수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때문에 자기 자리를 배정받고도 사무실에서 눈치만 봤다.
그래도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이가 어느 정도 챙겨 주긴 했다.
“민수 씨, 회의 있어요!”
“아, 네.”
최민수는 주섬주섬 사내 수첩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는 팀원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KM 센서 대회의실이었다.
회의실 안에는 30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자신은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회의실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전 KM 산업에서 검증 팀으로 있던 이기수 부장, 아니, 이번에 KM 센서로 자리를 옮긴 이기수 기획실장이었다.
[반갑습니다. 이기수 기획실장입니다.]
* * *
이기수 기획실장은 쾌 듬직한 인물로 말수가 많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오늘 회의를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KM DVR 영업과 관련된 부분 때문이다.
[이미 미국 지역 경찰에 KM DVR이 보급된 것은 알 겁니다. 기부 형식으로 간 것이라서 회사 매출에는 큰 도움이 안 됩니다. 다만 영업에는 큰 도움이 되죠.]
적당한 톤의 어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내용도 합리적이고 말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최태훈 부장은 특히 진지했다. 그가 맡은 것이 바로 KM DVR 개발과 관련된 총괄이기 때문이다.
KM DVR실이 비록 급조되기는 했지만 KM 센서 내에서 KM 이미지 센서실과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
최민수는 멍하니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한 지시가 무슨 일인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KM 센서가 왜 이렇게 갑자기 성장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따라서 내부 직원으로서 진실의 일부를 들으면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그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KM 센서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DL 그룹이 좋은 예다.
그가 있던 조직 자체의 수익성은 아예 없었다.
오히려 적자만 늘어났으니까.
이기수 기획실장은 바로 그런 점을 걸고넘어졌다.
[이미 KM DVR에 대한 마케팅이 워낙에 좋아서 영업이 밀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KM DVR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문제는 ARN과 협업을 통해서 해결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 해결과 영업을 더 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DVR실 임직원의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의 얘기에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KM 센서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최민수 역시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박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
* * *
최민수는 회의가 끝나자 복잡한 표정을 한 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갑자기 건물 인구가 소란해지자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앞에 있던 임직원이 우르르 몰려가면서 시끄러워졌다.
최민수는 다른 직원에 밀려서 앞으로 쭉 갈 수밖에 없었다.
KM 센서 직원들은 누군가와 악수를 하면서 지나갔다.
그도 역시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 민수 형 아냐?”
“누구… 미, 민혁이?”
최민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설마 여기서 최민혁을 볼 줄은 몰랐다. 아니, 그는 곧 뒤늦게 최민혁이 KM 센서 지분 51%를 소유한 오너라는 것을 깨달았다.
KM 센서 경영이야 최영란 본부장이 임시로 하기는 하지만 실제 오너는 최민혁이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자신을 보고 겉으로는 놀란 척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다지 놀란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설마 이 새끼가 의도적으로…….’
사실이었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과 최문경 부회장 동선을 일일이 감시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은 최민수를 비롯한 가족에 대해서 사전에 최민혁에게 양해를 구했고 말이다.
그는 최민수가 KM 센서로 출근하는 시간과 날짜를 다 고려해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의 부탁도 있었지만, 굳이 자신이 없었다면 다른 이를 이용해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로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다.
최민수 자신을 구박했던 이름 모를 직원조차 입을 딱 벌렸다.
최민혁은 그런 최민수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아예 노골적으로 떠들었다.
“어? 몰랐습니까? 이분이 바로 그 유명한 최훈열 전무 장남인 최민수 씨입니다!”
통로에는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가 이내 다시 어수선해졌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최민혁 실장이 누구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장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진 KM 센서 오너였다.
KM 센서 실세인 최영란 본부장조차 감히 대들지 못하는 이였다.
이기수 기획실장조차 얼굴에 금이 갈 정도로 크게 당황했다.
“저, 정말 최훈열 전무님의 장남입니까?”
“그럼요.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돈을 융통했죠. 사실 그 돈으로 주식을 시작해서 종잣돈을 모았으니까.”
“와.”
진짜 다들 큭 놀랐다.
최민혁의 명성이 극에 달하면서 그와 관련된 서적이 꽤 나왔다.
그중에는 투자의 신에 가까운 그의 행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종잣돈을 대준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수였다니.
“…….”
하지만 최민수는 썩은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이 이런 짓을 할 때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민혁의 행동은 이상했다.
그는 놀랍게도 최민수를 띄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경악한 눈으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최민수는 덕분에 최민혁 손에 이끌려서 이사회까지 참석했다.
* * *
KM 센서 이사회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이유는 최민혁 실장의 돌발 행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기수 기획실장을 비롯한 이번에 부사장으로 승진한 김희수조차 침묵했다.
최민혁의 지금 행동은 확실히 너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KM 센서를 설립한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겉으로 봐서는 확실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말조차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외 매출 시작은 역시 미국 연방 정부가 좋겠지요?]
김희수 부사장은 매우 놀랐다.
[저도 말은 들었지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미국 연방 정부에 납품할 수만 있다면 매출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 자체가 보험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라.
미국 연방 정부에 납품한 물건.
그 어떤 기업이 이 제품을 의심하겠나.
최민혁은 힐끗 최민수를 한번 쳐다본 후에 전화기를 들었다.
모건 스탠리를 통해서 확보한 스티븐 키렌 차관보에게 전화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 최민혁 실장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스티븐 키렌 차관보입니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꽤 놀란 음성이었다. 최민혁 실장과의 만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직접 전화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의 대응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모건 스탠리 통해서 충분한 조치를 했다고 판단했다.
[뭐 미국 재무부에서 원한 것은 충분히 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급부를 받고 싶습니다. 일테면 KM DVR를 미국 연방 정부에 납품하고 싶습니다.]
[…그건 당장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곳저곳에서 압박을 받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 일 때문에 서머스 부장관 역시 날이 서 있었다.
비록 그들을 밀어주는 세력이 있다고 해도 압박받아서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최민혁 실장이었으니.
하지만 최민혁은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사전에 꼭 확인하고 싶었다.
[섭섭합니다. 그런 식이면 저도 곤란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제가 생각이 없어서 손해를 봤다고 생각합니까? 고작 10억 달러에 ARN 지분을 넘겼겠습니까?!]
10억 달러가 고작 10억 달라고 말할 금액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처지에서는 고작인가 보다.
하여간에 날벼락을 맞은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식은땀을 흘렸다.
[바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그쪽에서는 손해 볼 일이 아닙니다. 미국 부통령이 밀고 있는 인터넷 생태계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방 정부 내에 고속 인터넷망을 깔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결국 최민혁 실장의 제안에 수긍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물론 시간제한을 뒀다.
[10만 대 정도 생각하고 있으니, 삼십 분 안에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가 최민혁 실장에게 반박하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차기 공략으로 착수한 사업이 다름 아닌 초고속 기간 통신망이었다.
현행 인터넷 속도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이 사업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미국 전역을 잇는 광역 네트워크 사업은 당연히 미국 연방 정부 역시 피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최민혁이 실상 ARN 지분 매각 대가로 노리는 이권이었다.
다만 이런 내막을 잘 모르는 KM 센서 이사회는 다들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최민혁이 얘기한 KM DVR 수출 10만 대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
특히 최민수는 입을 딱 벌린 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뒤늦게 이사회에 나타난 최영란 본부장 역시 최민수를 힐긋 일별하고는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저, 정말이야? 미, 미국 연방 정부에서 우리 KM DVR 공급을 받는다고?!]
최민혁은 따가운 이사회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최영란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 역시 그때는 그냥 들었는데, 지금 전화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은 그녀가 생각한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 그 ARN 지분 매각을 말하는가 본데, 그거 10억 달러에 넘겼잖아. 그게 헐값에 매각한 거라고 말하는 거야?!]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ARN 지분 매각은 이사회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영 방송 뉴스에서 지겹도록 방송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최민혁 실장만을 빨아주는 곳이 공영 방송이라고 하겠나.
[내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연락을 한번 지켜보자고.]
* * *
삼십 분은 생각보다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전화 연락을 받은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바로 서머스 부장관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