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93화 (790/1,021)

#793.

하지만 말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은 KM DVR 관련 팸플릿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현재 사용된 기술은 물론 심지어 성능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한술 더 떠 그걸 촬영한 영상까지 말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최민혁은 몇 개 생산하지도 않은 고성능 ARN이 적용된 KM DVR의 샘플까지 보여주었다.

“자, 이 성능을 보고 직접 판단하기 바랍니다. 제가 KM DVR 측에 투자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고성능 ARN의 능력이니까.”

예전의 최민혁 실장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정보를 숨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최민혁 실장이 아예 작정하고 이렇게 정보를 푼 적은 없었다.

그러니 권태성 실장의 표정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네.”

권태성 실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괜히 좋은 소리 해봐야 최민혁 실장이 그걸 꼬투리 잡아서 돈을 더 뜯어낼 것이고, 나쁜 소리 해봐야 그걸 핑계로 또 다른 압박을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실무진들 역시 최민혁 실장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KM DVR 관련 자료만 살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의 주변을 둘러싼 일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 모건 스탠리와의 갈등 말이다.

다행이라면 이번 일은 케네스 최를 통해서 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설마 우리 오성 전자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서 모건 스탠리를 자극할 생각인가?’

최민혁 실장은 마치 그런 권태성 실장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씩 웃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솔직히 오성 전자에서 ARN 지분 일부를 사들이는 것은 미래 디지털 투자를 위한 좋은 선택입니다.”

“…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당장 KM DVR 성능을 확인하고서야 응용 가능한 분야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팸플릿에는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손을 들어서 막았다.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사안이었다. 뒤늦게야 에플에서 진행하는 일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심지어 애니 인공지능까지 응용이 가용하다니. 설마 에플 차세대 제품에 이 기술을 이미 넣지는 않았겠지?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돼!’

의혹은 무럭무럭 치솟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지 않고서야 지금 최민혁의 행동은 설명이 되질 않았다.

* * *

권태성 실장의 우려는 단순히 에플을 염려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기술이 문제였다.

그리고 실상 이 가치를 가장 쉽게 알아본 사람은 다름 아닌 스티븐이었다.

스티븐 역시 CES 전시회를 준비를 위해서 아이컴 기능 일부 수정 작업을 시켜 놓고는 연구원과 같이 꼬박 밤을 새웠다.

그건 최민혁 실장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이 수정된 아이컴을 들고 그를 직접 찾아왔다.

안 그래도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을 자극해서 모건 스탠리를 자극하려는 시점이었다.

“…설마 투 마이크 시스템을 적용한 겁니까?”

스티븐은 콧대를 잔뜩 내세워서 자랑을 시작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기구가 어떻고, 보드는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했으며, 튜닝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둥.

다행이라면 이 투 마이크 시스템 때문에 애니 튜닝 역시 몇 단계 더 레벨을 올렸다.

최소한 영어를 사용한다면 대화를 서로 주고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투 마이크 시스템이 정답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노이즈로 인한 타임 딜레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지수 박사도 삽질을 줄일 수가 있었다.

그건 애니 인공 지능의 완성도를 올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상업적으로 애니를 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에플 내부적으로 부정적인 이들이 많았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것과 실제로 필드에서 사용하는 것은 그 결과가 달라서였다.

그런데 스티븐은 악으로 깡으로 밀어붙여서 일단 답을 찾아냈다.

“CES 전시회에는 이것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이게 쉬운 일 같아도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랬다면 오성 전자를 비롯한 전 세계 글로벌 전자 회사가 이미 선수를 쳤을 테니까.

그들이 실패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부품 단가, 원천기술과 같은 한계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누구보다 그 의미를 잘 알았다. 그는 이미 KM DVR에서 살짝 쓴맛을 봤다. DEC이 아니었다면 욕을 좀 들었을 것이다.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요?”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윈도 95와 경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네.”

최민혁은 새삼 스티븐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애니를 구동시켜 봤다.

이번엔 애니가 자신의 대답을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이전에 보인 오동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노이즈 필터 기술에 대한 안정화 작업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티븐도 아쉬운 점을 토로했다.

“문제는 이 애니 시스템이 아이컴에서만 잘 작동합니다. 윈도 95에도 포팅해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효율이 높지 않았습니다.”

“거긴 따로 투 마이크 시스템을 적용해서도 안 됩니까?”

“네. 윈도우95가 문제인지, 하드웨어 성능이 취약해서인지, 아니면 드라이버 단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렴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나마 에플은 자체 OS를 쓰기 때문에 철저한 튜닝이 가능하기에 이루어 낸 성과니까.

다만 그는 이 시점에서 자신을 갑자기 찾아온 스티븐이 의아했다.

아이컴은 추후 자신을 호출해도 될 문제였다.

“혹시 다른 용건이 있습니까?”

스티븐은 그제야 최민혁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재무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건 아마 미국 하원에서 시비를 걸었기 때문일 겁니다.”

최민혁도 이 부분은 시간이 없어서 깊이 파지 못했다. 정확히는 재무부 눈치를 봤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인지는 아세요?”

“존 스미스 하원의원입니다.”

존 스미스 하원의원은 다른 하원의원과는 달리 과거 외국투자위원장을 맡았다.

이 외국 투자위는 대미 첨단 투자 기술 부분에 진출한 모든 기업을 감시했다.

이들의 감시를 받는 나라는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나라다.

일본은 무려 2,120건이나 감시를 받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님이 가진 기술은 일본 정부보다 더 많았습니다.”

“…네.”

최민혁도 내심 자기가 보유한 원천기술을 떠올렸다. MPEG-2만이 아니었다. 와컴을 비롯해서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그도 이 사태가 MPEG-2 표준안을 무리하게 사들이고 난 결과라는 것을 잘 알았다.

‘무리수라고 생각은 했지만 많기는 많구나.’

괜히 미국 하원에서 최민혁을 감시 대상에 올린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일본의 감시 기술 항목이 대폭 줄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새삼 이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븐 역시 굳은 얼굴로 계속 설명했다.

“아마 연말이면 존 스미스 의원이 국가안보위에도 보고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재무장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11인 위원회에서 최민혁 실장님에 관해서 추가 조사를 하게 될 겁니다.”

“미국 재무부 미팅과는 별개라는 말씀이군요.”

“네. 재무부 쪽에서 요청한 것은 어디까지나 확인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11 위원회에서 이미 안건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지금이야 클린턴의 재선이 걸려 있어서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클린턴 재선이 되고 난 후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최민혁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전생 기억을 서핑하면서 이와 관련된 사안을 파악했다. 지금 그가 진행하는 일도 그 연장선이니까.

그도 KM DVR과 같은 사업을 무리하게 진행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성능 ARN은 덤이고 말이다.

‘물론 고성능 ARN 기술을 확보해서 전화위복이 되기는 했지만 역시 ARN 지분 일부를 매각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ARN 지분을 계속 들고 지금처럼 갈 수는 없다.

모건 스탠리와 같은 이익 집단이 계속 걸고넘어질 것이다.

미국 정치인은 국가 안보, 다르게는 자기 이권이라고 생각해서 집요하게 매달릴 것이다.

스티븐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최민혁 실장에게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물론 다른 생각도 있었다.

“그 고성능 ARN 기술 말입니다. 기존의 ARN 코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ARN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겁니까?”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맙소사!”

스티븐은 굳이 여기다 대고 ‘존 스미스 하원의원이 최민혁 실장님을 공격한 이유가 있군요’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자기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바로 실패한 뉴턴 프로젝트를 떠올린 것이었다.

최민혁은 스티븐의 눈치를 보면서 툴툴거렸다. 그도 짜증스러웠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일단 어떻게 해서라도 순탄하게 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솔직히 뉴턴에서 아이디어를 따 왔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CPU 성능만 올리고, 외부 디자인 요소가 바꾸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랬군요.”

스티븐은 그제야 최근 최민혁 실장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KM DVR을 비롯해서 뜬금없이 고성능 CPU 사업부를 인수한 일 말이다.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스티븐이 생각하기엔 최민혁 실장은 사실 에플에서 진행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스티븐은 그제야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그 역시 이번 일에 대한 관심을 떨치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님은 누가 뭐래도 에플 지분 32%를 소유한 대주주입니다. 그렇다면 에플을 위해서 적극 나서주는 것이…….”

최민혁은 8% 지분 매각 건을 떠올리면서 한편으로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 때문에 에플 주가가 50달러를 돌파했다는 것을 의식해서 피식 웃었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까? ARN 기반 기술을 응용한 새 제품 말입니까? 거기에 MPEG-2 기술을 더하면 더 좋고 말이죠?”

스티븐은 민망해서 쓱 고개를 돌렸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에플을 외면할 리가 있습니까.”

스티븐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는 혹시라도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 8%를 매각하고 난 후에 나머지 지분도 지금 매각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그는 당분간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을 매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좋습니다. 저도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플 이사회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이번 하원의 압박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그는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스티븐 의도는 잘 알았지만, 그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스티븐이 가진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니까.

‘KMP-02B와 아이컴 출시 후에는 더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겠지. 여기에 차세대 제품을 더 하나 성공하게 한다면, 스티븐의 명성은 전생처럼 폭발할 거야.’

한편으로 스티븐이 고맙기만 했다.

전생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흔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스티븐도 한 가지는 걱정되기는 했다.

“오성 전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어차피 에플에서 아시아나 유럽 시장 물건까지 다 생산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인건비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이 필요합니다. 오성이나 LC 전자는 그 대안일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스티븐도 꽤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 역시 오성 전자나 LC 전자에 큰 부담을 느꼈다. 혹시라도 미국 재무부 사태 때문에 최민혁 실장이 오성 전자나 LC 전자에 손을 들어줄까 염려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그 모습에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의외로 미국 재무부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이 나서 준다면 그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이곳저곳에서 자꾸 삽질하지 않았다면 스티븐도 저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사실 지금 하는 행동에 그런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오성 전자나 LC 전자를 믿을 수가 없지만 에플 역시 전적으로 믿기는 곤란하지. 그렇다면 오성 전자의 태도를 봐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