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92화 (789/1,021)

#792.

헬렌이 최민혁의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놀랐다. 최민혁 실장이 안재운 전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야 안 것이었다.

이지수 박사 역시 테일러 박사에게 괴롭힘을 당해봤기에 최민혁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설마 미인계를 사용하란 말인가요?”

“미인계도 미인계 나름이죠. 정신적인 유혹은 좀 다릅니다. 아, 오해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한 달에 10분 정도 말하는 것만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 수법이었다.

“…….”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을 째려봤다. 그제야 최민혁이 뭘 하라고 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두 사람이 딱히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안재운 전무에게 웃어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녀들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을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건 치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최민혁 실장은 냉철하고 차가운 남자였다.

‘…정말 보기와는 다른 남자다.’

최민혁은 단순히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기술은 10년을 앞서간 기술입니다. 그래서 저 혼자 할 수는 없습니다. 두 분의 꿈을 위해서라도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어요.”

“최 실장님이 반도체 사업을 하면 되잖아요!!”

최민혁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게 한두 푼이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관리는 또 어떤지 아십니까? 단적인 예로 당장 IPS-LCD 사업만 놓고 봅시다. LC 전자와 오성 전자가 이 사업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십니까?”

실제로 관련 자료도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IPS-LCD 특허권자라서 두 회사 내에서 생산한 물량과 같은 내부 정보를 다 알고 있었다. 그 보고서를 두 사람에게 넘겼다.

“…….”

두 사람은 LC 전자와 오성 전자 내부의 IPS-LCD 현황까지 읽으면서 기가 찬 얼굴로 최민혁 실장과 보고서를 번갈아 살폈다.

최민혁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골치가 아팠다.

“장치 사업은 어렵습니다.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됩니다. 그런데 돈도 안 됩니다. 그러니 굳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회사를 이용하면 되니까. 아니면 그 회사를 만들게 해서 이용해도 됩니다.”

최민혁은 목을 축일 겸 와인 한 잔을 다시 마셨다.

“KM 산업은 아직 반도체 패키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 쪽은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무리수를 둘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ARN과의 코웍은 좀 다릅니다. 부가 가치가 아주 좋은 산업 영역이니까.”

KM 산업이 부지런히 반도체 설비를 키우고는 있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더욱이 올 연말부터 IMF 한파가 시작되는 시점이니까.’

지금 시기에 무리한 투자를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투자를 줄여야 했다.

그런데 최민혁 자신이 지금 하는 투자는 대부분이 국내 시장이 아니라 외국 시장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 태반이다.

회사법인 자금이 국내가 아니라 외국을 빙빙 도는 셈이다.

이것을 이용하면 국외 법인에 달러를 무지막지하게 쌓아둘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중이었다.

주식 매각 자금을 비롯한 많은 자금은 달러로 해외법인에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무리하게 투자를 늘릴 수가 없었다.

최민혁 자신이 굳이 KM DVR 계열사를 설립시킨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굳이 다른 분야 쪽으로 쓸데없이 눈을 돌리지 말기를 바랐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은 KM 센서 때문에 맛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는 이미 ARN 고성능 관련 보고를 받고는 최민혁 실장에게 계속 문의 전화를 해왔다.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고성능 ARN 로드맵 보고서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안재운 전무의 행동은 너무 나갔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제가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 측에 경고 정도는 해두겠습니다.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오성 전자 측 인사에게 극단적인 대처는 좋지 않습니다.”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풀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으면서 일축했다.

“정확히는 인공지능 산업 생태 때문입니다. 두 분이 원하는 꿈이 바로 인공지능 생태계 구축 아닙니까. 그 꿈을 제가 이루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지수 박사조차 화들짝 놀랐다.

“…그, 그게 지금 가능해요?”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저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성능 ARN 기술을 품에 안은 이 순간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쪽 기술도 좀 정리를 해두세요. 언제 시작할지 모르니까.”

“…아, 알겠어요.”

두 사람은 새삼 놀라운 눈으로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민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성능 ARN 로드맵을 다시 살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시뮬레이션 결과만 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애니로는 안 돼. 모바일에 맞게 수정을 해야 해.’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메신저 개발을 진행하면서 애니에 대한 수정이 진행되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발전을 시켜야 했다.

그건 이지수 박사에게도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 될까? 아냐, 성공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몰라. 그래도 최민혁 실장이 도와준다면…….’

헬렌조차 최민혁 실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고성능 ARN 로드맵 보고서를 살피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다만 그녀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왜 최민혁 실장이 굳이 오성 전자 측 인사에게 심하게 하지 않는지 말이다.

‘결국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이야기잖아.’

* * *

최민혁 실장은 당연히 오성 전자를 믿거나 좋아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오성 전자를 벼랑 끝으로 몰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비즈니스이니까.’

그랬다.

비즈니스에 개인 감정은 금물이다.

더욱 오성 전자가 지금 가전 쪽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잘 안다.

‘아직은 스마트폰 세상이 아니니까.’

적어도 10년이 지나야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오성 전자의 차세대 먹거리는 가전, 반도체, 핸드폰이었다.

최민혁은 때문에 미국에서 권태성 실장을 만나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요즘 오성 전자가 한창 잘나갑니다.”

“최민혁 실장님에게 비할 바는 아닙니다.”

권태성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 때문에 미국에 오랫동안 체류해서인지 한국에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만남 요청에 고민했다.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만나자고 할 때는 다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KM DVR과 ARN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콜린스 사업부 매각 이야기가 같이 나올 수가 있다.

그게 최민혁 실장에게 유리하니까.

더욱이 이 자리에 온 것은 임권수 부장, 황광수 차장 두 사람이었다.

“…어, 안재운 전무는 안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실무진끼리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안재운 전무가 협상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대답하기 좀 곤란합니다.”

“그렇습니까.”

서로 간단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의아했다.

물론 과거 최민혁 실장이 잠적을 하였던 일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개인 감정은 일단 덮었다.

그는 정말 최민혁 실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만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 두 사람은 마치 영국 왕실을 떠올리게 하는 초호화 건물에 두 눈을 정신없이 돌렸다.

그들이 지금 있는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보기 드문 초호화 저택이었다.

“멋지죠? 에플 주가가 단기에 급등한 바람에 그 이익의 일부로 샀습니다.”

지금 에플 주가는 무려 55달러를 돌파했다가 차익 매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48달러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다시 저가 매수세가 몰리면서 53달러를 돌파했다.

에플 주가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파른 등락을 거듭했다.

덕분에 벨린 투자는 이 흐름을 타고, 재미를 단단히 봤다.

“…네.”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을 자극했다.

“에플 주가 급등에는 오성 전자 역시 한몫을 했다는 것을 아세요?”

“네?”

“그쪽에서 KMBOOK과 같이 서로 MOU 체결을 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애니 때문이라는 설이 있어요. 결국 아이컴 생태계 일부가 된 셈이죠. 아이컴을 산 유저는 결국 오성 전자 가전제품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금방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건 KM DVR 홍보와도 관련이 있다.

갑툭튀로 튀어나온 KM DVR이 있다.

그렇다면 오성 가전 역시 내일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정보를 가지고 재미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 자신이었다. 그가 KMBOOK과 오성 전자의 MOU 관련 정보를 언론에 슬쩍 흘린 것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려고, 잠적하신 분이 갑자기 초대하신 겁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무관하다고 말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정확히는 그쪽이 이지수 박사에게 한 요청 때문입니다. 저도 딱히 두 회사 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이지수 박사가 지금 하는 일이 많습니다.”

권태성 실장 역시 이지수 박사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지수 박사 설득은 언제 가능합니까?”

“일단 에플 CES 전시회 이후에 일정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CES 전시회’란 말에 권태성 실장은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 때문에 ‘CES 전시회’란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CES 전시회 이후라, 휴우, 알겠습니다. 하면 우리 오성 전자와 손을 잡는다고 생각해도 됩니까? LC 전자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물론이죠.”

“하지만 IPS-LCD만 해도 오성 전자와 LC 전자 양쪽에 다 줬지 않습니까. 심지어 아이컴 양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컴 설계는 에플에서 진행했지만, 양산은 좀 달랐다.

이미 오성 전자와 LC 전자 측에 같이 나눠서 일을 주기로 잠정 결론이 났다.

다만 이 일도 중간에 말이 많았다.

아직 구두 협정이라서 계약 조건에 따라서 파토가 날 수 있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이런저런 협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하나씩 다 찍지는 않았다.

“앞으로 우리 KM 전자는 오성 전자와 서로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다 그런 것을 고려해서 일하는 겁니다. 다만 안재운 전무를 좀 자재시켜 주세요. 두 사람이 거북해하니까.”

이게 본론이었다.

안재운 전무 말이다.

권태성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의 지적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안재운 전무를 부추겼지만 하는 행동이 선을 넘었다.

‘이건 차분하게 설득을 해봐야겠어. 안 되면 안 회장님에게 직접 보고할 수밖에 없고.’

“…좋습니다.”

최민혁은 우선 이지수 박사의 요청에 대해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다음에 자신이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말했다.

“아, 그리고 ARN 지분 일부를 매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있으면 한번 검토해 보세요. 10% 지분 기준으로 4억 달러입니다. 모건 스탠리 쪽에서 진지하게 검토 중이니, 잘 생각을 해보세요.”

에플 지분이 아니라 ARN 지분 10%에 4억 달러라.

“…네.”

권태성 실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인수한 50% ARN의 지분 인수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최민혁 실장이 그런 권태성 실장 표정을 보면서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사들일 때의 ARN 가치와 지금의 ARN 가치는 많이 다릅니다. 이건 모건 스탠리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사들인 에플 주식 대금은 1달러 기준으로 1조 가까이 됩니다. 그 주가가 벌써 50달러를 넘었으니, 무려 50배 장사를 한 겁니다. 그만큼 회사 가치가 커진 거죠. AR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고성능 ARN 사업부를 인수한 후에 KM DVR에 적용했습니다. 이 KM DVR 성능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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