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
어이가 없는 자레드 설린 경위는 힐끗 제레미 베이커 경사나 루빈 센티에고 서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루빈 센티에고 서장은 오히려 최민혁 실장 편을 들어주었다.
“우리 최민혁 실장님이 MP3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분인 데다가 에플의 대주주잖아. 그러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 지역을 정한 거야!”
“서장님!!!”
“자레드 경위, 정신 좀 차려!!”
“최민혁 실장 이름하고, 이번 일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저 장비를 보세요. 노림수가 뻔하잖아요. 이번 기부를 명분 삼아서 기업 마케팅하려는 것이 분명해요!”
“그게 뭐? 다른 기업은 안 하는 줄 알아?!!”
실제로 지역 경찰에 아무런 의도 없이 기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많았다. 그런데 어찌 됐든 둘 다 지역 경찰 재정에 도움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내의 한 지역을 담당하는 경찰서장 입장에서는 최민혁 실장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자기 관할이 아닌 다른 지역 쪽부터 일 처리를 해서는 곤란했다.
최민혁 역시 지역 경찰 내부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가 말해줄 테니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10년 후에 납치 범행이 들통나지만 이미 납치되어 있는 상황이잖아. 소녀 세 명이라도 그녀들의 증언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그의 전생 기억 상으론 소녀 3명이 10년 후에 극적으로 구출된다.
그것도 운이 좋아서였다.
한 경찰이 상대가 납치범이라는 것을 알고서 접근한 게 아니라 그들 행동이 수상쩍어서 조사하다가 우연히 납치극이 들통이 난 것이었다.
여기서 소녀라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인의 감성을 딱 자극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최민혁 역시 자신이 무리수를 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정가에 연줄이 없는 그로서는 다른 대안을 솔직히 찾기가 어려웠다.
‘뭐,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광고효과는 최고일 거야.’
물론 이번 일은 단순한 납치 사건 재조명이 아니었다.
DVR은 꽤 매력적인 소재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 DVR만을 노리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MPEG-2의 향후 미래 가치를 보일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검증된 MP3, 이미 검증 과정인 CDMA와는 달리 아직 미래 가치가 확실하지 않은 사업 분야가 MPEG-2이니까.’
* * *
최민혁이 기억하는 소녀 납치 사건은 납치 소동 이후에 10년이 지난 후에야 언론을 통해서 밝혀진다.
그때는 이미 아이까지 낳은 후였다.
이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한동안 난리가 났다.
납치 대상이 고작 10살 남짓한 소녀 자매였기 때문이었다.
이 범행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납치범이 샌프란시스코 외곽 쪽에 이 세 자녀를 가두어두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이주 부족한 시간을 빡빡하게 사용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주로 외주 업체를 고용했다. 비용은 아끼지 않았다.
비록 몇백 억 정도가 깨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도 어차피 DVR 장비가 다 설치되지 않을 것이고, 사건이 해결되면 그때 봐서 완급 조절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뭐, 좋은 일 했다고 치면 되니까.’
“요즘 아동 납치가 빈번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사건에 적극 이용해 보세요.”
자레드 설린 경위는 여전히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이게 효과가 있을 거로 생각합니까?”
“기존 아날로그 CCTV와는 많이 다릅니다.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할 수 있어서 마우스 클릭만으로 다시 영상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까칠한 자레드 설린 경위에게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지역 경찰에 찾아와서 기부라는 명분으로 하고 있는 최민혁 실장 자신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쩍었다.
더욱이 내놓은 DVR 장비는 쓸데없기 짝이 없었다.
나름 최민혁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런데 사실 편의성만 놓고 보면 두 시스템은 도저히 비교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최민혁은 따라서 자레드 설린 경위를 설득하기보다는 경찰서 벽면에 붙어 있는 실종 사진 여러 장을 책상 위에 올렸다.
실종자 들의 얼굴을 자신이 기억하는 사건의 피해자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실종자 중에서도 세 자매의 경우는 확실히 특이했다.
다행히 실종자 명단 중에 세 자매가 있었다.
‘그렇지. 부모가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고 했으니. 역시 예상대로네.’
“여기 보세요. 레이크 타호 인근에서 실종된 자매의 부모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아마 지금도 계속 연락이 올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
딱히 그녀들의 부모만 연락해 온 것이 아니었다. 실종자 가족은 주기적으로 이곳을 찾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들 여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당황한 자레드 설린 경위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홍보 효과는 수천억 이상이라고 본다.
‘그보다는 재무부도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이미지 효과를 만들 수 있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투자자 신분으로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미국 언론을 죄다 호출해서 멋진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 중요했다.
궁극적으로는 재무부 협상을 통해서 자신이 얻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 대안이 디지털 CCTV, 정확히는 DVR이라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단순히 벨린 센서 매출 때문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서 MPEG-2 기술 기반을 쌓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는 모바일 MPEG-2 기술 완성도를 더 올릴 수가 있는 수단이 된다.
최민혁 자신이 멍청해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코 손해를 보는 장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지역 경찰이 알아서 먼저 답을 찾아주면 좋을 텐데, 아니라면 내가 나서야지.’
* * *
캘리포니아는 꽤 넓은 곳이다. 때문에 도심 외곽에서 사고가 나면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곳에 사는 이들도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 편의점을 찾는다.
두 부부가 생활용품을 구하기 위해서 도심을 간혹 찾았다.
그들은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생필품을 차량에 담았다.
하지만 이 모습을 눈여겨보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간혹 특정 종교에 심취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이 정도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한때 이 지역에서 인쇄업을 했던 사업자로, 지역 유지였다.
그래서 인쇄업 자체를 위한 넓은 부지가 특별하게 눈을 끌지는 않았다.
인쇄업이 어려워지자 이후에는 따로 교회를 만들어서 시선을 피했고 말이다.
그런데 벨린 CCTV가 설치된 후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들 부부의 동선이 벨린 CCTV에 정확히 찍혔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아날로그 CCTV와는 화질부터가 달랐다.
비록 정교한 사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준은 된다.
이들 부부가 담은 생필품 중에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제법 있었다.
몰리 존스 경위는 그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기적으로 FBI가 와서 실종된 자녀에 대한 탐문 수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 실종 자매 부모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잃지 않았다.
‘레이크 타호 인근 길에서 납치되었다고 했었던가?’
문득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기억을 어떻게 떠올렸는지 말이다.
‘아, 최민혁 실장이 이야기했어.’
자레드 설린 경위는 몰리 존스 경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몰리 경위, 정말 최민혁 실장 말을 믿는 거야?!”
자레드 설린 경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방문은 너무 뜬금없었다.
커피 잔을 돌리는 제레미 베이커 경사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자레드 경위님은 왜 매사에 부정적입니까. 혹시 압니까. 저기 DVR를 이용해서 납치범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 넓은 캘리포니아에서 운 좋게 저 디지털 CCTV에 잡힐 거로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성능이 좋으면 뭐 해, 당장 범인이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캘리포니아 전체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실종되어도 범인을 알기는 어려웠다.
몰리 존스 경위는 의외로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
“여기 처음 DVR이 설치된 곳을 잘 보면, 도심을 통하는 유일한 통로잖아요. 따라서 이곳만 잘 살펴도 혐의자를 특정할 수 있습니다.”
“어이구, 셜록 홈스 나왔네!”
비아냥거리는 자레드 설린 경위의 행동은 딱히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시간이 꽤 지난 사건의 납치범이 잡히는 경우는 운이 정말 좋은 케이스였다.
현실적으로 이틀만 지나도 납치 사건의 범인을 잡기란 어려웠다.
하물며 이렇게 한적한 캘리포니아 외곽 지역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 이야기에 불쑥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잠깐만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는 루빈 센티에고 서장 안내를 받은 채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민혁 실장 뒤에 있던 루빈 센티에고 서장은 눈을 부릅뜬 채로 경고했다.
그 뒤를 따른 경호원 김명준 과장과 조성돈 팀장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 왜 캘리포니아 지역 경찰서 일에 끼어드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에플 공매도, CES 전시회, 송도연 공연, CDMA 사업과 같은 일이 산적해 있었다.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혹시나 싶어 김명준 과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도 자레드 설린 경위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콧방귀만 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그들 대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녹화된 동영상 파일 일부를 돌리면서 한 장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 화면에 나온 분들 말입니다. 좀 이상한데요.”
자레드 설린 경위는 황당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잠깐 화면을 살핀 최민혁이 뭔가 이상하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충혈되도록 화면을 본 자신을 무시한 행동에 발끈한 것이다.
“윌슨 부부로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분입니다. 인쇄업을 해서 돈을 제법 모았고, 지역 사회에 공헌을 많이 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분들이 뭐가 의심스럽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님이 더 수상합니다!!”
최민혁은 자신에게 부정적인 자레드 설린 경위를 탓하지 않았다.
“…다 좋은데, 이 두 분은 자녀가 있습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네.”
실로 차분한 태도.
최민혁 실장 행동은 마치 숙련된 20년 차 베테랑 형사 모습 같았다.
그 모습이 분위기를 바뀌었다.
최민혁 실장이 지적한 윌슨 부부 화면을 다시 살펴본 몰리 존스 경위가 슬쩍 끼어들었다.
“자녀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가족도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러면 이상하죠. 왜 이렇게 생필품이 많습니까? 두 사람이 먹기에는 많이 과한 양인 것 같네요. 혹시 이 부분에게 자녀가 있는 게 아닐까요?”
확실히 두 사람이 차량 안에 집어넣는 생필품 물량은 과했다. 몇 달 동안 쓸 물품이라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지난주에도 비슷한 물량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자녀는 없는 걸로 아는…….”
자레드 설린 경위는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몰리 존스 경위가 녹화된 동영상 파일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윌슨 부부가 사는 생필품 양이 너무 많았다.
두 사람은 많이 먹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따로 챙긴다는 점이다.
최민혁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자신이 느낀 점을 하나씩 지적했다.
“여기 이분들 사는 곳 말입니다.”
녹화된 동영상은 윌슨 부부가 사는 집을 멀리서 찍었다.
2m가 넘는 펜스로 둘러싸인 집은 마치 중세 성처럼 보였다.
“그건 원래 인쇄 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좀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일반 공장 주변에 저렇게 두터운 철책을 설치합니까? 아예 외부에서 보이지도 않는데? 그리고 저 많은 생필품은 저렇게 사 가는 이유는 뭐죠? 설마 저 공장 안에 따로 식구가 있는 겁니까?”
“그건…….”
그것까지는 그들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