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
“굳이 갑자기 이렇게 일을 벌여도 될까요. 미국 쪽에 아예 따로 경비 법인으로 벨린 시큐리티를 설립해야 하나 싶습니다.”
벨린 시큐리티.
엄밀히 말해서 외부 경비를 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는 아니었다.
오직 최민혁 실장, KM 전자, 벨린 투자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당장은 한국, 미국, 일본을 위주로 인력을 선발 중이었다.
특히 한국이 중심이 되고, 미국 쪽의 인력을 늘리는 중이었다.
이미 한국에 있을 때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는 인력을 공개해서 인원 확충 규모를 키운 것이었다.
정식 법인 설립은 이제 진행된 셈이다.
최민혁 생각은 달랐다.
“당장 모건 스탠리와 샐로먼 브러더스 동선을 파악하려면 추가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방식으로 곤란합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우수한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이 걱정하는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믿을 만한 친구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능력만 좋다고 덮어놓고 막 뽑을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 김 과장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전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도 아는 인맥이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준 과장은 움찔 놀랐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인맥까지 아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인생 1회 차 때 김명준 과장과 아는 지인을 꽤 만났다. 세계를 떠돌 때 그런 점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번 기회에 기회를 주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기대 이상이야.’
무리한 지시에 김명준 과장은 꽤 능력을 발휘했다.
따지고 보면 모건 스탠리, 샐로먼 브러더스, 테일러 박사 동선을 조사한 것도 그들 인력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벨린 시큐리티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한 후에 자세한 것까지 묻지는 않은 채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일단 정보 인력까지는 어느 정도 되었네요. 이제 하던 이야기 계속하죠. 시즈벨 내부 이사회에서 말이 나온다라…….”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표정이 이상해서 조사를 시키기는 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욕심을 내기는 한다는 소리네. 그렇지. 사람이라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시즈벨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겠지. 그래도 계약은 충실히 이행하려고 해서 다행이야.’
만약 시즈벨이 계약까지 무시한 채 일을 진행했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었다.
그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아직 외부에 정보가 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부분은 좀 이상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지금까지 일을 잘 풀어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될 수는 없었다.
뭔가 동기가 있어야 했다.
조성돈 팀장이 한 가지를 추론했다.
“지금까지 시즈벨을 조사한 결과로는, 그들이 보는 특허 비전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MP3입니다. MP3 원천특허는 알다시피 최민혁 실장님이 다 매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무선랜입니다.”
최민혁도 처음에는 뜬금없는 ‘무선랜’ 이야기에 의아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다. MPEG-2 특허는 계약 문제가 있지만, 무선랜은 좀 달랐다. 더욱이 자신이 고안한 무선랜과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면 딱히 시즈벨을 배신자라고 탓할 일은 아니었다.
‘가만, 무선랜 특허 가치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는 자연스럽게 전생에서 칼텍이 특허 소송을 건 영역 중의 하나가 무선랜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특허 소송 규모는 무려 10억 달러였다. 일심에서 결국 에플과 브로드 컴이 그대로 10억 달러를 두들겨 맞았다.
‘아, 시즈벨이 무선랜 특허 가치를 안다는 말일까? 그래서 무선랜 쪽에 집중하려는 건가?’
칼텍이 건 소송 당사자는 에플과 브로드컴이었다.
그들이 소송을 건 것은 암호 회로를 이용해서 데이터 전송 비율과 품질을 올려주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특허는 아직 최민혁조차 출원하지 않은 특허였다.
‘IP 시티폰에 굳이 이런 기술을 접목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 특허는 노트북, 웹패드에서 데이터 전송 효율을 울리는 방식이다.
미래에는 와이파이 표준으로 널리 활용되는 기술이었다.
최민혁은 의아한 눈으로 보고서를 꼼꼼히 살피다가 전송 효율과 관련된 특허 항목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아는 그 특허와 유사했다. 다만 디테일 부분에서는 차이가 제법 있었다. 이 특허를 몇 단계만 더 끌어올리면 미래의 그 특허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 이게 뭐죠?”
“주로 전송계층 고속화 쪽과 관련된 특허입니다. 시즈벨이 사들여서 특허출원을 했습니다.”
특허를 매각한 쪽은 놀랍게도 칼텍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는 10년 후에 칼텍에서 특허를 출원하고, 이들이 직접 에플과 브로드컴을 고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10년이나 앞당겨서 특허가 나온 셈이었다.
‘물론 똑같지는 않아. 이 특허를 가지고 소송해 봐야 전생처럼 일심에서도 이기지 못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특허가 좀 더 구체화한다면 상황이 다르다.
시즈벨이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충분히 욕심을 낼 만한 기술이었다.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암호화를 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효율이 나와 있는 자료대로라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름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가만, 전생에 이런 특허가 나왔나?’
최민혁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서야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번 일이 IP 시티폰에 무선랜을 접목한 나비효과라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이거 심각한데요.”
이 정도 수준의 특허라면 시즈벨이 욕심을 낼 만한 동기로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여기에 MPEG-2 특허라면 도전을 해볼 만해. 언제까지 날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조성돈 팀장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즈벨이 최민혁 실장님의 특허를 관리해 주면서 기반 기술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원천특허를 확보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딱히 계약 위반은 아니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기술이 아니라 연관된 다른 특허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최민혁 실장이 한 노력 덕분에 시즈벨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셈이었다.
최민혁은 한 가지 특이점을 더 찾았다. 그는 자기 말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조성돈 팀장의 안색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시즈벨의 행보가 우리 쪽 행보와 같이 진행되는군요. 시기상으로 봐서는 단순히 운으로 보기 힘들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해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시즈벨 쪽을 더 파봐야 할 것 같네요. 으음, 조 팀장님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은 알지만 시즈벨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네요. 전 뒤통수를 맞고 싶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순순히 수긍했다. 그 역시 지금 산적한 일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즈벨의 특이 현상을 찾은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도청을 해도 좋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설사 주 경찰에 걸린다고 해도 제가 돈으로 어떻게 처리를 할 테니까.”
“…네.”
조성돈 팀장은 힐끗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김명준 과장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린 최민혁 실장이 의사 결정을 바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어, 난데, 시즈벨 쪽에 진행하기로 한 일을 바로 진행해. 문제가 생기면 이쪽에서 다 책임질 테니까. 나머지는 걱정 마. 그래.]
* * *
벨린 시큐리티가 겉으로 봐서는 합법적인 회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벨린 시큐리티 직원은 대다수가 정보기관에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도청기 정도는 늘 사용하는 도구인 셈이다.
미국 정부 기관을 도청하는 것은 예민한 문제이지만 시즈벨 내부를 살피는 일은 그렇게 난도가 있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이 비용을 아끼지 않는 터라 첨단 도청 장비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니 미국 시즈벨 지사 임직원을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시즈벨 내부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가 보안 때문에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크게 싸우고 말았다.
두 사람이 싸운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생각과는 달리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원천특허에 욕심을 낸 것이었다.
[가브리엘 이사님, 미쳤습니까?!]
[제이미 이사,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다시 들어봐. 내가 불법적인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잖아. 이건 계약과는 무관한 일이야!]
[아무리 그래도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정보입니다. 그걸 최민혁 실장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다루는 것은 신의 성실에 어긋납니다!]
[아니, MPEG-2 원천특허가 아니잖아. 지금 하는 이야기는 무선랜이야!]
[물론 그건 압니다. 그런데 무선랜 때문에 지금 MPEG-2 원천특허에도 욕심을 낸 것 아닙니까. 정말 실망입니다!]
[아, 정말 사람 말을 끝까지 들으라니까. 난 계약을 위배한 적이 없어!]
[설사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신뢰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계약을 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잔머리 굴리는 회사를 누가 믿겠습니까?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야, 제이미 이사, 아니라고 했잫아!]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한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모토롤라와 중재한 과정에서 알게 된 K투스의 가치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거리통신망이 다른 기술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선랜 기술이 대표적이었다.
애초에 시즈벨은 무선랜 원천기술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그런데 IP 시티폰에서 먼저 적용되면서 반쯤 포기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막상 K투스 이후에 무선랜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가능성을 찾게 됐다.
여기에 MPEG-2 원천특허 매입 건수가 더해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었다.
시즈벨 이사회에서는 이 정보를 얻고 나서는 난리를 피웠다.
그들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행동에 경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뢰를 중요시하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추가로 조사해 온 시즈벨이 최근 출원한 무선랜 특허를 살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시즈벨이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몰랐다.
‘계약 위반은 아냐. 하지만…….’
시즈벨의 꼼수는 결코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암호 회로를 활용한 데이터 전송 비율을 올려 주는 특허는 말이다.
아직은 부족하다고 해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벌써 추가된 특허는 모범 답안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특히 채널을 사용한 부분 말이다. 이 부분과 관련된 연구는 외주를 줬는데, 여러 가지 통계 삽질을 통해서 근접한 답안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다만 이론적으로 명확한 답이 없었고, 실제로 구현된 답도 틀렸다.
CODE 부분과 DECODE 부분이 따로 처리되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최민혁은 내심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답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느긋한 것뿐이다.
‘무선랜에 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으니, MPEG-2 특허 역시 이전과는 다르게 접근했구나.’
실제로 가브리엘 아담스는 다른 인력을 동원해서 MPEG-2 특허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주로 대운 전자를 비롯한 12~15개 안팎을 가진 기업이 그 대상이었다.
이 특허는 핵심 특허와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 입장에서는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말에 따르면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가 이런 식으로 일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일까?’
답은 의외로 김명준 과장이 보여주었다. 그가 사진 한 장을 내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건 스탠리를 얕잡아 본 것 같습니다.”
사진 안에는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와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만나서 보고서를 보면서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그 보고서 내용 일부분도 사진에 흐릿하게 나와는 있었다.
바로 무선랜의 전송 효율, 그리고 저전력 웨이크업 기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