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
최영란 본부장은 입을 딱 벌린 채 자료만 바라보는 김희수 연구소장을 보자 혀를 찼다. 그녀도 김희수 연구소장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놀랍네요. 전 단순히 조금 앞선 기술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자료를 잘만 활용하면 6개월 안에 소형 CCD 카메라 모듈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상 이미지를 압축해서 따로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의미가 있는 건가요?”
“다, 당연합니다. 영상 이미지 데이터는 너무 커서 모바일 기기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어요. 하지만 이 기술을 이용하면 그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영상 압축만이 아니었다.
영상 이미지 처리와 관련된 기술은 그조차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기존의 AD 설계가 추구하는 비메모리 기술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틈새시장으로 말이다.
이런 부분은 KM 그룹이 추구하는 시장 방향과도 맞았다.
다만 워낙에 응용 분야가 넓어서 마냥 또 그렇게 볼 수만은 없었다.
KM 그룹 처지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오성 전자 이야기가 나오자 상황은 또 달라졌다.
“맙소사, 오전 전자 가전과 엮을 수만 있다면 수백억, 아니, 수천억 이상 매출을 기본적으로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흠.”
그녀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깨닫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 기술이 어떻게 보면 KM 그룹 계열사 하나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민혁이 얘는 정말 불가사의하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기술을 나에게 넘기려는 것일까?’
* * *
최민혁은 다시 걸려온 최영란 본부장의 전화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기술의 의미를 알겠어?]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다만 오성 전자에서 탐을 낸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부분만 파도 돈이 된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어.]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데 굳이 이런 기술을 나에게 넘길 이유가 있어? 직접 해도 되잖아?]
[아, 내가 시간이 안 나. 더욱이 그런 제조 기술에 굳이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아. 그건 누나가 맡아서 하는 게 맞을 거야. 이미 AD 설계라는 벤처회사까지 창업했잖아. 그 연장선으로 보면 되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
[아, 물론 공짜는 아니야. 로열티는 다 받을 테니까.]
[…그래.]
그녀도 로열티란 말에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KM 전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그랬다. 이 회사가 받는 로열티 수익은 이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 모바일 카메라 기술 정도는 덤이었다.
‘아, 덤으로 보기에는 좀 그런가.’
하지만 그녀도 최민혁으로서는 이 정도 기술쯤은 외주를 줘도 부담이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스케일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최민혁은 굳이 이런 사소한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할아버지, 아니, 우리 회장님에게 인정받는 거야. 그럼 내가 KM 그룹 내에 영향력을 더 키울 수가 있잖아.]
[내가 너의 손발이 되고?]
[싫어?]
[아니, 싫다는 것은 아냐. 다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를 모르겠어.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잖아.]
[우린 가족이잖아. 그러니 그렇게 너무 계산적으로만 생각 마.]
[…그래. 그렇다면 알았어. 이 기술을 사장단 회의를 통해서 공개해서 투자를 진행하면 된다는 거지?]
[그래.]
[그렇게 해볼게.]
최민혁은 최영란 본부장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보다는 그가 원한 계획대로 잘 풀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모바일 핸드폰 기술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궁금했다.
‘이번은 대미지가 꽤 아플 거야. 지금까지 쌓인 것을 고려할 때, 크리티컬 대미지가 갈 테니 말이야.’
* * *
최문경 부회장은 미래 기술과 관련된 일 때문에 솔직히 뭘 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는 건설 업체 연쇄 부도도 주춤하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민혁이 이놈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는 결코 무리수를 둘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최용욱 회장 그다음으로 KM 그룹 지분이 많으니 말이다.
최용욱 회장이 비록 최영란 본부장과 최민혁 실장에게 지분을 일부 넘겨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분에 불과했다.
경영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안 좋은 일도 있다.
KM 그룹 본사를 오갈 때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좋지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이라면 자신이 걸어가면 다들 겁먹고 피하기 급급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불만도 말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이제 한물간 것 같지 않아?]
[에이, 그래도 KM 산업, 건설을 비롯한 핵심 계열사 지분은 여전히 가지고 있잖아.]
[지분이 있으면 뭐 해. 최문경 부회장 측근은 다 갈려 나갔잖아.]
사실이었다.
KM 그룹은 10개 계열사로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갈려 나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물러난 사장이나 임원 대부분이 최문경 부회장 측근이라는 거다.
황당한 것은 이 과정에서 오히려 최동영 상무 라인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최영란 본부장에게 줄타기하는 이들도 급증했다.
[가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 정말 KM 그룹 승계받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아. KM 전자 쪽은 이미 오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쪽은 KM 산업에 지분이 있는 것이 다잖아?]
[그게 좀 신기하기는 해. 최민혁 실장님이라면 이번 기회에 KM 그룹 지분을 늘릴 수 있었잖아. 최용욱 회장님도 이미 최민혁 실장님을 인정했고.]
[어쩌면 최문경 부회장이 자신을 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설마 최민혁 실장님이 최문경 부회장을 두려워한다는 거야? 에이, 그건 말이 안 된다. 최민혁 실장님이 왜 최문경 부회장을 걱정해? 이젠 다이다이로 싸워도 밀릴 것 같지는 않은데?]
[에플 대주주인 것과 KM 그룹 경영 승계는 좀 다르잖아. 돈이 많다고 해서 KM 그룹 지분을 다 사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가?]
은근히 비꼬는 이야기.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단순히 KM 그룹 임직원 사이에서만 도는 게 아니었다.
KM 그룹 주주 사이에서도 최문경 부회장을 불신하는 이야기가 점점 퍼졌다.
KM 그룹 주주들 역시 최문경 부회장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이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점점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최문경 부회장도 간과할 수만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작년에는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분노하기보다는 혀를 찼다. 그는 생각보다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다.
단순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을 찍어 누를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때문에 오늘 있을 사장단 회의를 앞둔 채 시름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휴우.’
* * *
오늘 사장단 회의도 작년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아니, 지난달과도 너무 달랐다.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경영진 중에 자신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고작 30% 남짓.
나머지는 최동영 상무나 최영란 본부장의 눈치를 더 봤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 역시 오히려 최영란 본부장을 더 따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따라서 이 새로운 CCD 카메라 모듈은 6개월 안에 시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오성 전자 역시 이 기술에 꽤 관심을 보인 상황입니다. 이미 계열사를 통해서 개발도 진행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오성 계열사 내에서 관련 기술을 개발한다는 정보는 최영란 본부장 역시 관련 CCD 산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얻었다.
그녀도 최민혁 실장에게 새삼 감탄했다.
물론 최민혁도 사실 그런 상황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성 그룹이 이 기술에 얼마나 투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성 그룹이 관심을 뒀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장단 회의의 분위기는 바로 바뀌었다.
최용욱 회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영란 본부장은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아직 핸드폰에 적용할 수준은 아닙니다.]
핸드폰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오성 전자에 납품을 통해서 시장을 선도한 이후에 핸드폰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면 되니 말이다.
이젠 최용욱 회장조차 흥분했다.
[최 본부장, 그 핸드폰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 봐.]
[네, 이 기술은 핸드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장 규모를 볼 때…….]
핸드폰 시장과 매출 현황이 나오자 이 기술을 모르는 사장단조차 탐욕을 보였다.
이 기술을 응용할 분야는 많았다. 특히 KM 건설 쪽 임원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건설 내에도 이 기술을 당장 써먹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건설사들에 비해서 기술 우위를 보일 수가 있었다.
최영란 본부장은 뜨거운 계열사 사장단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올 3분기에 일단 핸드폰과의 결합에 최대한 도전을 해볼 생각입니다.]
[…….]
다만 최영란 본부장 이야기에 입을 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초소형 카메라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그런 기술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었다.
최영란 본부장 역시 말을 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결국 최문경 부회장이 이대로 불구경만 할 수가 없어서 나섰다.
[지금 기술로 초소형 카메라 모듈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걸 핸드폰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게 현실적인 이야깁니까?!]
사실 최문경 부회장의 지적은 타당했다.
CCD 카메라 센스 모듈 양산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 생각은 좀 달랐다.
[최 부회장은 그러면 조금만 어려워도 도전조차 해보지 않을 생각인가?]
[네?]
[핸드폰 시장이 커지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 따라서 핸드폰 카메라 쓰임새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런데 이 시장을 구경만 하겠다는 말이잖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질문한 의도가 뭐냐. 무조건 안 된다고 해서 이 기술을 덮자는 거야? 최영란 본부장 하는 일이 배가 아파서 그래?!]
[회, 회장님, 그런 뜻으로…….]
[아니,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다가 나선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래. 그런 의도가 아니면 그냥 입 처 다물고 있어야지!]
최용욱 회장의 날카로운 질책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당황해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그래도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제, 제가 하려는 말은 당장 카메라 대용량 이미지를 처리하는 것부터가…….]
보다 못한 임원진 한 명이 나섰다.
[그건 영상 압축 코덱을 이용하면 된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굳이 최영란 본부장이 지적할 필요가 없었다.
밑에 실무진이 발표 자료를 넘겨서 영상 압축과 관련된 부분을 보여주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황당해서 방금 입을 연 경영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최문경 부회장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영란 본부장 우측에 놓인 소형 CCD 카메라 테스트 모듈 때문이다.
그 모듈은 아주 잘 동작했다.
심지어 카메라 이미지 저장까지 말이다.
그 용량과 화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깔끔하게 잘 동작하는 카메라 모듈을 쳐다보았다.
그는 갑툭튀로 등장한 저 모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최용욱 회장도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을 타박할 수만은 없었다. 그도 가끔 관련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건 그녀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최영란 본부장은 그때마다 슬쩍 자신 앞에 놓인 테스트 모듈을 계속 동작시킬 뿐이었다.
실제로 동작하는 모듈이 눈앞에 있다.
심지어 설계도마저 말이다.
저걸 기반으로 해서 상업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핸드폰과 결합해서 잘될 거냐 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 미묘한 점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