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89화 (689/1,021)

#689.

그는 대안으로 SISA 내의 여유 인력을 동원해서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 와서 한 연구 실적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당장 인터넷 검색용 프로그램이 필요했는데, 구골 검색 엔진이 괜찮아 보였다.

어차피 당장 최민혁 실장을 만나기는 힘들기에 구골에 연락해서 미팅을 했다.

물론 구골 측 반응은 관심이 없다 정도였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이 안건에 대해서 따로 지시한 대로 대답한 것이다.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안재운 전무는 자존심이 상해서 MS와 공동으로 개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MS와는 계속 소통 중이었는데, 관련 기술 협상 역시 무난하게 진행 중이었다.

구골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오성 측에 관심이 없습니다!]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건 두 회사에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입니다.]

[그건 오성 그룹 생각이고,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혹시 최민혁 실장이 따로 지시한 겁니까?]

[아뇨. 최민혁 실장이 대주주이기는 하지만 경영 자체에 간섭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우리 두 사람이 결정한 일입니다. 그쪽 오성은 돈만 투자하고 날로 먹으려는 성향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는 그쪽하고 같이 사업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대답입니까? 우리가 구골 측에 무슨 일을 했다고 그런 대답을 하는 겁니까?]

[한국의 다른 기업을 상대할 때 당신들이 한 행적을 살펴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네 오성은 툭하면 협력업체의 기술을 빼돌리거나 하는 수작을 부렸더군요. 우리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합니까?]

[…….]

안재운 전무는 황당해서 대꾸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들이 오성 그룹이 국내에서 과거 한 일까지 살펴봤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느낀 소감은 이들의 답변이 꼭 최민혁 실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고 확신하자 분노를 쉽게 참을 수가 없었다.

* * *

다행인 것은 권태성 기획실장이 구골 사무실을 나서면서 안재운 전무를 잘 다독거렸다.

“지금 상황은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것이 큽니다. 안재운 전무님을 자극해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일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콜린스 사업부 인수 협상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이 일을 질질 끌었는데, 그때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KM 전자 매출에서 콜린스 사업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주를 이해시키기 어려웠을 테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미래 기술, 구골, KMBOOK과 같은 전혀 다른 방향의 사업을 일구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골 법인 설립 부분은 KM 전자 주주들도 깊게 관심을 뒀다.

그들은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제조 쪽을 줄이고, 구골과 같은 IT 기술에 집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는 에플, ARN과 같은 다른 계열사를 빼놓기 어렵다.

이런 계열사와 KM 전자를 놓고 비교해 보면 콜린스 사업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KM 전자가 체질 개선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콜린스 사업부 매각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제는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해도 KM 전자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터였다.

안재운 전무는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아니, 그러면 이제까지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하겠다고 계속 언질을 줬던 건 뭡니까? 우리 오성 전자를 희롱했다는 말입니까?!”

안재운 전무는 평소와는 달리 마치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날뛰었다. 그의 안색은 홍역을 앓는 사람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차분하게 설명했다.

“콜린스 사업부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에플에서 진행하는 차세대 제품하고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 모든 일이 정리되어야 어느 정도 콜린스 사업부 가치가 제대로 나옵니다. 최민혁 실장은 그때를 매각 타이밍으로 봤을 겁니다. 따라서 구골과의 협상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획에 계속 안재운 전무님을 자극하는 겁니다.”

“…결국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은 다 쇼였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뭐, 그걸 나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콜린스 사업부 덩치가 워낙에 크니까. 다만 이 일에 앞서서 최민혁 실장도 주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캐시카우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이번에 미국에 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더욱이 앞으로의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안 전무님이 이성을 유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 계속 안 전무님을 자극하는 겁니다.”

“…….”

안재운 전무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협상에 앞서서 자신을 길들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도의 술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분노하고 있어도 막상 최민혁 실장을 만나면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거래 규모가 큰 협상을 앞두고 감정을 폭발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심호흡을 거듭한 끝에서야 겨우 이성을 차렸다.

“다 좋습니다. 뭐,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하죠. 최민혁 실장이 꼼수를 부렸다고 하죠. 하지만 설마 이렇게 눈치를 보기만 할 겁니까? 지금 이상한 소문도 돌아요. 최민혁 실장이 인공지능 기술을 상업화까지 한다는 이야기마저 있어요!”

정확히는 실리콘 밸리 출신 SISA 연구원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였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혀를 찼다. 그는 이미 이 정보의 출처가 누구인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정보에 대해선 KM 그룹의 권재홍 비서실장이 일부러 정보를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게 사실…….”

권태성 실장은 솔직히 머뭇거렸다. 이번 일은 의도가 다분했다. 굳이 자신에게 정보를 흘리는 이유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를 더 조사했고, 어느 정도 정황마저 다 파악했다.

하지만 안재운 전무는 상황이 좀 달랐다. 그는 이마저도 최민혁 실장의 술수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감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말 좀 해보세요! 저 답답해서 미치겠습니다!”

“크로스체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KM 그룹은 미국에 따로 조직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KM 그룹으로선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알기 어렵습니다.”

“설마 우리를 이용해서 이번 인공지능 관련 내막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말입니까?”

“네.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70~80년부터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90년대 역시 막대한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써먹을 만한 결과가 나온 경우는 없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미 인공지능과 관련된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미국 국방성이 이 인공지능 기술에 막대한 투자까지 했다는 정보도 얻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KM 그룹 측에서 따로 원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 측에 정보를 흘렸다는 말입니까?”

“네.”

“그게 대체 뭐죠?”

“우리를 이용해서 최민혁 실장 내부 정보를 파악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재운 전무는 기가 차서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설마 KM 그룹에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최민혁 실장도 그렇지만 최문경 부회장의 꼼수도 상상을 초월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안재운 전무를 마치 호구처럼 이용하려 들었던 셈이니.

황당한 사실은 안재운 전무가 그 내막을 이제야 알았다는 거다.

그의 자존심이 와르르 박살이 났다.

‘이 개새끼들이!’

더 화가 나는 것은 권태성 기획실장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마 그들의 의도에 그대로 놀아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권태성 기획실장의 모습에 다시 감정을 추슬렀다.

여기서 화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는 곰곰이 머리를 굴린 끝에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근원에 생각이 닿았다.

“가만, 그런데 정말 인공지능 상업화가 가능한 겁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안재운 전무가 이제 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안재운 전무의 모습은 너무도 멍청했다.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안재운 전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일단 지금의 감정을 참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의 얼굴을 보자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가만, 그러면 이걸 그냥 두고만 보자는 겁니까? 아버지가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최민혁 실장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습니다.”

“네?”

권태성 기획실장은 가만히 커피를 홀짝이면서 10분 정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안재운 전무가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솔직히 미국에 와서 최민혁 실장을 쫓아다니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 상황이 계속되면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거야…….”

안재운 전무는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 실장 때문에 맛이 가서 최민혁 실장 타령만 일삼았다. 결국 그동안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을 안건민 회장에게 보고해 봐야 욕만 들은 것이 뻔했다.

“하, 돌겠네요.”

그는 이젠 최민혁 실장을 욕하는 것도 잊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겨우 정신을 좀 차린 안재운 전무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참 힘드네. 안 전무가 없는 것이 오히려 도움되지만 회장님 뜻을 거역할 수도 없고, 이제야 겨우 일을 시작할 수 있으려나.’

인공지능 쪽은 잘 모르는 분야였다. 이미 사전에 지시를 내려놓았지만,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이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IBM 쪽에 5년간 1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니, 여유가 있습니다.”

그랬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굳이 최민혁 실장을 쫓아다니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많이 당해봐서다. 그는 때문에 영양가 없는 최민혁 실장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이미 IBM 측과 올 연초부터 협상을 끌어온 대규모 반도체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덕분에 다른 미국 메이저 회사 역시 반도체 공급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이게 그가 미국에 와서 마무리한 일이었다.

안재운 전무 역시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니, 그는 대놓고 환호했다.

“맙소사 그, 그게 정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노림수가 명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니다 싶을 때는 그냥 물러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실적은 안 전무님이 주도한 것이 될 겁니다!”

안재운 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권태성 기획실장의 양손을 잡았다. 그는 감동으로 눈물마저 글썽이면서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안재운 전무는 쾌재를 불렀다. 이번 실적이 자신의 실적이 된다니.

그는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한 분노를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그런 감정은 앞으로의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한 짓을 봐서는 협상 도중에 무시무시한 꼼수를 사용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면 앞으로도 최근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을 언급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인가요?”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단호했다.

“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IBM과 한 계약 내용 중에 비밀 유지 조항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최민혁 실장에 대한 감정을 떨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조사보다는 직접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 확인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때도 딱 필요한 협상에만 집중해야지, 다른 일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민혁 실장과 연락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한번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누구 탓도 하지 않았다.

설사 최민혁 실장이 황당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 태도는 다른 임직원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가 없는 태도였다.

“하.”

다만 안재운 전무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권태성 실장이 왜 저렇게 최민혁 실장에게 저자세인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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