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
이번 노이즈캔슬링 관련 원천기술은 굳이 자신이 다 독점할 생각은 없었다.
전부 독점한다는 것 자체가 어차피 불가능하고 말이다.
보스와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일단 혹시나 싶어서 미팅을 요청해 봤다.
[최민혁 실장님을 뵙고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희 역시 최민혁 실장님의 놀라운 안목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이번 협상안과 관련해서 나올 이야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쪽과 같이 협업하는 것은 귀사에 이익일 텐데요?]
[물론 협업은 환영합니다. 다만 로열티 부분 협상은 어려울 겁니다. 물론 최민혁 실장님이 로열티를 제대로 낸다면, 장애는 없을 겁니다.]
[우리 쪽에서 소송을 걸어도 그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네?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보스사는 이미 20년 전부터 노이즈캔슬링 관련 원천기술을 연구해왔고, 그것은 지금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소송을 건다니,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보스는 실제로 노이즈캔슬링 제품으로 일약 오디오계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이 기술을 비교 우위 삼아서 다른 경쟁업체들을 압도했다.
대안이 없는 다른 오디오 업계로서는 보스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미래에는 자기네 원천기술을 이용해서 수천억 단위의 소송을 걸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이에 대한 대안으로 방어 특허를 마련한 최민혁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는 솔직히 보스와 싸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이익을 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걸 장담할 수 있습니까? 기술이 발전하면, 새로운 관련 원천특허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 분야 쪽은 아직 연구 중일 텐데요?]
싸늘한 목소리.
보스 측 실무진은 냉정하게 반응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보스 측 실무진은 이번 최민혁 실장의 전화로 자신들의 기술 가치에 확신을 했다. 그들은 결코 최민혁 실장의 압박에 수긍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씀을 하셔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보스사는 모든 회사에 균등한 기회를 줄 뿐입니다.]
[…….]
역시나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보스 측이 최민혁 실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의 안목을 존중한다.
그래서 최민혁 자신을 이용해서 한몫 단단히 뽑아 먹을 생각이었다.
‘결국 원론적으로 타협이 필요하다면, 협박을 좀 해야 할 텐데…….’
내부적인 일 진행은 굳이 자신이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스티븐이 있으니 말이다.
스티븐 측에 이번 일에 대한 견해를 전했더니 역시나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보스 측을 압박할 수단은 확실히 마련되는 겁니까?]
[물론이죠!]
[보스 측과 이야기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늦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것 역시 아이컴 홍보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내심 스티븐의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보스와의 협상 역시 아이컴에는 호재가 된다. 관련 기술이 보스 원천기술과 경쟁 관계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언론에서 좋아할 소재니까.’
* * *
최민혁도 보스를 압박하기 위한 부분은 고민해야 했다. 그는 검토를 거듭하다가 문득 자신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지수 박사를 좀 불러주세요.]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호출에 불과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났다. 헬렌을 강아지처럼 옆에 거느리고 말이다.
두 사람은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KMBOOK 임직원은 멍하니 두 사람의 뒤태를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 비이상적인 외모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 연구 팀만은 예외다. 그들은 늘 경험하는 일이라서 그냥 그런가 싶었다.
헬렌은 여전히 최민혁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미 감으로 최민혁 실장의 마음을 일부 느낀 것 같았다.
최민혁은 헬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지수 박사에게 자신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를 슬쩍 이야기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자랑 뉘앙스로 노이즈캔슬링 기술을 하나하나 말했다.
헬렌이 바로 태클을 걸었다.
“굳이 이런 일로 최 실장님이 말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최 실장님은 경영자이지,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경영자로서 한길을 파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헬렌은 아예 작정한 채 최민혁 실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어서 헬렌을 힐끗 째려보았다.
“저도 노이즈캔슬링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연구소를 통해서 받은 자료를 가지고 몇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봤는데…….”
이지수 박사는 헬렌이 끼어들려고 하자 슬쩍 그녀 앞을 막았다.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넵!”
그는 기꺼이 이지수 박사에게 자기 아이디어 목록을 넘겼다.
사실 인생 1회 차에서 이지수 박사에게 세뇌에 가깝도록 배운 내용 중에 일부다.
그러다 자랑삼아서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남녀가 썸 타는 이야기 말이다.
이 부분은 영양가가 없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는 썰렁한 최민혁의 농담을 잘도 받아주었다.
최민혁은 신바람이 났다. 그는 이런 이지수 박사의 스타일이 너무 좋았다.
인생 1회 차에서도 이랬다.
망나니 재벌 3세 최민혁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도 이지수는 저랬다.
최민혁으로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헬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두 남녀가 하는 기술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다.
최민혁은 헬렌의 반응을 오히려 즐겼다. 그는 딱히 재미없는 내용도 신바람 나게 말했다.
하지만 헬렌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그런 헬렌의 반응에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는 그나마 일로 접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관계에도 이지수 박사는 최민혁 실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진심으로 말이다.
“호.”
최민혁 실장도 설마설마했는데, 곧 놀라운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이지수 박사는 노이즈캔슬링과 관련된 이론을 최민혁 실장의 아이디어 목록을 보면서 거꾸로 하나씩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예 회의실 한쪽에 놓인 화이트보드를 가져와서는 노이즈캔슬링에서 빠진 기술을 하나씩 메꿔 나갔다.
부족한 부분은 못마땅한 얼굴을 한 헬렌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헬렌도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을 배제한 채 이지수 박사 말에만 집중하고, 호응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장군, 멍군을 부르면서 빈칸을 조금씩 채워 나갔다.
최민혁은 그나마 머리를 쥐어짜서 기억나는 부분을 말했다.
“…비대칭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아, 그건 칩 설계 단계에서 메꾸는 것이 좋지만 당장은 소프트웨어를 적용하면 됩니다.”
하드웨어 논리는 아예 따로 함수로 만들었다.
그녀는 작업하면서도 힐끗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아이디어로만 보기에는 앞뒤가 너무 딱딱 맞았다.
이지수 박사는 힐끗 헬렌을 쳐다보았다.
헬렌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도 이게 꽤 그럴듯한 이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이즈캔슬링 분야를 잘 몰라도 전개 자체를 이해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이 정도 알고리즘은 이미 학부 수준에서 수십 차례 본 적이 있고, 실제로 구현해 본 적도 있다.
다만 그걸 실제로 적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과거에 봤던 이론 일부를 가져와서 메꾸기만 하면 된다.
특히 인공지능 관련 기술을 연구하는 중에 실무적인 부분도 참조했다. 그 내용 중에 어지간한 부분은 다 관련이 있었다.
문제는 바로 이런 방식 자체가 독창적인 하나의 아이디어란 점이다.
그리고 특허를 출원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구성 요건도 갖춘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네.”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우연히 이론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히 부른 이론이 우연히 모여서 우연하게 특허를 형성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이 아무리 뛰어난 엔지니어라도 이렇게 딱딱 퍼즐을 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진행된바.
굳이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몰라서 만들어 둔 빈칸은 퍼즐을 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멈칫거리면 헬렌이 바로 옆에서 보조해 주었다.
그리고 연구원도 많았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 팀원 중에 노이즈캔슬링 전공자를 불렀다.
그렇게 되자 일의 진척은 더욱 빨라졌다.
도저히 특허로 출원하기 힘든 자료가 어느 정도 뼈대를 갖추었다.
이제는 바로 특허 출원해도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다.
다만 노이즈캔슬링을 제법 아는 연구원은 탄식하고 말았다.
“아, 이건 좀 문제가 될 것 같아요. 보스에서 이와 유사한 특허를 출원한 것으로 아니까.”
최민혁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건 신경을 쓰지 마세요. 일단 부족한 부분만 채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지수 박사는 어느 정도 작업이 끝나자 뒤로 잠깐 물러나서 나열한 화이트보드 여섯 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슬쩍 팔짱을 낀 채 흥분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꽤 즐거운 것 같았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와 유사한 일을 몇 번이나 경험한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과 말이다.
이지수 박사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마치 귀신에게 홀려서 일을 한 것 같았다.
근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정말 알 수 없는 분이네.’
하지만 그녀도 최민혁 실장이 정말 믿기 어려운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물론 그녀의 이런 상념과는 별개로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최민혁 실장은 결코 그들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이거지, 이거야!’
* * *
이지수 박사가 손을 쓴 덕분인지 노이즈캔슬링 관련 특허는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졌다.
그다음 일은 늘 반복되는 일이었다.
KM 전자 특허 팀을 총동원하고, 미국 내에 있는 변호사를 같이 투입했다.
노이즈캔슬링 기술 특허출원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술 완성과 동시에 일단 출원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솔직히 국내 특허 팀은 이 기술이 과연 제대로 특허로 등록될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의 빨리빨리 정신은 알겠지만, 굳이 일을 이렇게 해야 합니까?”
“최 실장님이 직접 지시한 일이니,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하,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 뜬금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출원과 동시에 스티븐을 만나서 이 기술이 적용 가능한지 확인부터 했다.
결과는 'OK'였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이들은 이미 아이컴을 가지고 음성 인식 관련 테스트를 이미 진행한 상태였다. 다만 그 일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너무 허접한 성능 때문이다.
스티븐이 따로 연구 팀을 만들어서 진행하기는 했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았다.
당장 인공지능 자체를 어떻게 구현할지에서부터 막혔으니까.
그러니 밑의 하부 단계인 하드웨어 쪽은 아예 검토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노이즈캔슬링 방식은 꽤 그럴듯했다.
소프트웨어적인 비중이 커서 성능도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안 스티븐은 성공만 한다면 최상의 보상을 주겠노라 약속하고선 그 대신 불필요한 인원도 마구잡이로 잘라내겠다고 협박했다.
이 덕분에 2개의 마이크 시스템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2 마이크 시스템과 연동된 처리 칩도 간단히 바꾸면 된다.
단지 가격이 좀 더 올라갈 뿐이다.
최민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이번 일을 너무 서둘러 진행한 탓에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까지 직접 만드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일단 이 방식으로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