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59화 (659/1,021)

#659.

메신저의 역사는 80년대 BBS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이 BBS 시스템에 접속해서 사용자끼리 대화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게 시초다.

그런데 개인 컴퓨터 보급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보급이 점점 빨라졌다.

이 과정에서 메시징 시스템이 나왔다.

다만 아직은 제대로 된 메시징 시스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민혁이 지금 준비 중인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는 모바일 메신저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헬렌은 강준석 팀장에게서 이 메신저 서비스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요즘 스탠포드 대학 내에서 뜨거운 구골 이야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적당히 알아듣게 거절하기는 했다.

이지수 박사와 같이 연구하는 인공지능 분야는 이 검색엔진과도 접목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이미 자신이 하는 연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이 연구를 반드시 끝낼 생각에 빠져 있었다.

헬렌은 그런 이지수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떤 환경하에서 묵묵히 자기 꿈을 버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나 이지수 박사 두 사람은 굳이 돈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집안이 부유한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고안한 특허 로열티만으로도 한 해에 10~11억을 받기 때문이었다.

헬렌은 그래서 이지수에게 강준석 팀장이 한 제안을 간단히 언급했다.

“다만 내가 가서 한 번 이야기는 들어볼게.”

“알았어. 다만 헬렌은 너무 이 일에 집착하지 마. 그쪽의 제안이 좋다면 그쪽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 지금 하는 연구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래.”

실제로 지금 연구 중인 인공지능 분야는 결코 쉬운 영역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산적한 문제가 있다.

가장 큰 것은 역시 과시적인 결과를 쉽게 도출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지수 박사도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쪽저쪽 많은 영역을 건드렸다. 인공지능이 응용 가능한 분야는 다 살핀 것이었다.

그녀의 탁월한 능력에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사실 그녀 자신도 고민 중이었다. 차라리 기업에 취업하면, 혹시라도 길을 찾지 않을까 갈등 중이었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그녀 자신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같이 연구하는 동료도 고민해야 한다.

헬렌은 이런 이지수 박사가 아주 좋았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래서 이 행복을 결코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 좋아!’

* * *

헬렌은 워낙에 구골 때문에 소문이 자자한 강준석 팀장을 일단 스탠포드 내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조용히 만났다.

“헬렌입니다.”

“…네.”

간단한 인사.

그런데 반대편의 견해는 좀 달랐다.

그녀가 일반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강준석 팀장은 입을 딱 벌린 채 헬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위 말하는 푸른 벽안의 금발 미녀. 딱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주연 배우 모습이었다. 아니, 이것은 정말 과장이 아니었다.

쭉쭉 뻗어 있는 각선미나 몸매는 딱히 그의 취향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분위기였다.

지적인 미인의 정석, 바로 그 자체였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대학교 1학년 때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나가기도 했다.

그 한 장면만으로 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만 그녀는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오가는 남자라면 전부 한 번씩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이날도 그녀를 아는 이가 있었다.

[맙소사 헬렌이잖아.]

헬렌은 스탠포드 대학 내에서도 꽤 유명했다. 그녀와 같은 아름다운 미인이 박사 학위 1년 차라는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헬렌은 은근히 주변의 분위기가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외모가 아닌 자기 능력으로만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소문이 자자한 벨린 소프트의 강준석 팀장조차 평범한 남자들처럼 자신을 바라볼 줄은 몰랐다.

강준석 팀장은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야 자신이 사람을 앞에 두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용건이나 우선 말하죠.”

그는 곧바로 시계를 살폈다. 아직 약속 시각이 좀 남아 있었다.

“오실 분이 더 있습니다.”

“누가 더 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강준석 팀장은 이야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침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차량을 쳐다보았다.

* * *

차창 밖으로 보이는 차량에서 내린 이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과 그 수행원이었다. 동행한 이 중에는 뜻밖에도 장승일 실장도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갑자기 약속 장소 변경 이야기를 듣고는 급하게 캘리포니아주로 날아왔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장승일 실장의 표정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지수 박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는 이지수 박사가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추측했다. 지금쯤이면 잠시 인공지능 연구를 접고, 일을 시작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는 아직 그러지 않았다. 최민혁 자신이 바꾼 미래 때문인지 여전히 스탠포드 대학에서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최민혁도 뒤늦게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그는 때문에 평소보다 더 흥분했다. 그는 마치 첫 경험을 앞둔 남자처럼 호흡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익숙한 이.

“헤, 헬렌?!”

헬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본능에 따라 마주한 이가 자신의 외모 때문에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당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지?’

“어? 누구시길래 제 이름을 아세요?”

최민혁은 당황을 숨기기 위해서 바로 자기 이름을 댔다.

“아, 그, 최, 최민혁이라고 합니다.”

“맙소사! 최민혁이라면, 혹시 에플 대주주인 그 최민혁 실장 말이세요? 맞아, 그 얼굴, 진짜네요. 이거 정말 놀랍네요. 설마 그 대단한 분이 제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헬렌도 깜짝 놀랐다. 그녀가 최민혁 실장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에플 대주주이자 MP3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도 최민혁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헬렌은 마치 꿈속의 소녀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도 최민혁 실장을 존경했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최민혁 실장 같은 실적을 이룬 이는 당대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이 단순히 에플 대주주이기에 앞서서 최근 구골 설립으로 실리콘 밸리에서 이름을 알렸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기회만 되면 최민혁 실장이 하는 기조 연설회이든, 학술회든 얼마든지 참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보기와는 달리 쇼크에 빠졌다. 그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쓰리썸의 주인공인 헬렌을 보자 지난 일이 어제 일인 양 떠올랐다.

특히 2:1로 할 때의 그 야릇한 장면이 말이다.

뼈가 흐물흐물 녹는 경험은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젠장.’

아, 물론 헬렌이 몸을 막 굴리는 여자란 뜻은 결코 아니었다.

헬렌이 굳이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수작을 부린 것은 이지수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헬렌은 이지수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최민혁에게 당한 것을 보자 크게 분노했다.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수작을 부렸는데, 다른 지인 한 명을 끌어들여서 최민혁과 쓰리썸을 벌였다.

그 과정을 이지수가 보게 됐고 말이다.

정확히는 헬렌이 교묘하게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그 이후 일은 굳이 더 논할 여지가 없다.

당시 최민혁 실장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이지수는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변했으니까.

헬렌의 공작은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최민혁은 잊어버린 인생 1회 차 기억을 라이브로 떠올리면서 헬렌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 옆 가상공간에는 헬렌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마음의 준비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지수 씨가 같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조성돈 팀장이나 장승일 실장의 시선을 접하자 다급하게 이성을 차렸다.

“흠,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두 분에게 연락을 보낸 것 같은데…….”

헬렌은 최민혁 실장의 태도에 다소 실망했다.

“이 박사님은 지금 바빠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이야기해 주면, 제가 알아서 다 중재하겠습니다.”

“…흠.”

최민혁은 곧 혀를 찼다. 헬렌이 왜 저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이지수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인 것도 헬렌 때문이다.

‘철벽 방어지. 보기와는 달리 완전 스토커라니까.’

다만 다행인 점은 있었다.

인생 1회 차에서 보이던 헬렌의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계속 봤다.

그러자 다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심지어 늘 유령처럼 자리만 지키던 경호원 김명준 과장 역시 최민혁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그다음에 헬렌을 쳐다본 후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예쁘구나.’

그리고.

‘설마 서로 첫눈에 반한 건가?’

그도 내막은 잘 몰랐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반응 봐서는 헬렌을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는지는 잘 몰랐다.

‘어지간한 여자는 아예 쳐다도 안 보는 것이 이상했는데…….’

하지만 최소한 남자라면 헬렌에게서 시선을 떼기 힘들 터였다.

장승일 실장조차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헬렌을 쳐다보았다.

헬렌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했다. 그녀는 평소라면 반발하겠지만,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슬쩍 낮추고 말았다.

“설마 절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최민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비록 인생 1회 차의 기억은 자극적이었지만 그 자신은 전생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손을 벌렸다. 조성돈 팀장은 서류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냈다.

“아, 그 전에 이 서류부터 사인하셔야 합니다.”

비밀 유지 계약서였다.

헬렌 역시 과거 미국 국방성 산하 보안 프로젝트를 해봤기에 크게 의심하지 않고 서명을 했다. 그녀는 그다음에 곧 서류를 받아서 살폈다.

“메신저 서비스?”

정색한 헬렌.

역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분위기는 다시 달라졌다.

그녀가 최민혁 실장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최민혁도 인생 1회 차의 헬렌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자 본론에 집중했다.

“아마 ICQ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겁니다. 그것의 확장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흠.”

헬렌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녀도 자신이 그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이 자리에 온 것은 그만큼 자신을 진지하게 본다는 뜻이다.

물론 그가 설명한 메신저 서비스에 대한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다.

아직은 중요한 부분이 다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 서류에는 꽤 중요한 개념이 한 가지 들어가 있었다.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이건 뭐예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딱 중세 판타지 영화에나 나오는 청초한 엘프의 모습이었다.

최민혁은 헬렌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신기한 눈으로 잠깐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헬렌이었다.

‘…진심인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레즈비언인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가 아는 헬렌은 절대로 저렇게 수줍은 모습을 보일 이가 아니었다.

뭐, 어쨌든 이건 이것대로 좋다고 하자.

다만 그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잠깐 고민했다. 이지수 박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런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다.

‘헬렌을 믿을 수가 있나?’

헬렌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설마 절 못 믿으세요?”

처연한 표정에 최민혁도 혀를 찼다.

“…아닙니다.”

헬렌의 실력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비록 이지수 박사보다는 연차가 낮고, 실력이 좀 떨어진다고 해도(사실 한 단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무시할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인생 1회 차 기억을 쭉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헬렌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레즈비언이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의 연인은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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