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
조학주 연구소장이 말하는 기업 중에는 새방 전지 역시 포함된다.
다만 그도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 점을 인식한 것 같지는 않았다.
“…….”
김상우 본부장은 오버를 하면서 무심결에 새방 전지를 비난하는 조학주 연구소장을 째려봤다.
그가 시작하기는 했지만, 빙빙 돌려서 결국 한국 대기업은 나쁜 놈이라는 쪽으로 몰아가는 조학주 연구소장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조 소장님, 그 말은 좀 심하시네요.”
“앗,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그룹은 다른 대기업과는 달리 문어발식 확장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그런 말뜻이 아닙니다.”
“쯧.”
가끔 가다 툭툭 튀는 그의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은 이미 자기 아버지인 김의준 사장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때마침 이 일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라는 연락까지 받았다.
다만 협상 내용에 앞서서 KM 전자가 가진 배터리 특허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되는지 확인은 필요했다.
조학주 연구소장은 배터리 특허를 하나씩 예를 들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상우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네, 이 기술은 일반적인 특허와는 차이가 크게 납니다. 리튬이온배터리 기술에서 문제가 된 많은 부분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새방 전지의 기술력이면 얼마든지 바로 양산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연락했을 겁니다.”
그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조학주 연구소장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서 최민혁 실장을 만나 보죠.”
“네!”
* * *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내민 배터리 업체 리스트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보고안 자체는 꽤 합리적이었다.
일본 업체보다는 차라리 국내 업체와 손을 잡는 것이 훨씬 나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텃새라고 해야 할까?’
새방 그룹 계열사인 새방 전지는 꽤 괜찮은 회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회사가 갑자기 배터리 특허가 있다고 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 리는 없었다.
사실 이번 일본 배터리 업체의 반응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였다.
‘사전에 보험으로 염두에 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당장 해야 할지 고민이네.’
대안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폭발 위험성이 높은 리튬이온배터리와 함께 리튬 폴리머 배터리 특허를 추가로 출원하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미래 기술이 막 생산 설비를 늘리는 중이다.
아직 리튬이온배터리만으로도 헉헉거리는 중이다.
무리할 수는 없었다.
달리 생각해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이번 배터리 아이템의 목적이다.
IP 시티폰처럼 배터리 사업 자체에 이목을 집중시켜서 이 배터리 사업에 사람들의 시선이 끌리게 할 목적이었다.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겠지. 설사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한계가 명확하니까.’
스마트폰 연구는 ARN, 벨리 소프트, 퀄컴, 에플, 퀄컴 쪽으로 다 분산시켜 놓았다.
사령탑 역할은 KM 전자에서 하지만 실제 업무는 각 계열사가 각자 알아서 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이 정보를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더욱이 최민혁은 이 배터리 사업이 스마트폰과는 달리 독자적인 사업 영역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때문에 이 배터리 사업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업체의 대응에 대해서 예상해 보았다.
‘히타치 공작소 특허 강탈 사건 때문에 눈치를 보는 것일까?’
최민혁은 마츠타 고지 박사가 시가 마사아키 박사와 대학 동창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놀랍게도 새방 전지 김상우 본부장이 조학주 연구소장과 같이 KM 전자를 방문한 것이었다.
‘뜻밖인데?’
그가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성향이 꽤 폐쇄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새방 전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축전지 한 우물만 팠다. 여기에 대해 투자와 노력을 집중했다. 따라서 다른 기업에 쉽게 손을 벌리지 않다고 봤다.
‘그건 오성 전관 역시 다르지 않으니까. 차라리 잡아먹힌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KM 전자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제까지 아니다 싶은 사업부는 다 매각했으니까.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IP 시티폰 사업부다.
원천특허까지 다 팔아치운 부분은 확실히 한국 기업과는 성향 자체가 달랐다.
KM 전자 내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외부 기업이 봤을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
새방 전지에게 있어 KM 전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김상우 본부장입니다.”
“조학주 연구소장입니다.”
30대 후반의 김상우 본부장은 재벌 3세답지 않게 호쾌한 인물이었다. 수염이 듬성듬성 나서 대화도 잘되는 것 같았다.
조학주 연구소장은 키가 190㎝가 넘지만, 눈빛은 따스했다. 일반적인 연구소장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인상이었다.
이 두 사람은 당장 KM 그룹 재벌가의 인물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들은 심지어 최민혁 실장의 나이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태도가 실로 정중했다. 기본적인 예의를 다 지킨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입니다.”
최민혁 실장은 두 사람과 악수를 하면서 그들의 자세를 유심히 봤다.
놀랍게도 자신에게 저자세였다.
나이, 경력을 고려하면 실로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자신이 굳이 이들을 너무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사실 세상이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최민혁의 영향력은 이미 KM 전자를 넘어서서 국내 다른 기업에도 미칠 정도였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내가 기업 매각만 일삼아서 그런 것일까? 이런 이미지도 나쁘지는 않네.’
그로서는 인생 1회 차 기억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따스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반면 지금은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음에도 자신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었다.
최민혁은 왜 이제야 이런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곧 결국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 자신을 어떻게 해서라도 깎아내리려고 하니까.
그리고 최문경 부회장 라인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KM 그룹 내에서 온갖 선전과 선동을 끊이지 않고 일삼았다.
그런 최문경 부회장 라인과 갈등하면서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봤다.
‘하, 내가 너무 우리 첫째 큰아버지에게 집착했던가?’
하지만 새방 전지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이룩한 성과를 너무도 잘 알았다.
이제 최민혁 실장은 단순히 비즈니스맨을 떠나서 톱 탤런트와 같은 위상을 가졌다.
최민혁은 뒤늦게야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러면 굳이 메드 드로닉을 가지고 장난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김상우 본부장이 바로 이 점을 언급했다.
“저도 미국 내의 메드 드로닉 소송을 봤습니다. 아니, 한번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님이 어떤 분인지 이 사건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설마 의료기기 희생자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서 주실지는 몰랐습니다.”
“아,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기업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다들 그러질 못합니다. 최민혁 실장님 같은 분이 늘어나야 한국 산업계도 풍성해질 겁니다.”
김상우 본부장은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최민혁을 띄웠다.
그런데 이 아부가 진지한 멘트로 시작해서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대하 역사 드라마에나 나올 거 같은 간신배스러운 멘트인데, 주는 뉘앙스가 달랐다.
최민혁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굳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상우 본부장도 그렇지만 조학주 연구소장은 주로 메드 드로닉 소송을 계속 언급했다. 최민혁 자신의 성과보다 이 사건에 더 흥미를 보인 것이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메드 드로닉 소송 건을 무시하지 못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딱히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긴 나도 인생 1회 차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겠지.’
인생 1회 차에서 그의 이미지는 바닥을 기었다.
그러니 상대가 시작부터 무시하고 들어왔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협상이 잘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마케팅 최준형 과장의 이번 성과는 가볍게 볼 일만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물론 계속 두 사람의 찬양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 기획 팀의 이야기를 듣고, 사전에 조사했다면 긴 이야기는 필요없겠군요. 맞습니다. 리튬이온배터리 특허를 출원했고, 이미 미래 기술을 인수해서 시제품 생산 중입니다.”
김상우 본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미래 기술의 생산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배터리 업체를 인수해서 생산량을 늘릴 수도 있지만, 상업화는 좀 다릅니다.”
“생산 불량 말인가요?”
“네, 이미 콜린스에서 비슷한 문제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TV 쪽은 KM 전자의 전문 영역이라서 어떻게 해결했을 겁니다. 그런데 배터리는 전혀 생소한 분야 아닙니까?”
최민혁은 이를 순순히 인정했다. 필요하다면 미래 기술을 이용해서 배터리 업체를 더 인수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다른 대안이 있다면 굳이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
‘합작 회사는 괜찮지.’
“그렇죠. 문제가 생기겠죠.”
“아마 예측한 것보다 많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시간도 많이 필요할 거고요. 아마 그래서 일본 업체와 컨택하신 것 같은데, 그건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뢰 문제 말인가요?”
“네. 이제까지 일본 업체는 한국을 생산 공장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앞선 기술을 그대로 둘 리가 없습니다.”
“설마 베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응용할 방법은 많습니다.”
“우리 특허를 이용해서 더 앞선 특허를 내놓는다는 말이군요.”
“그것도 한 방법이죠.”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가 그걸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걸 알기에 제조 기반을 다 팔아치우고 있는 상태였다.
‘필요하다면 외주를 주는 것이 훨씬 낫지.’
미래 기술을 인수한 것은 그렇다고 완전히 제조 기반을 없애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배터리 원천기술을 테스트할 정도의 기반은 필요했다.
사실 지금 남아 있는 KM 전자 생산 기반도 비슷했다. 굳이 최민혁이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질질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지금 오성 전자는 주기적으로 최민혁 자신의 눈치를 보니까.
오성 전자가 힘이 없어서 최민혁 실장에게 소극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압니다. 그래서 새방 전지에 연락한 것입니다.”
“…그, 그렇군요.”
김상우 본부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만남은 예상한 것보다 더 중요했다.
다만 최민혁 역시 굳이 이 자리에서 김상우 본부장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새방 전지를 딱히 믿지 않았으니까.
‘뭐, 일본 업체도 믿지 않았지.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아. 일단 일본 업체의 시선을 끈 것은 확실하니까.’
일본 배터리 업체의 반응은 곧 최문경 부회장을 비롯한 다른 한국 대기업의 귀에도 흘러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추후 계약할 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죠. 아마 새방 그룹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할 검토 사안이 많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리튬 이온 배터리 외에 리튬 폴리머 배터리 문제도 고민했다. 그는 사전 정지 작업을 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어. 임 부장이 알아서 먼저 움직여 줬으면 좋은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어서 골치네. 힌트를 좀 줘야 할까?’
* * *
특허 팀의 임기석 부장 역시 최근 마케팅 팀이 주도한 일을 들었다.
그도 마케팅 팀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움직일지는 몰랐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준 밥상 앞에 앉아서 받아먹는 일만 해온 것을 반성했다.
그는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리튬이온배터리 특허를 출원하면서 관련 다양한 아이디어 특허를 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리튬이온배터리의 취약성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