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
“배터리의 안정성이 가장 중요할 겁니다. 이 부분은 메드 드로닉과 같이 다시 검증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꼭 배터리 문제만이 아니라 배터리 제어 부분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과연 메드 드로닉이 자신들의 제안을 받을 것인지 하는 점 말이다.
이번 미국 소송에서 패하면 천문학적인 돈을 토해내야 할 메드 드로닉이 과연 자신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흠.”
최민혁은 정말 오랜만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이미 실험 차트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시현하는 것을 보고 이 일의 진상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송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 부분은 골치 아파서 더 파고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여기서 접을 수는 없어서 최준형 과장을 쳐다보았다.
“제가 뭘 더 해주면 되겠습니까?”
최준형 과장이 바로 소리쳤다.
“제가 직접 미국에 가서 환자 가족을 만나보겠습니다.”
최민혁은 사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최준형 과장의 태도에 혀를 찼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아마 메드 드로닉 측에서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서 환자 가족을 압박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최민혁은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한 이상 끝장을 봐야 했다.
그럼으로써 메드 드로닉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었다.
최민혁은 힐끗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최준형 과장 행동이 좀 지나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최준형 과장의 말처럼 잘되면 그 성과는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 과장에게 한번 맡겨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덮어버리고 끝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민혁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알았어요. 법무 팀 변호사도 몇 사람 붙여 드리죠. 단, 이 일을 어설프게 처리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목적은 소송이 아니라 우리 배터리 홍보이니까. 그 점을 잊지 마세요.”
“넵!”
최준형 과장은 자신이 있게 대답했다. 사실 이다음 일은 어렵지 않다고 봤다. 중요한 핵심은 역시 메드 드로닉과의 협상이니까.
‘선을 넘지 않는 게 중요해.’
* * *
최민혁은 최준형 과장이 바로 미국으로 떠난 소식을 듣고는 혀를 찼다.
그는 이 일이 어떻게 풀려갈지 한편으로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다른 일과는 달리 쉽게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때문에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주기적으로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을 해봤다.
최준형 과장은 소송 가족 대리인을 만나서 협상을 잘 풀어갔다.
“일단 객관적인 관점에서 피해자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측의 입장을 최대한 밝히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네. 아무래도 괜히 우리 배터리 홍보를 해봐야 부정적인 이미지만 받을 수 있습니다.”
공익적인 관점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최민혁은 그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의 내막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어머니 정미선을 떠올렸다.
일이 정신없이 바빠서 이제까지 전화 연락만 몇 번 했다.
그는 뒤늦게야 자책했고, 오랜만에 집을 방문했다.
다행히 이번 드라마를 끝낸 어머니 정미선은 지난번과 비교하면 한결 좋아져 있었다.
비록 그녀가 최근 찍은 드라마 시청률이 결딴났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 민혁이구나.”
“넵.”
“너 정말 너무한다. 어쩌면 한 번도 날 찾아오지를 않아!”
“사실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정미선은 등 스매시를 한 번 날려서 멀뚱멀뚱한 최민혁의 태도에 타박했다.
“이 녀석이, 태도가 뭐 그래?!”
“진짜 바빴다니까요.”
정미선은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아들에게 삼계탕을 끓여주었다.
그녀는 최민혁이 삼계탕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최민혁 역시 오랜만에 맛보는 어머니표 삼계탕 요리가 좋았다.
아니, 그는 정미선과 같이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 소박한 행복은 전생에서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역시 메드 드로닉 사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좋았어.’
물론 정미선은 그저 최민혁이 삼계탕 먹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최민혁은 정미선을 보자 자연스럽게 ATI 지분과 관련된 내용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돌아간 선친 최병문을 상기한 것이다. 사실 최병문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최용욱 회장에게 많은 것을 남겨뒀다.
그런데 그걸 정미선에게 말하지 않고 그냥 침묵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문득 인생 1회 차에서 정미선의 의아한 행동을 떠올렸다.
당신 정미선은 자신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정미선은 깊은 절망과 고심에 빠져 있었다.
‘역시 최문경 부회장과 딜을 했을까?’
그렇다면 그 부분은 선친 최병문이 남겨둔 유산일 확률이 높았다.
‘뭔가 있다면 알아서 말해주겠지. 아마 분명할 거야. 당시 내 이미지를 본다면 아버지도 믿기 어려웠을 거야. 굳이 지금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정미선은 번민에 잠긴 최민혁을 보면서 툴툴거렸다.
“일은 잘되어가?”
“네, 너무 잘되어서 문제죠.”
“내가 알아봐야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매사에 조심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너희 아버지 일이 떠올라서 그래. 그 양반도 잘나갈 때는 참 잘나갔어.”
정미선은 최병문 이야기를 꺼낸 후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최민혁은 다급하게 정미선을 위로해 주었다.
그는 물론 배터리 사태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당장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일본 업체에서 투자하겠다고 했다.
물론 미래 기술 지분 인수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을 고려하면 가벼운 제안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물론 이들 제안을 거절하고, 미래 기술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곧 있으면 닥칠 IMF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본 자본을 이용해서 방파제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역시 지분을 넘기고, 라이선스를 공유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 미래 기술 매출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커질 것이다.
그런 내막까지 정미선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정미선은 물론 최민혁의 사정을 잘 몰라서 계속 질문했다.
“지금까지 민혁이가 일을 잘한 것으로 알아. 하지만 네가 듣기로 이런저런 일이 많다고 들었어.”
“아, 큰일은 아니에요. 저보다는 어머니는 괜찮아요? 이번에 찍은 드라마…….”
정미선은 발끈했다.
“시청률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최민혁은 대박 날 드라마 몇 개를 떠올렸다. 사실 원래 소개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슬그머니 제안했다.
“그래도 4%가 채 나오지 않았잖아요. 차라리 제가 괜찮은 드라마를 한번 알아볼까요?”
“이 엄마는 상관이 없다. 난 드라마를 찍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
“그렇습니까. 그런데 4%면 민폐잖아요. 드라마 찍는 다른 스태프들이나 배우…….”
정미선은 최민혁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렸다.
“그렇다고 그런 말은 하지 좀 마. 그래도 다들 자기 일에 만족하잖아. 감독님도 미안해하면서 후회하지는 않아.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찍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네.”
최민혁은 소박한 정미선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조용히 살고 싶은 성정 자체가 어머니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다만 정미선도 계속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아들이 밉기만 했다. 그녀는 결국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 TV를 켰다.
마침 드라마가 한창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슬쩍 채널을 계속 바꾸었다.
드라마가 아닌 채널로 말이다.
다행히 MBS 뉴스가 나왔다.
그런데 뉴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국내 소식이 아니라 미국 소식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방송에 나오는 주인공이었다.
뜻밖에도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이 최준형 과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 법정에서 한 여인, 동행한 변호사와 같이 나왔다.
물론 뒤를 따른 사람 중에는 KM 전자 법무 팀 소속의 변호사도 있었다.
몰려온 미국인 기자들은 서로 앞다투어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 소송에서 내놓은 증거 때문에 소송에서 유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방식은 어떻게 생각하신 것입니까?]
흐느끼는 피의자를 대신해서 나선 이는 다름 아닌 최준형 과장이었다. 그는 유창한 미국어를 사용해서 말했다.
[전 KM 전자의 최준형 과장입니다. 이번 일은 우리 회사에서 최근 고안한 배터리 기술을 검토하는 중에 연관된 문제를 발견해서 연락했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입니다.]
최준형 과장은 마치 자신이 피의자라도 된 것처럼 KMB-01 배터리와 메드 드로닉의 심장 세동 제거기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전압을 요구하는 의료기기는 그만큼 안정성이 중요합니다. 우리 KM 전자에서 새롭게 내놓은 배터리는 바로 이 안정성을 충족시켰습니다. 다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심장 세동 제거기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때마침 기존 배터리에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일테면 메드 드로닉만이 아니라 수십 개의 의료기기를 가지고 테스트를 진행했고, 그중에 문제가 생긴 것이 바로 메드 드로닉이라는 소리였다.
우연히 얻어걸린 게 아니라는 점을 피력했다.
기자는 물론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기기의 문제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운이 좋았습니다! 때마침 아는 지인을 통해서 심장 세동 제거기 불량에 관한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게 이번 소송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된 것 정도가 아니었다.
최준형 과장이 직접 몇 가지 실험을 법정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재판의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전역에서 몇 사람이 더 연락했다.
그들 역시 부작용을 호소했다.
사망자는 모두 5명으로 늘어났다.
오늘 재판은 그 때문에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메드 드로닉이 원래 재판에서 승소할 것이라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이번 재판은 이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만약 메드 드로닉이 이번 소송에 패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토해내야 했다.
리콜은 당연하고 말이다.
메드 드로닉 본사가 이 난리였으니, 메드 드로닉 한국 지사의 활동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TV 인터뷰만으로 내막을 알 수 없는 정미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KM 전자라면 너희 회사 직원이니?”
“…맞습니다.”
최민혁은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멍하니 화면만 쳐다보았다. 그도 사전에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그가 설마하니 미국 소송에 직접 끼어들지는 몰랐다.
정미선은 물론 그런 최민혁도 최민혁이지만 인터뷰 내용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니? 너희 회사에서 배터리도 만들어? 아니, 설사 배터리를 만들어도 뜬금없이 미국 소송에까지 나오는 거야?”
“일단 자회사인 미래 기술이 배터리를 만들고요, 그 배터리 마케팅 때문에 메드 드로닉을 따로 조사했습니다.”
“하면 저 내용이 또 뭐니?”
“뭐 그러다가 메드 드로닉 배터리를 검토했는데, 안정성에 좀 문제가 있었어요. 그 사실을 메드 드로닉 코리아 측에 이야기했는데, 씹더라고요. 한국에서도 곧 첫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조사했고, 미국에서 마침 진행 중인 소송이 있다기에 도움을 준 겁니다.”
“……?”
정미선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최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최민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 역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냥 평범하지 않은 마케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어머, 요즘 마케팅은 저렇게 미국 법정에까지 가서 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