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84화 (584/1,021)

#584.

“저희가 투자하는 게 일방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배터리는 핸드폰에만 적용할 게 아닙니다. 노트북을 비롯한 모바일 제품에는 다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미래 기술의 차세대 배터리가 우리 요구에 맞는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샘플을 원하는 겁니까?”

“샘플 외에 제품 스펙도 부탁합니다. 정확히 어떤 형태의 배터리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배종구 사장은 딱 이 정도에서 대화를 끝냈다. 그는 임명진 부장이 원하는 기술 자료도 당장 내주지 않았다. 딱 봐도 상대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배터리 공급이 아니라 배터리 기술에 관련된 것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일테면 지금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구두계약이었다.

막말로 뒤에 가서 없던 일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임명진 부장은 떠나면서도 미끼를 계속 던졌다.

“비단 우리 LC 전자만이 아니라 계열사에서도 귀사의 배터리 제품 사용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팩스를 비롯한 모바일 제품이 전부 대상에 들어가니, 더 적극적인 대응을 부탁합니다.”

“…….”

배종구 사장은 상대 제안이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라는 우산의 무게를 느끼고 말았다.

계약할 때 신중했어야 했다.

최민혁 실장이 장난같이 막 퍼줄 때 알아봐야 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그런 행동을 한 셈이니까.

‘최민혁 실장님 때문에 협박은 어렵고, 이제 타협하자는 건가? 정말 아쉽구나. 40% 지분은 어렵다고 해도 30% 지분 정도는 남겼어야 했어.’

* * *

임명진 부장 일행이 갑자기 왔다가 떠났다.

이후 미래 기술 사장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서 다들 놀란 것이었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배종구 사장이 아직도 넋을 잃고 있는 윤종수 전무를 타박했다.

“이봐, 윤 전무!”

윤종수 전무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임명진 부장이 언급한 말뜻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했다.

“맙소사 한 달에 5만 개라니.”

더욱이 이 물량은 LC 전자에만 해당한다.

LC 전자 계열사가 아니라도 다른 대기업 역시 충분히 영업할 수 있었다.

아니, 그쪽은 오히려 더 쉬웠다.

LC 전자가 자사 배터리를 채용한다면, 다른 대기업들도 비슷한 결정을 내릴 테니까.

오성 전자, HY 전자, 대운 전자를 비롯한 한국 10대 대기업에 납품한다고 가정해 보자.

월 수량이 무려 50만 개를 훌쩍 넘어간다.

거기에 다른 모바일 제품까지 고려하면 100만 개도 환상만은 아니었다.

대당 3,000원으로 잡아도 월 30억이다. 그런데 노트북처럼 덩치가 커지면, 그 금액이 껑충 뛰어서 100억은 가볍게 넘어간다.

실제로 배터리 덩치를 키운 아이템 역시 연구 중이었다.

이게 되면, 나머지 중소기업 공급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 영업 결과를 바탕으로 일본이나 미국 대기업에도 공급할 수 있다.

아니, 모토로라와 같은 기업도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생각하면 할수록 장밋빛 환상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야, 윤 전무!!!”

윤종수 전무는 갑작스러운 폭탄에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입니까?”

“윤 전무야, 정신 좀 차리자.”

“아, 죄송합니다.”

“지분 매각했다고 날 싸잡아서 욕하던 윤 전무 맞나?”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내가 녹음한 거 보여줄까?”

KMP-01은 녹음 기능까지 있다. 배종구 사장은 실제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윤종수 전무가 다급하게 ‘STOP’ 버튼을 눌렀다.

“아, 사장님, 정말 너무하신다. 꼭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합니까?”

“아니, 나에게 했던 거랑은 태도가 너무 달라서 하는 소리야.”

“알았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요.”

“지랄한다. 최민혁 실장 능력에 대해서 찬양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그런데 왜 그딴 소리를 한 거야?!”

“사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윤 전무, 다음에는 조심해라. 진짜 가만히 안 둘 ㅤ테니까.”

“…네.”

윤종수 전무는 무안해서 배종구 사장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성급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막상 지금 상황을 보면 배종구 사장의 판단이 옳았다.

‘하긴 최민혁 실장에 대한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반감을 품은 이들은 그와 관련돼 있는 이해집단뿐이다.

KM 그룹 임직원이거나 관련 업체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옹호했다.

이제는 배종구 사장이 오히려 비아냥거렸다.

“윤 전무 자네는 머리로 결론을 내려도 행동으로는 옮기기가 쉽지 않은가 봐.”

“…죄송합니다.”

윤종수 전무는 그제야 따가운 허종진 팀장을 비롯한 실무진의 시선을 의식하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는 더욱이 얼마 전에 배종구 사장에게 한 이야기를 하나둘씩 떠올리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배종구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 전무 당신이 누누이 말했잖아. 최민혁 실장 그 친구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뭔가 요구를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이제 눈치를 챈 거야?”

윤종수 전무는 툴툴거렸다.

“그만하십시오. 솔직히 사장님도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몰라서 지금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잖습니까.”

“이미 조사한 것이 있나 본데, 한번 이야기해 봐.”

윤종수 전무는 그제야 차세대 배터리로 가능한 영업 범위를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밑에서부터 차분히 흘러가는 내용이라서 무리가 없었다.

“특히 자동차, 대규모 모바일 저장 장치는 시간이 갈수록 그 수요가 폭발할 겁니다. 지구 온난화 이슈가 계속 터져 나오는 만큼 친환경 모바일 수요는 예상하기도 힘듭니다. 그런 미래를 떠나서 당장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모토롤라가 주도하는 핸드폰 시장입니다.”

배종구 사장이 정말 놀란 것은 바로 ‘모토롤라’ 이야기가 나온 다음이었다.

“정말 모토롤라에도 우리 배터리 공급이 가능할까?”

윤종수 전무는 힐끗, 허종진 팀장을 쳐다보았다.

아직 회사에 적응을 못 한 허종진 팀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다 빼겠습니다. 핵심은 KMB-01은 모토롤라에서 사용하는 배터리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높아서 3~4배 이상 사용 시간이 길다는 겁니다.”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사용 시간 외에 안정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강점이 있었다.

특히 충전 시간이 획기적으로 짧다는 점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특히 최민혁 실장님이 보내온 특허 중에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단점을 극복할 만한 답이 다 있습니다. 그걸 다 적용하면 기존의 배터리 시장을 독식하고도 남습니다!”

배종구 사장은 묵묵히 윤종수 전무와 허종진 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찼다. 바로 최민혁 실장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50억이란 돈을 그냥 던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차세대 배터리 상용화만 성공한다면 당장 월 매출 100억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성능만 좋다면 입소문이 날 것이고, 그다음에는 회사 매출이 얼마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윤종수 전무는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에플, 퀄컴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이잖습니까. 그러니 그쪽에 들어갈 물량을 감안하면 월 100만 개도 꿈은 아닐 겁니다.”

“…하면 우리보다 정보력이 강한 LC 전자가 굳이 찾아온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네.”

“그럴 겁니다. 배터리 정보도 정보지만 미리 물량을 확보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처지에서는 아직 납품 실적이 없으니, 서로 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긴 그런 점도 있어.”

“이번 일은 최민혁 실장에게 알려서 승인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

배종구 사장은 새삼 미래 기술의 가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대화를 할수록 미래 기술 가치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일이 새삼 아쉬웠다.

하지만 그는 곧 욕심을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이번 일은 자신이 주도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 * *

배종구 사장은 역시나 최민혁 실장의 예상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최근 LC 전자가 한 제안을 정리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알렸다.

최민혁은 배종구 사장의 태도에 피식 웃었다. 그가 배종구 사장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그의 반응에 만족했다.

사람인 이상 배종구 사장과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젠 상황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배종구 사장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시 믿어볼 만한 사람이야.’

그는 동시에 LC 전자의 빠른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군요.”

“아무래도 배터리 물량을 선점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 회사에 공급하는 물량과는 별개로 에플에도 공급해야겠군요. 퀄컴도 있고요. 으음, 생각보다는 많이 필요하겠어요.”

“그 부분은 기획 팀에서 따로 선정해서 검토할 예정입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엄밀히 말해서 KM 전자와 미래 기술은 서로 무관한 회사였다. 미래 기술 오너는 자신이니까.

그런데 조성돈 팀장은 미래 기술이 마치 KM 전자 계열사인 것처럼 말했다.

최민혁은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공장 증설 말인가요?”

“네, 지금 봐서는 최소한 월 50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할 생각입니다.”

조성돈 팀장은 배터리 생산량 목표치를 단순하게 정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 기술에 바로 사람을 보내서 직접 확인까지 했다.

“우리가 보는 시야와 LC 전자가 보는 관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LC 화학이 굳이 미래 기술을 노렸던 게 간단한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LC 그룹이라고 봐야죠. 거기에 딸린 계열사가 한두 개가 아니니까. 더욱이 핸드폰 수요도 무시하기 힘들 겁니다.”

“가만, 그러면 LC 전자 쪽에도 배터리를 공급할 생각입니까?”

“굳이 공급하지 않을 이유는 없죠. 우리 쪽 물량을 확보하고 난 다음이라면 말이죠.”

조성돈 팀장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미래 기술의 생산 수량을 KM 전자 계열사에서만 굳이 소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실장님은 스마트폰 전용 배터리를 염두에 두셨겠지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최민혁은 갑자기 자기 눈치를 보는 조성돈 팀장의 행동을 보면서도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나도 몰랐으니까.’

KMB-01을 만들 때만 해도 당장 필요한 배터리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 여파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이 아무리 미래 기술을 잘 안다고 해서 시장 전체를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시작에 불과하니까.’

배터리 시장은 생각보다 광범위했다.

단순히 모바일 기기를 넘어서 전기 자동차에도 적용할 수가 있다.

이차 전지의 핵심인 리튬이온 전지는 양극, 음극, 분리막, 전해질이 핵심이다.

최민혁은 이 핵심 특허를 중심으로 해서 우선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직접 미래 기술의 시제품을 본 뒤에야 자연스럽게 리튬이온 관련 사업이 떠올렸다.

“이것도 추후 말이 나오겠어요.”

조성돈 팀장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벨린 투자 자금을 이용해서 미래 기술을 인수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귀찮아요. 주주 눈치 보는 것도 싫고, 우리 오 사장님에게 가서 보고하는 것도 번거로워요.”

“하지만 오 사장님이 이제까지 최 실장님 제안을 거절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압니다. 그래도 번거로운 것은 번거로운 겁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태도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조심할 필요를 느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작성해둔 배터리 관련 산업 보고서를 내밀었다.

최민혁은 물끄러미 그 보고서 내용을 보면서 보고서가 펼치는 미래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더 떠올렸다.

“…LC 전자가 똥줄 탈 만하긴 하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오성 전자 역시 곧 알게 될 텐데,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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