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
‘뭐, 정영일 씨를 이중 첩자로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고.’
최민혁에게 정영일은 솔직히 보복의 대상이 아니라 보상을 주어야 할 직원이었다.
LC 그룹 역시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사장단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몰라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아쉽네요. 지금까지 조용히 처리한 것도 이런 일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배터리 특허 관련 문제는 조용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덩치가 더 커진 셈이다.
이건 IP 시티폰 사업 대박과도 관련이 있다. 비록 최민혁 실장이 IP 시티폰 사업을 잃기는 했지만 정작 2,700억이란 천문학적인 이익을 봤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제 이런 부분을 공격했다.
최민혁은 입맛이 썼다.
“이제 무슨 일을 하기가 무섭네요. 제가 손만 대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도 나올 것 아닙니까.”
“…한국 대기업이 전혀 생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LC 그룹 역시 이전과는 행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뭐, 걔들이 완전한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뜻밖이군요. 미래 기술 이야기가 LC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다루어졌다니.”
“이전과는 이제 상황이 다릅니다. 특히 IP 시티폰 사태 이후에 LC 그룹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이 특허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그래요?”
“이번 IP 시티폰 사업 매각 대금이 결국 2,700억이었지 않습니까. 기자회견 내내 김현탁 사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봤다면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
결국 KM 전자의 IP 사업부는 KD 통신으로 넘어갔다.
이 자리를 주도한 사람은 KM 전자 오영근 사장과 김현탁 사장이었다.
두 사람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매각 협상과 관련된 서명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2,700억 매각 대금 이야기가 나왔다.
이전에 위성 사업부를 인수한 오성 전자처럼 사업 매각이 쉬쉬하면서 진행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워낙에 IP 시티폰 관련된 이슈가 너무 말이 많이 나와서 달라진 변화였다.
언론 역시 무조건적으로 최민혁 실장을 비웃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 또 매각 잭팟을 터뜨리나!]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KM 전자가 IP 시티폰과 관련해서 쓴 돈이 아무리 많아도 200억을 넘지 않는다는 소리가 나왔다.
아니, 보수적으로 잡으면 100억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언론사도 있었다.
그럼 이번 일로 단순하게만 계산해도 2,500억 이상의 수익을 챙겼다는 거다.
그것도 불과 몇 달 사이에 말이다.
최민혁은 힐끗 자신 앞에 놓인 기사들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냥 소설을 써라.’
“…뭐, 무선랜과 네트워크 특허를 IP 시티폰에만 국한했으니, 큰 문제는 아닐 겁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다소 걱정하시던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태연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도 이제는 경호원 수준의 안목만 가지지 않았다.
“IP 시티폰이 만약 성공하게 된다면…….”
“IP 시티폰이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존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동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이죠.”
“하지만 통신료가 저렴해서 뚫고 들어갈 곳은 많지 않습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중국 시장만큼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다 헛소리입니다.”
“볼륨버그를 비롯한 해외 언론에서도 이번 매각에 대해서는 실장님이 실수했다고 합니다.”
“볼륨버그요?”
김명준 과장은 놀랍게도 볼륨버그 기사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거기엔 뜻밖에도 최민혁 실장의 이번 행보가 큰 실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내보낸 건 비단 볼륨버그만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손을 쓴 것 같네요. 그냥 무시하세요.”
“정말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런 기사가 나오도록 했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우리 때문에 꽤 손해를 봤으니, 아마 샐로먼 브러더스 주주들의 반발이 꽤 심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은 이번에 날 상대로 승리했다!”
“흠.”
김명준 과장은 그제야 KD 통신 대주주 중의 하나가 샐로먼 브러더스라는 것을 떠올렸다.
최민혁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반응이 좀 나와서 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전까지는 우리 회사를 아주 듣보잡 회사라고 생각해서 아예 아무런 대응조차 안 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LC 그룹 행보를 잘 살펴보세요.”
“…알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미래 기술 관련된 정보를 언론에 쭉 뿌리세요. 다만, 우리가 했다는 증거만 남기지 말고요.”
“…네.”
그는 신기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IP 시티폰에 관해서는 대부분 최민혁 실장이 당했다고 떠들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최민혁 실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번엔 생뚱맞은 배터리 사업을 파고 있다.
‘하긴 배터리 사업을 마냥 안 좋게만 볼 수는 없겠지. LC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미래 기술과 최민혁 실장을 언급할 정도였으니.’
* * *
미래 기술 이야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기사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고작 매출이 30억 남짓한 회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런데 이 회사를 인수한 사람이 놀랍게도 벨린 투자의 최민혁 실장이었다.
안 그래도 2,700억 잭팟 때문에 원천기술에 관심이 많이 가기 시작한 시기였으니.
미래 기술과 관련된 기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기업은 다들 미래 기술을 들여다봤다.
LC 전자 기획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IPS-LCD 사건 때문에 한동안 시끄러웠던 분위기와는 또 달랐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부장으로 진급한 임명진 부장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성 전자가 최근 구미 공장에도 휴대 전화 생산 설비를 준비 중입니다. 최대 5만 대까지 매달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병수 기획실장은 짜증스러웠다. 휴대폰 사업 경쟁자인 오성 전자의 움직임을 그냥 두고 볼 수만 없기 때문이다.
“역시 CDMA 전화의 수요 때문인가?”
“그렇게 봐야 합니다. CDMA 갈등 때문에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핸드폰 수요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 CDMA 휴대폰이 문제였다.
특히 소비자 가격이 무려 90만 원 남짓할 정도로 비싸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쪽은 소비자 가격 기준을 75만 원에 잡았으니, 그건 상관이 없겠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배터리 무게가 240g인 것이 문제입니다. 그나마 대기 상태로 켜놓을 수 있는 시간이 30시간으로 오성 전자의 12시간보다는 길긴 합니다만.”
한병수 기획실장은 미래 기술 관련 기사에서 KM 그룹 사장단의 회의 내용까지 언급된 것을 보면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대체 사내 보안을 어떻게 하길래 이런 정보가 다 도는 거야?’
“만약 미래 기술의 차세대 배터리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임명진 부장은 LC 화학이 최근까지 검토한 결과물과 최근 자신이 전자부품 연구소를 통해서 얻은 자료를 취합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허종진 팀장이 잠적했기 때문에 다른 팀원을 통해서 확보한 자료다.
따라서 정확도는 떨어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성능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손바닥 사이즈 MP3에 들어가는 배터리 용량이 무려 1,200mAH였다.
핸드폰 크기를 고려하면 적어도 2배인 2,400mAH까지도 가능했다.
“…정말 이 사이즈로 2,400mAH까지 가능한 거야?”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미래 기술과 직접 만나서 협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면 최민혁 실장과 직접 만나서…….”
한병수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거론되자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래 기술이라는 범퍼가 존재해서 이쪽과 소통해도 충분했다.
“…미래 기술 쪽과 직접 만나서 한번 협상해 봐. 그쪽에 차세대 배터리 공급 여부와 월 공급 가능 수량까지 확인해 봐. 그럼 차세대 배터리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도 검토할 수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아,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강압적인 방법은 쓰지 마. 미래 기술은 말이 좋아서 미래 기술이지, 최민혁 실장 물건이니까. 그 인간은 자기 회사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네.”
임명진 부장도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터리 성능 유무는 휴대폰에서 꽤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배종구 사장은 회사 지분 80%를 최민혁에게 좋아서 넘긴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지분 매각을 아쉬워했다.
다만 차세대 배터리 시제품을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딱 여기까지였다.
KMB-01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미래 기술로 옮기면서 주식을 받은 허종진 팀장이 부랴부랴 사장실을 찾아왔다.
“LC 전자의 임명진 부장이 방문했다고?”
보고를 받고, 같이 회의실에 들어온 윤종수 전무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아직도 회사 지분 80%를 넘긴 것 때문에 배종구 사장에 대해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LC 전자 기획 팀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자 매우 놀랐다.
배종구 사장은 부랴부랴 이들을 동반한 채 임명진 부장을 만났다.
수행원이 모두 3명이 같이 따라왔는데, 전부 휴대폰 관련 기획안 책임자였다.
그들이 온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미래 기술에서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배종구 사장은 그 정보가 LC 화학을 통해서 흘러나갔냐고 물을 정도로 풋내기는 아니었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직 개발 단계 중이라서 문제가…….”
“섭섭합니다. 이미 전자부품 연구소에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만.”
“…으음,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연구와 양산은 다른 문제입니다. 더욱이 LC 전자라면 휴대폰에 들어갈 배터리를 원할 텐데, 우리 회사에서 그 물량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세대 핸드폰에 들어갈 배터리를 검토 중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더욱이 우리 쪽에서 원하는 물량은 매달 적게는 2만 개, 많게 5만 개 이상 필요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물량을 우리가 공급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귀사에 투자하겠습니다.”
“…….”
배종구 사장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일을 열지 못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은행과 투자자를 그렇게 찾아다녔지만 단 1원도 투자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비웃는 이도 있었다.
아무리 누군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만큼 미래 기술이 가치가 없는 기업이라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LC 전자 직원이 직접 나와서 백지 수표를 내밀고 있었다.
저게 임명진 부장 혼자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아니, 그 반대겠지. 이미 내부적으로 결론이 나야 저런 태도가 가능할 테니.’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민혁 실장이 보인 모습과 똑같았다.
배종구 사장은 그래서 더 착잡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정상까지 딱 한 걸음만 남겨둔 채 물러났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물론 지금 상황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 가치가 급등하면서 20% 지분 가치가 이미 10배 이상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40%만 가졌어도…….’
배종구 사장은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50억을 던지길래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자신이 당한 셈이다.
그는 복잡한 상념을 털어버렸다.
“하, 정말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시네요.”
“필요하다면, 우리 LC 전자의 공장을 넘길 수도 있습니다.”
“…….”
배종구 사장은 상대의 계속되는 제안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심은 큰 충격을 받아서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에 임명진 부장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