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
다들 가자미눈을 한 채 민상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민상수 부장은 겸연쩍어서인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구명진 부장은 민상수 부장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 딱히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이 기획안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살피고서야 핸드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핸드폰 쪽 개발 경험이 있어서 부른 것일까?’
그는 따가운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의식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
“1안이나 2안은 특별한 것이 없는 프로젝트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사소한 것이라 매출이 별것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콜린스 기준으로 볼 때 지금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와는 달리 3안은 좀 특이한 경우인데…….”
구명진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기획안만 봐서는 도저히 이게 뭔지 구체적으로 예측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는 불완전한 기획안이었다. 자신이라면 이런 기획안을 보고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민 부장님, 이게 최종 기획안입니까?”
민상수 부장은 다소 당황했다. 그는 정영일 사원에게서 다급하게 기획안을 가져와서 이게 최종본인지는 알지 못했다.
“잠깐만요.”
그는 다급하게 정영일 사원에게 전화해서 이게 최종 기획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영일도 3안의 구체적인 내용 자체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냥 CPU, LCD, 핸드폰, 배터리를 합친다는 정도.
OS가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OS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결국 KM 전자 계열사 쪽의 기술을 합쳐서 뭔가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한다 정도였다.
CPU와 핸드폰을 합쳐서 왜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민상수 부장은 그제야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맞을, 이 자식!’
그런데 정영일은 이번 기획안 때문에 회사에서 잘렸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서둘렀다는 것을 알았다.
실상 최민혁은 회의를 들은 후에 일단 임직원들을 교육하려고 했다.
그들이 직접 KM 전자 계열사의 기술을 듣고 나면 인식의 전환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다음 과정은 이를 기반으로 큰 카테고리를 잡아서 문제를 풀어가려 했다.
그런데 KM 전자 계열사의 천재적인 엔지니어들이 각자 스스로 답을 해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저 막연한 코끼리 이야기만 담겨 있는 것이 초안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그런 불완전한 기획안을 받아서 기획 팀에 넘겼다.
그러니 기획안에 있는 개요만으로는 엉성한 추측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도 나올 수 있는 답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인식 밖에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정영일을 이용해서 작업한 이유였다.
이런 정보를 접한 이들은 오히려 더 혼란을 느낄 테니 말이다.
구명진 부장은 최민혁 실장의 예상대로 입을 열었다.
“…핸드폰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한 채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는 최민혁이 연루된 것만으로 뭔가 있다고 의심만 했다.
그러니 앞뒤 다 끊어먹은 채 말하는 구명진 부장이 짜증 났다.
“구 부장, 내가 이쪽 분야는 전혀 모르잖아. 그러니 좀 쉽게 설명을 해봐!”
구명진 부장은 호기심 어린 다른 팀장들의 시선에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은 단순한 추측입니다.”
답답한 최문경 부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구명진 부장은 찔끔 놀라서 다급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 지금 제 손에 있는 핸드폰 하나를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모바일 OS인 심비안을 개발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1년은 족히 걸립니다. 독자적인 OS 개발은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OS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CPU 개발이 더해진다면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각각의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 이야기가 이어졌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기획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제야 안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걸 가지고 조카 최민혁이 뭘 하려는지가 더 궁금했다.
“계속해 봐.”
“물론 자금이 넉넉하면 이 개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모토로라나 오성 전자가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개발할 테니까. 즉, 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딱 예를 든 것은 이 핸드폰입니다. 그런데 여기 3안대로라면, 이 핸드폰에 다양한 기능 모듈을 붙여야 합니다.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구명진 부장은 뒤늦게야 자기 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바로 에플의 메시지 패드였다. 에플 인수 건 때문에 우연히 구한 것이었다. 설마 이것을 이 자리에 내놓게 될지는 몰랐다.
“아, 이게 딱 좋겠네요. 에플에서 이거 만들어서 다 말아먹었습니다. 기획 3안과 비교하면, 내용도 별반 차이가 안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핸드폰까지 결합한다라?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발 기간만 족히 5~6년 이상 잡아야 할 겁니다.”
아니, 솔직히 구명진 부장은 이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넘어야 할 기술 장벽이 너무 많았다. 실상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골치가 아픈 것 중의 하나가 배터리 기술이었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려는 것일까?’
“…….”
최문경 부회장도 메시지 패드를 받아서 한번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팬으로 화면도 터치하고, 건전지도 빼보았다.
당장 느린 응답 특성에 짜증스러웠다. 흑백 LCD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심지어 응용프로그램은 그냥 쓰레기였다. 그냥 장난감으로 쓴다면 모르겠지만, 업무용으로 절대 아니었다.
그냥 괴상한 폰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인 메시지 패드를 보고서야 이 3안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뒤늦게야 겉으로 봤을 땐 그럴듯하기는 한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구명진 팀장은 쾌재를 불렀다.
“…그 메시지 패드 때문에 에플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봤습니다. 아마 최민혁 실장도 에플을 통해서 뉴튼에 대해서 알았을 겁니다. 아마 에플은 실패했지만, 자신은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이제까지 아이템에 계속 성공하면서 오만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기획안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구명진 팀장의 추측은 뜻밖에 정확했다.
최민혁 실장이 자만에 물들었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다만 딱 거기까지다.
이 물건이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도 말이다.
그런데 이건 구명진 팀장을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이 기획안에 사용된 기술 하나하나는 도전 장벽이 있는 기술이었다.
당장 IPS-LCD 하나만 놓고 봐도 그 의미는 가볍지가 않았다.
LC 전자와 오성 전자가 이 IPS-LCD를 공급하기 위해서 수천억을 퍼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이 아는 경험 안에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에플의 실패를 답습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상 구명진 팀장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터치 IPS-LCD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직 KMP-02에 대한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
LC 전자나 오성 전자는 계약 때문에 IPS-LCD 내부 정보를 외부에 알릴 처지도 아니었다. 괜히 최민혁 실장 눈에 거슬렸다가 특허료 폭탄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성 전자는 KM 그룹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두 그룹이 서로 소통이 강하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탐욕으로 물든 두 기업이 서로 손을 잡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
최문경 부회장은 팔짱을 한 채 회의실에 참석한 다른 팀장들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나타난 KM 그룹 중역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입에 자물쇠를 채운 사람처럼 다들 입을 쿡 다물었다.
그들은 솔직히 휴대전화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메시지 패드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정말 에플에서 만든 물건입니까?]
[그럴 겁니다. 이것 때문에 에플이 큰 타격을 입었으니까요.]
[에플 전 사장이 잘린 것도 이 제품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플이라고 해서 마냥 성공하는 기업만은 아니었군요.]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스마트폰을 생각한다고?
상상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들의 인식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대신 구명진 팀장은 옆에서 묻는 이들에게 소곤소곤 설명도 해주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소리쳤다.
“민 부장, 구 부장 빼고 자네들은 각자 하던 일이나 봐.”
“아, 알겠습니다.”
* * *
부회장실은 그제야 침묵이 감돌았다.
잠깐 휴식 타임도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뒤늦게야 자신이 너무 작은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영란 본부장 일 이후에 자신이 너무 민감했다는 것을 자책했다.
‘하, 내 꼴이 이게 뭔지.’
그런데 상황이 꼭 그렇게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이 놀랍게도 ATI의 대주주란 신분을 이용해서 ATI로 하여금 KM 산업 비메모리 쪽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
물론 매년 1,000만 달러 가까운 물량을 매년 공급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일에서 그 자신이 놀란 것은 최용욱 회장이 바로 ATI 대주주 신분이란 점이다.
‘병문이 그놈의 작품이겠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최병문이 벨린 투자를 이용해서 벌인 일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자신조차 최병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샐로먼 브러더스에 투자를 하기 힘들었다.
‘운도 따랐어.’
사실 최용욱 회장이 가진 외국 비자금은 자신이 승계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ATI에 투자한 자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경련 사건 이후에 최용욱 회장은 자신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용욱 회장이 조카 최민혁에게는 별다른 이권을 주지 않은 점이다.
하지만 이제 자기 장녀 최영란 본부장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이대로 비메모리 사업 매출이 급격히 늘어난다면 자신의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실상 이 일이 최민혁보다 더 심각했다.
그런 차에 민상수 부장이 이상한 정보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화내지 않았다. KM 그룹은 핸드폰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까.
그는 이보다 IP 시티폰 사업 매각을 약속한 조카 최민혁 실장이 이걸로 뭘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자리한 구명진 부장을 쳐다보았다.
“가만, 그러면 민혁 이놈이 핸드폰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뜻도 되잖아?”
구명진 부장은 메시지 패드를 힐끗 쳐다보면서 능구렁이처럼 툴툴거렸다.
“글쎄요. 이걸 핸드폰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아마 에플 쪽과 이런저런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나온 것 같습니다. 차라리 PDA라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PDA?”
“PDA는…….”
PDA 이야기가 나오자 이야기는 겉돌기 시작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곧 이 기획 3안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산만한 이야기에 기획안이나 PDA 둘 다 관심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뭔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민혁이 이놈도 IP 시티폰 때문에 열받아서 도를 넘었을 수도 있어. 아니, 그게 맞겠군.’
이들의 논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획안의 3안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끼리 코를 만진 장님처럼 이런저런 추론만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짜증스러웠다. 그는 그제야 기획안이 어설프다는 것을 깨닫고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눈치껏 민상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기획 3안을 꼼꼼하게 살피던 민상수 부장은 뭔가 많이 빠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아차 싶었다. 차세대 제품 프로젝트 기획안이라고 들고는 왔는데, 실상 많이 허술한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