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
조창호 차장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실장님이 독촉이 너무 심해서요.”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IP 시티폰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까?”
“응? 나도 듣기는 했는데, 정말 그 사업을 시작하는 거야?”
에플 일에 정신이 없던 최병연 소장은 국내 일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IP 시티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은 IP 시티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구심을 느낀 조창호 차장은 자신이 아는 범주 내에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병연 소장은 혀를 찼다.
시티폰도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무선랜은 더 기가 찼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을 믿었다.
“IP 시티폰이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면 최 실장님이게 나에게 한마디는 했을 거야. 아마 다른 의도가 있겠지.”
조창호 차장은 최민혁 실장을 신봉하는 최병연 소장의 태도에 혀를 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했을 거야. 더욱이 지금은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을 봐서는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
“하긴.”
조창호 차장은 자신이 지금 맡은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순순히 수긍했다.
그는 그제야 ARN 본사에서 교육받은 차세대 IP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IP가 정말 놀라운 점은 모바일 기기에 다 적용이 된다는 점입니다. K투스, 무선랜, 심지어 무선 모바일 칩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최병연 소장도 조창호 차장에게 듣고서야 시티폰이나 무선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세대 IP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린 ARN의 차세대 IP는 모바일 핸드폰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이해를 못 한 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가만, ARN에서 개발하는 차세대 IP라고 했잖아? 그걸 실장님이 어떻게 안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단순히 조창호 차장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차세대 IP 개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ARN 내에서도 담당 팀과 윗선 몇 사람뿐이다. 심지어 그들 역시 이 기술을 당장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조창호 차장이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받고 와서 ARN 연구 팀에 합류해 어느 정도 기술을 배웠다.
조창호 차장은 차세대 IP를 이용한 다양한 응용 기술을 설명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그냥 ARN 본사로 가서 교육을 받은 것이 다였습니다. 더욱이 ARN 쪽에도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ARN 본사도 꽤 놀란 눈치였습니다.”
ARN 차세대 IP는 아직 상업적으로 완성된 기술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이 차세대 IP에서 부족한 점을 메꾼 것이다.
덕분에 ARN 연구실 내부 분위기도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대해서 혀를 내두르는 쪽으로 흘러갔다.
조창호 차장은 ARN 본사에 있는 동안 오히려 ARN 연구원들의 의혹을 풀어준다고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차세대 IP 관련 기술을 더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놀랍군.”
최병연 소장은 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미국 에플에 보내놓고 그냥 방치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하긴, 차세대 비전이 없고서야 일방적으로 에플만 밀어주지는 않았을 테니, 확실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점이야.’
“스티븐에게 이야기해야겠어.”
* * *
“벌써 한국으로 떠난다는 말입니까?”
스티븐의 표정은 마치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과 같았다.
최병연 소장은 오히려 질린 기색이었다.
“이번 KMP-02B와 아이컴에 대해서는 해야 할 바를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제품을 완성한 사람은 최병연 소장입니다. 곧 있을 전시회에서 최병연 소장님이 직접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 일은 스티븐에게 맡기겠습니다. 더욱이 최 실장님이 가능하면 에플 영업이나 홍보에는 나서지 말라고 했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최병연 소장이 에플 전시회를 통해서 대외적으로 나서는 것을 막은 이유는 있다. 스티븐을 밀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 처리 하는 것이 깔끔했다.
괜히 최병연 소장이 에플 일에 너무 나서면, 두 회사 사이 일도 조명을 받을 수 있다.
KMP-02A와 KMP-02B 기술에 대한 문제다.
그렇게 되면 KM 전자 주주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에플 지분을 일부 소유한 KM 전자로서는 그런 일을 막아야 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것을 빌미로 압력을 넣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처지에서는 딱히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최병연 소장이란 인재가 너무 아쉬웠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에플에서 한번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민혁 실장님에게는 제가 따로 말해놓겠습니다.”
최병연 실장은 스티븐의 제안에 어깨를 으쓱했다.
“제 사정은 이미 스티븐도 잘 알지 않습니까?”
“압니다. 하지만…….”
스티븐은 입맛을 다셨다. 그 역시 뒤늦게 최병연 소장의 사정을 들었다. KM 전자에 있다가 오성 전자로 이직한 후에 일어난 일. 그리고 다시 KM 전자로 돌아온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자신 못지않게 사연이 많은 사람이다.
최병연 소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끝까지 절 밀어준 사람이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러니 스티븐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게 해주십시오.”
“하.”
스티븐은 단호한 최병연 소장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가 계속 자기 옆에 있는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긴 이미 이번 프로젝트는 더 손댈 것이 없으니까.’
다만 그도 CDMA와 IP 시티폰과 관련해서 들은 것이 제법 있었다.
“저도 CDMA에 대한 투자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IP 시티폰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정말 IP 시티폰 사업에 뛰어드는 겁니까?”
“글쎄요.”
최병연 소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IP 시티폰 관련해서는 아직 이런저런 다양한 뜬소문을 들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 *
최민혁은 최병연 소장에게서 전화 연락을 받고는 IP 시티폰에 대해서는 별것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언급했다.
그는 이보다 차세대 프로젝트에 대한 힌트만을 남겨두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스티븐이 한 스카우트 제안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 이 과정 자체에 만족했다.
IP 시티폰 사태 때문에 최민혁 실장 자신이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된 셈일까?’
지금 한국 언론은 온통 최민혁 실장을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내기에 바빴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된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여론의 반응이 꼭 일방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최민혁 실장 자신이 여태껏 쌓은 실적 때문이다.
그런 점은 그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화력이 부족했다.
“가능하면, 절 옹호하는 언론사도 만나서 적당히 반대편에 서도록 설득해 보세요. 필요하다면 광고를 더 싣겠다고 해도 됩니다.”
조성돈 팀장은 이제 혀를 찼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차고도 넘치는 상황입니다.”
그가 직접 내놓은 어제 일자 조간신문들.
기사 대부분은 마치 최민혁 실장을 돈에 미친 독점 자본가로 묘사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진은 잘 나왔군요.”
기사 표지 사진은 방송에 나온 장면을 그대로 따왔다.
“이런 사실이 회사 브랜드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비난받는 이유는 서민을 위한 통신 서비스 기술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IP 시티폰 프로젝트는 특허만 무진장 찍어냈을 뿐이지, 실제로 진행된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주도했다고 하기는 좀 그렇군.’
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이걸로는 화력이 부족해요. 좀 더 밀어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된다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그제야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가 한 가지를 말했다.
“이왕이면 해외에서 알 정도면 좋겠네요. 필요하다면 에플의 스티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세요. 최병연 소장을 호출한 것은 그런 이유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사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은 결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일을 저지르지 않으니까.
다만 왜 이 사태에 외국 언론이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인가?’
* * *
IP 시티폰은 최민혁 실장의 독과점이라는 문제와 함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언론은 연일 최민혁 실장을 공격하기에 바빴다.
갑자기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는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는 이들이 대거 합류했다.
최문경 부회장, 최명진 한부 그룹 회장, DL 그룹이 언론사에 기름을 퍼부었다.
한국은 마치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시끄러웠다.
최민혁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이권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서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실제로 미국 언론에서도 이 사태를 주목하면서, 유럽에도 기사가 나갔다.
이런 열기는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실제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즉 여론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최민혁 실장이 쌓은 영향력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기사에 반감을 느낀 일반 서민들이 언론사에 직접 전화해서 항의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결국 이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정보 통신부도 사태가 심각해지자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IP 시티폰 사태와 관련해서 도움을 청했다.
국내 사정이 최민혁 실장이 원한 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최민혁은 자신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해외 계열사의 핵심 인재들을 다시 국내로 조용히 불러들였다.
이를 주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IP 시티폰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다만 해외 쪽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좀 달랐다.
한국 사정이 그들의 상식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샐로먼 브러더스 태국 지사로 좌천된 데니스 샐로먼 이사도 처음에는 이 정보를 듣지는 못했다.
“멕시코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를 보고도 태국 정부는 반응이 없어?”
“아무래도 멕시코 페소화 신용 붕괴는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멕시코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동남아 태국으로서는 남의 일이다. 그들은 멕시코의 사태가 자신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멍청한 새끼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혀를 찼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국 정부 금융 담당자를 만나서 주의하라고 경고까지 했음에도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군.’
태국 정부는 자신들의 고정 환율제에 자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그가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도식적인 행위였으니까.
샐로먼 브러더스가 태국에 한 투자금을 갑자기 뺄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주의나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태국 정부의 반응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정작 놀란 부분은 이 태국 정부의 반응이 아니었다.
라이언 레비 부장이 갑자기 꺼낸 IP 시티폰 사업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본사 제안처럼 태국에도 IP 시티폰 사업에 투자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IP 시티폰 사업이라니?”
“아, 아직 정식으로 본사에서 지침이 내려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도 본사 아는 지인 통해서 우연히 얻은 정보입니다.”
“본사 지침이라니?”
“어, 모르셨습니까? 지금 한국에서 시작된 IP 시티폰 사업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아니, 한국 사태에도 우리 샐로먼 브러더스가 손을 썼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최민혁 실장이 CDMA 서비스 기술에 도움을 준 제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IP 시티폰 때문에 공격을 받는다고? 아니, 그 IP 시티폰이 도대체 뭐기에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