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20화 (520/1,021)

#520.

김이경 여사도 완전히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X 리포트 사태 이후에 한부 그룹 이야기는 그룹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그게 아니어도 한부 그룹과 관련된 안 좋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녀는 결국 자신도 수습하기 힘들다고 느껴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최문경 부회장은 이미 충분히 고민한 터라 그녀가 넘긴 바통을 이어받아서 적당히 변명을 했다. 정확히는 사실을 토대로 각색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이번 일은 제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영란이가 최해진 본부장을 마음에 들어 해서 한 일입니다. 영란이는 최해진 본부장 그 친구가 한부 그룹 막내의 장남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만남을 처음부터 반대했습니다!”

“저, 정말이야? 정말로 한부 그룹의 최명진 회장 일가를 말하는 거냐?!”

김이경이 때마침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부창부수라고 최문경 부회장의 세련된 거짓말을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영란이는 애초에 결혼하기 싫다고 자기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데 친구 소개로 최해진 본부장을 만난 거죠. 저도 이 사실을 뒤늦게 아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를 막을 수가 없어서 일단 지켜봤습니다.”

“그게 진짜 사실이야?”

“영란이도 최해진 본부장의 신분을 모르고 만났어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그 정도 인물이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필사적인 변명.

그런데 두 사람이 말한 내용이 좀 과장이 있지만, 딱히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은 최영란과 최해진 본부장이 서로 깊은 애정을 느낀 단계였다.

최용욱 회장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교대로 쳐다보았다.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따로 알아봐야겠어.’

* * *

최용욱 회장도 X 리포트를 몰랐다면 한부 그룹에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X 리포트 때문에 다양한 조사에 들어갔고, 그 대상자 중의 하나인 한부 그룹은 철저하게 따로 다 조사했었다.

이 조사 내용에는 최명진 회장과 한부 그룹의 승계 구도에 대한 것도 있었다.

최명진 회장은 모두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의 갈등은 KM 그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 한부 그룹 주가가 폭락한 이후에 지분 증여가 있었는데, 이 대상 중에는 장남 지분이 빠져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명진 회장이 미는 후계자가 셋째인 최평준 부회장이란 점이다.

그는 이번에 한부 철강 주식 200만 주를 증여받아서 한부 철강 지분을 14.7%까지 끌어올렸다. 이 지분에는 장내 매수도 포함됐다.

장승일 실장은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기조실에 찾아온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와 관련된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막내인 최상현 비서실장의 행보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는 이번에 한부 철강 주식 150만 주를 증여받았을 뿐 아니라, 상명제약 지분 2만 주를 증여받기도 했습니다.”

“하면 최평준과 최상현의 싸움인가?”

“이미 최평준 부회장이 승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최명진 회장은 최상현 비서실장에게도 힘을 밀어줘서 견제를 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났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장남과 차남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더욱이 넷째의 행보도 심상치 않았다.

“하면 영란이 혼사 문제를 주도한 사람이 최상현 비서실장이란 소리야?”

“기조실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최해진과 최영란의 혼사는 딱 필요에 의한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최해진의 부친 최상현은 이미 다른 대기업처럼 KM 그룹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는 특히 최민혁에게 주목했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에게는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의 관계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최영란은 차선의 선택인 셈이다.

더욱이 최민혁의 퀄컴 인수 이후에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상황이다.

이미 정보 통신부 고위층 관료조차 최민혁에게는 저자세였다. 함부로 꼰대질 하기에는 최민혁이 너무 커버린 것이다.

거기에 최민혁을 둘러싸고 들리는 흉악한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최훈열 전무를 감방에 보낸 일부터 시작해서 눈에 거슬리는 인물은 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제거하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벼랑 끝으로 몰린 최문경 부회장의 처지에서 한부 그룹의 최상현 비서실장은 나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

최용욱 회장은 최상현 비서실장을 이용하려는 최명진 회장의 속내가 무엇인지 늦지 않게 알았다.

마약과 여배우 성 상납 추문이 끊이지 않는 장남 때문에 최평준 부회장이 쉽게 모든 것을 얻도록 두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경이 그놈이 그랬으니까.’

최용욱 회장은 겉으로 드러난 한부 그룹의 모습에 탄식하고 말았다.

그도 내막을 잘 몰랐다면 이번 혼사를 결코 반대할 일은 아니니까.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짐작은 가지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영란이 사랑놀음 때문은 아닐 것 같고, 문경이는 정말 왜 이 일을 두고 본 거냐?”

장승일 실장은 안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기 냉큼 사실을 말했다.

“아무래도 최명진 회장과 거래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잦은 만남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굳이 조사할 필요는 없다. 최문경 부회장이 움직이면서 남긴 자료만 파도 나오니까.

“거래라…….”

그럴 수 있다.

아니, 재벌가의 자식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다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재계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는 한부 그룹이라는 점이다.

“…정부 쪽에 선을 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 하긴 그럴 수 있지.”

정치권과 관계를 맺은 것은 역시 최용욱 회장 자신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최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심각했으니, 위기감을 느낀 최문경 부회장은 다른 대안을 찾았을 것이다.

최명진 회장이라면 가히 최문경 부회장에게 최적의 상대다.

두 사람은 또한 성정이 비슷해서 하는 짓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단순히 최영란의 정략결혼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좌우하는 큰 흐름을 보면서 장고에 들어갔다.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 실장 간의 대립은 딱히 나쁘지 않다.

지금은 그로 말미암은 연장선에서 모든 일을 생각해야 했다.

장승일 실장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최영란 이사님과 최해진 본부장의 사이가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뜬금없는 지적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소리야?”

“네.”

“내가 알기로 만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서로 사랑한다고?”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허허허.”

최용욱 회장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처음에는 첫째 며느리 김이경이 꾸민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아닌 것 같았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두 사람이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사진 자료를 내놓았다. 그는 여기에는 핑계를 댔다.

“한부 그룹에 관한 조사는 이미 따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자료일 뿐입니다. 딱히 최해진 본부장을 특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

골치 아픈 일에 최용욱 회장도 이마에 손을 지그시 댔다.

그도 장승일 실장이 이 문제에 대해서 왜 소극적으로 보고했는지 금방 깨달았다. 괜히 잘못 보고했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최명진 회장과 최문경 부회장의 관계.

최영란 이사와 최해진 본부장의 연인 관계.

한부 그룹의 암울한 미래까지.

문제가 생각보다 지저분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딱히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당장 한부 그룹이 망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한부 그룹에게서 뜯어먹을 것이 많았다.

다만 문제는 교통정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다.

최영란과 최해진 본부장의 관계 때문에 이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가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떠오른 것은 지난 가족 모임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인 최민혁의 모습이다.

“가만, 민혁이 이놈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장승일 실장은 최근 최영란 이사의 동선을 잘 알기에 두 사람이 자주 전화로 연락해서 소통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최용욱 회장에게 그 예민한 부분을 보고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는 것 맞아?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아무래도 회장님 집안 문제라서 선뜻 끼어들기가 망설여집니다.”

“장 실장, 자네 마음은 알겠어. 좋아, 그러면 하나만 묻지.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요. 아무래도 회장님 가정 문제라서 선뜻 제가 왈가왈부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의 집안일까지 장승일 실장이 알아서는 곤란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 관계가 조금씩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 친구가 참 선을 잘 지킨다니까.’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자신이 장승일 실장을 질책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이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민혁이를 불러봐.”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한동안 자신을 툭하면 찾아와서 일을 못 하게 만드는 최영란 이사를 피해 다녔다.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일이 많은지 계속 전화질을 했기 때문이다.

‘스토커가 따로 없군.’

그런데 최영란 이사도 정말 답답했다. 도저히 자신이 해결할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일을 그냥 덮어둘 수도 없었다.

집안끼리 이야기가 오고 가는 혼사 문제라서 결정이 되었다면 그녀가 말릴 명분이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최해진 본부장을 꽤 좋아했으니.

그러니 비극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그녀도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만 최민혁은 한부 그룹 일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이 최명진 회장과 엮이는 것은 대찬성이다.

이 일을 잘만 엮으면, 최문경 부회장을 KM 그룹에서 퇴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일이 잘 흘러가고 있다가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크게 부풀려서 KM 그룹이 기둥뿌리까지 흔들린다면, 아무리 대주주라고 해도 KM 그룹에서 최문경 부회장을 쫓아내겠지.’

사실 IMF가 지금 상태로 통과만 한다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다만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최용욱 회장이 그 일을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미우나 고우나 자식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최용욱 회장이었다.

최민혁은 때문에 이번 일과 관련해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럴 때는 ETRI에 내려가서 CDMA 연구진 자문이나 도와주는 것도 괜찮다.

아니면 에플에 가서 아이컴과 KMP-02 개발이나 돕든지 말이다.

조성돈 팀장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보고했다.

“디자인이 대폭 바뀌었다고요?”

“최병연 이사가 말한 바로는 스티븐이 기존 디자인에 수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거 바꾸면, 손을 대야 하는 곳이 꽤 늘어날 텐데요?”

“안 그래도 늘어진 일정 때문에 스티븐이 독촉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최병연 이사 연구 팀은 다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가 오히려 행복했다고 할 정도이니.”

다소 질린 조성돈 팀장은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제대로 보고한 것인지 고민했다.

“스티븐이 손을 써서 그렇겠죠. 자존심이라면 세계 최고인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물건에 대한 애정은 무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저도 언론을 통해서 들은 소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그렇겠죠. 뭐 그게 제가 스티븐을 믿는 이유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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