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
황당해하는 최용욱 회장도 처음에는 반발하려다가 자신 역시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곤 도저히 화를 견딜 수가 없어서 서재를 나가 버렸다.
김이경 여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한쪽에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장녀 최영란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최영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저런 상념 때문에 더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 * *
최영란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자기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문을 닫은 후에 최민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밀고했다.
그런데 최민혁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가만, 그러면 한부 그룹 이야기는 안 한 거야?]
[아, 그건 그렇지.]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하고, 뭘 했다는 거야? 쓸데없는 소모성 이야기로 시간 다 때운 거잖아.]
[시간문제지. 할아버지 눈치를 봐서는 결코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아쉽네.]
[응? 지금 할아버지가 내 혼사 문제를 아는 것이 낫지 않아?]
[꼭 그렇다고 하기도 힘들어. 혼사는 이제는 막 시작 단계인데, 지금 끝나봐야 할아버지 분노도 오래가지 않을 거야. 더욱이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잖아?]
최영란 이사는 민망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아, 그게, 꼭, 그런 것도 아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 내가 딱히 누나 혼사 문제까지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으니까.]
[가만, 그러면 너, 나 도와줄 거야?]
[한부 그룹 문제? 그건 아니지.]
[…그러면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누나는 아직도 한부 그룹 문제의 본질이 뭔지 모르는구나. 한부 그룹이 끌어오는 그 막대한 돈이 그냥 나오겠어? 다 빌린 돈이야. 그러면 언젠가 갚아야 할 날이 오겠지. 그건 내가 어떻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야.]
[그런가.]
[누나가 꼭 최해진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내가 해줄 조언은 간단해. 두 사람이 지금이라도 한부 그룹 쪽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것. 딱 그거 하나야.]
[한부 그룹이 그렇게 심각해?]
[드러나지 않는 부실이 엄청날 거야.]
[하지만 장승일 기조실 실장님이 보여준 자료만 봐서는 그렇…….]
[아니, 그 부실 말고, 지하에 숨겨둔 부실이 어마어마할 거야. 그런데 그 지하 층수가 얼마나 될지는 누구도 모르지. 아마 그 폭탄 터지면, 누나는 길바닥으로 쫓겨날 거야.]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실은 가혹한 법이야. 누나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누나 의견을 존중해 줄 거야.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지. 그게 아니라면 최해진 그 친구는 빨리 손절매하는 게 최선이야.]
[하아, 모르겠다.]
잠깐의 침묵.
최영란은 뒤늦게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 할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나야 뒤늦게 폭탄이 터지는 것을 원하지만 지금도 상관없어. 누나 입장은 다르니까. 중요한 것은 이번이 KM 산업 경영권 승계에 뛰어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점이야. 그것만 잊지 마. 힘을 얻으면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갈 수 있을 거야. 최해진과의 관계도 쉽게 풀어갈 수 있어.]
[…너도 관련이 없는 일은 아니잖아. 꼭 남의 일 말하듯이 말한다.]
[나? 내가 KM 산업이 왜 필요해? 그깟 구멍가게에는 관심도 없어.]
최영란도 이번엔 순간 울컥했다.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최문경 부회장이 지금껏 해온 일이 전부 KM 산업을 먹기 위해서 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KM 산업이 그깟 구멍가게 소리를 들을 정도의 회사는 아니잖아.]
[아, 내가 실수했다. 하지만 정말 난 KM 산업, 아니 KM 그룹에 관심이 없어.]
[그럼 왜 이러는 거야?]
[그거야 누구보다 누나가 가장 잘 아는 탐욕에 미친 큰아버지 때문이지. 만약 KM 그룹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해 봐. 그다음에는 뭘 할 것 같아?]
[…설마 아버지가 널 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 내 힘이 없다면 무섭지. 다만 이제는 과거와 달라서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정말 피곤하거든. 누나 아버지는 보기와는 달리 정말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이야. 자기 거로 생각하면 10년이든, 20년이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니까.]
[…….]
최영란은 최민혁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도저히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는 KM 그룹에 있으면서 실제로 최문경 부회장이 한 수십 차례의 악행을 봐왔다.
심지어 어떤 일은 7~8년에 걸쳐서 진행한 일도 있었다.
그게 그녀가 굳이 최문경 부회장과 대립각을 세운 이유고, AD 설계를 설립해서 독립한 이유였다.
당시는 그냥 그렇게 넘겼는데, 막상 최민혁의 입장이 되자 그럴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딱 한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조용히 살고 싶은 거야.]
[…….]
최영란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최민혁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만 스스로 반문하고서야 최민혁의 말을 확실히 이해했다.
‘아버지가 정말 그렇게까지 한다면, 민혁이 태도를 비난하기도 힘들어.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할까?’
그녀 스스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최문경 부회장을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가 그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처지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최문경이 자신의 삶에 끼어든 순간부터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 * *
사람 감정은 욱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은 약이란 말처럼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더욱이 김이경 여사는 아예 작정하고 최대한 인력을 총동원해서 최용욱 회장이 그렇게 좋아하는 조기구이를 식탁에 올렸다.
그것도 인천에서 막 공수한 것으로 말이다.
최용욱 회장도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다행히 감정을 추슬렀다.
그 역시 최민혁과 최문경 부회장 사이의 갈등을 잘 알았다.
실상 두 사람을 원수지간으로 만든 이가 본인이었으니까.
더욱이 김이경 여사가 한 눈치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최문경 부회장에게 쌓인 감정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아버님, 우리 그이가 다소 실수한 것은 저도 들었어요. 하지만 영란에게 지분을 넘기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아요.”
소위 말하는 며느리의 애교.
최용욱 회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역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은근히 부추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이 그렇게 나쁜 결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하반기 KM 그룹이 진행한 일 중에 쓸데없는 낭비로 이어진 프로젝트는 없다.
문제가 있는 프로젝트는 그 자리에서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두 사람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 때문이다.
KM 그룹 임직원들은 그 사이에서 아차 실수하는 경우에 회사에서 갈려 나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그렇다고 이런 일을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할 수는 없다.
아마 그랬다간 최문경 부회장이 다시 폭발해서 정신병자처럼 날뛰고 말 것이다.
그는 그래서 좀 다른 이야기를 했다.
“…AD 설계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아? 난 딱 그 가치만큼 지분을 제시한 것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거래야. 손녀와 할아버지 문제가 아니다. 너희 두 사람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김이경은 지금처럼 최용욱 회장의 감정이 상했을 때는 추켜세워 주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압니다. 아버님이 매사에 얼마나 공평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문경 부회장은 순간 감정이 다시 격해져서 발끈하려 했다.
김이경 여사가 절묘하게 최문경 부회장을 막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님, 우리 그이 입장도 있지 않아요? KM 그룹을 위해서 그이는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지금 보세요. 가지고 있는 지분이 얼마 없어요.”
실상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할 말이 많았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KM 산업 입장에서는 비메모리 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도 일이 쉽지가 않아. 그래서 무리해서 막대한 차입금을 끌어오려고 했지. 지금은 민혁이 그놈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만 그만큼 반도체는 나에게 절실했다.”
“하면 AD 설계 인수는 더 신중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그때와는 또 달라졌다. KM 산업이 AD 설계를 인수한다면 상황이 좀 달라. AD 설계가 보유한 안정적인 수급처를 그대로 확보하게 되는 셈이니까.”
“민혁이가 인수했다는 그 기업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더욱이 민혁이가 돕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물론 그 대가로 KM 산업의 지분 일부를 내놓아야 할 거다’란 말을 꿀꺽 삼킨 최용욱 회장은 자신의 속내를 말했다.
“이게 바탕이 된다면, 시장 파이 자체를 국내로 국한하지 않고, 국외로 키울 수가 있다. AD 설계를 수익성을 더 올릴 수가 있어서 서로 윈윈이 될 거다. 그렇지 않냐?”
“…그, 그건.”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최용욱 회장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지는 몰랐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굳이 장녀가 맡은 기업을 강제로 뺏으려고 한 것도 저런 이유였다.
최용욱 회장은 내심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AD 설계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KM 전자도 있고, 에플도 있으니까. 심지어 퀄컴도 좋은 고객이 된다. 그 정도라면 큰 리스크 없이 비메모리 시장에서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어. 그건 KM 산업이 앞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거다. AD 설계는 그 과정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어.”
최민혁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최영란은 최용욱 회장의 주장이 거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도 뒤늦게야 AD 설계의 가치를 깨달았다.
“......”
말이 없는 그녀.
최용욱 회장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다른 일을 떠나서 저놈이 전경련 모임까지 찾아와서 민혁이가 진행하는 퀄컴 인수에 끼어들어서 대놓고 방해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제 저놈에게 좀 질렸다. 그건 정말 아니었으니까.”
“…….”
최문경 부회장은 반박할까 망설이다가 냉랭한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접하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역시 자신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았다.
다른 방법도 많았으니까.
최영란은 겉으로는 어물쩍거렸지만 내심은 좀 달랐다. 그는 최민혁이 한 제안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민혁이도 있는데…….”
최용욱 회장은 갈등하는 최영란 이사의 모습을 보고서야 최민혁의 제안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야 자책하고 말았다.
“민혁이 그놈은 KM 산업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그렇다면…….”
“그 일은 그렇게 알아. 아직 AD 설계 실사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니까. AD 설계 내부 조율도 거쳐야 할 일이다.”
최용욱 회장은 자기가 생각했던 일이 끝나자 이 문제는 여기서 끝냈다. 그는 뒤늦게 ‘혼사’ 문제를 슬쩍 꺼냈다.
“그래, 뭐 혼사에 앞서서 아이들끼리 서로 만나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상대가 누구냐?”
최영란 역시 바보는 아니다. 그녀는 그제야 크게 당황한 김이경 여사와 최문경 부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심, 이 상황을 즐겼다.
그녀는 문득 최민혁이 이상할 정도로 이 문제에 소극적인 이유를 깨달았다. 최민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최문경 부회장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민혁이가 이 장면을 못 보다니.’
최용욱 회장도 두 사람이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입을 열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상대가 누구이기에 이러는 거냐?”
“아버님, 그게 실은…….”
“며늘아, 그 집안이 어디냐?!”
최영란은 이 상황을 더 즐기고 싶었지만, 괜히 이 자리에 더 있기 싫었다. 그녀는 그래서 냉큼 사실을 다 폭로해 버렸다.
“한부 그룹 막내아들의 장남인 최해진 본부장입니다.”
“하, 한부 그룹? 서, 설마 한부 철강의 그 한부 그룹을 말하는 거냐?”
“넵!”
이를 듣자마자 최용욱 회장의 표정은 마치 활화산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신이 난 최영란은 진실을 말해놓고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2층에 있는 구석방으로 냉큼 도망쳤다.
너무 분노해서 오히려 다시 이성을 회복한 최용욱 회장은 최영란을 잡지 않았다. 아니, 그는 솔직히 최영란보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생각마저 했기 때문이다.
“그,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