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하지만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X 리포트에서 언급한 사업 분야는 전부 우리 사업부와 일치합니다. 한부 에너지의 도시가스 사업, 상명 제약 인수, 삼영신용금고를 이용한 제조업 진출, 심지어 승명 데이터 시스템까지 말입니다.”
“내 생각은 달라. 어떤 놈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조작했을 거다. 언론사가 이런 일을 꾸미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니까.”
“언론사에서 이 일을 꾸몄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시점이 맞지 않습니다.”
“초창기에 나온 X 리포트 내용을 보면 내 말을 이해할 거다.”
실제로 X 리포트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다양한 수정본이 나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누가 X 리포트를 만든 것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몇 사람의 이름이 오르내릴 뿐이다.
하지만 최해진 본부장은 쉽게 자기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러면 X 리포트는 배제하죠. 지금 당장 가장 걱정되는 것은 삼영신용금고입니다. 만약 이 자본으로 제조 분야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이 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실제로 적자가 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철강 사업 쪽이다. 지금도 천문학적인 자본이 들어가는 중이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그 점을 깨달았지만, 곧 떠올린 사람이 바로 최명진 회장이었다. 최명진 회장에게 X 리포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가는 재떨이로 두들겨 맞고 만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당장 승명데이터 시스템의 TRS 사업만 해도 그렇습니다. KM 그룹은 아예 이 TRS 사업을 매각했습니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계속되는 아들 최해진의 주장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골치가 아팠다. TRS 사업은 이미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알아. 그래서 TRS 사업은 CDMA 사업 쪽으로 방향을 틀 생각이다.”
“아니, CDMA 망 사업을 하려면 들어가는 자본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걱정하지 마. 너보고 돈 구해 오라고 안 할 테니까.”
최해진 본부장은 그제야 위기감을 느꼈다. 한부 그룹이 작은 그룹이 아닌데, 자금 관리가 주먹구구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질문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그 막대한 돈은 어디서 구해 오는 겁니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아마 최영란 이사를 만나기 전이라면 최해진도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참된 충고를 떠올리자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관심을 뒀던 것이다.
지금은 그 기회였다.
“아니, 꼭 알아야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자본 시장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상황인지 아십니까. 미국 정부는 플라자 협상 이후에 일본 경제를 쥐어짜서 망가뜨리는 중입니다. 그 여파를 우리 경제가 버틸 수단이 없습니다. 만약 외부 충격이 생긴다면 자금경색이 생길 겁니다. 그때는 이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텐데, 그걸 감당할 수는 있습니까?!”
“그런 일은 안 생겨.”
“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런 사고보다는 그런 일이 생겼을 때의 대안을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최상현 비서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최해진의 반응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그도 힐끗, 그가 내놓은 보고서와 조금 전에 한 주장을 떠올렸다.
무조건 허황하다고 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부 그룹 비서실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외부에서 자문까지 구했다.
결과는 최해진의 주장과 거의 유사했다.
당시 최명진 회장은 이 주장을 비웃었다.
그 일은 결국 없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가만, KM 그룹이 구조조정을 했었지.’
사실 최근 최용욱 회장이 밀어붙인 KM 그룹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재계에서도 말이 많았다.
최용욱 회장이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최용욱 회장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실제로 KM 그룹은 구조조정 때문에 매출이 격감해서 한국 대기업 순위에서는 떨어졌지만 내실 평가는 좀 달랐다.
아니, KM 전자를 포함하면 오히려 이전보다 KM 그룹의 순위는 껑충 뛰어올랐다.
다만 최근 KM 그룹 내에 계열사 매각에 관한 이야기는 달랐다.
최용욱 회장이 이제는 멀쩡한 흑자 계열사도 팔아치운다는 이야기에 다들 황당했다.
그런데 상황이 또 마냥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바로 최민혁 실장의 에플 인수와 퀄컴 인수 때문이다.
KM 그룹은 미래가 불투명한 계열사는 다 정리하고, 원천기술이 있는 계열사는 거꾸로 인수했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체질 개선.
기업 경영의 정석이나 다름이 없었다.
최상현 비서실장은 곰곰이 KM 그룹의 구조조정에 대한 부분을 하나하나 돌이켜보고서야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지금의 최해진의 태도가 하버드 대학 졸업 후에 순순히 시키는 일만 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이 일은 네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야?”
최해진 본부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마, 맞습니다.”
“쯧,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이제 갓 사회 초년생이 무슨 재주로 이런 보고서를 만들어? 솔직히 말해 봐. 누가 널 부추겼냐?”
최해진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중요한 일입니까?”
“어, 일단 사회 초년생인 널 누가 뒤에서 선동했는지 꼭 알아야겠다.”
“아버지.”
“아니, 네 주장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누구냐? 안호민 부장이냐?”
“아닙니다!”
최상현은 아들 최해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겉으로 봐서는 능력도 있고, 멋진 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면은 유리알처럼 쉽게 잘 깨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아는 바로 최해진 주변에는 인물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최근 만나고 있는 최영란 이사였다.
“…설마 최영란, 그 아이야?”
최해진 본부장은 크게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는 최상현 비서실장의 따가운 시선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 제가 스스로 알아서 만들었다니까.”
“네놈은 거짓말을 하면, 눈을 깜빡이지.”
“네?”
“정말 최영란 이사였구나.”
최상현 비서실장은 어이가 없어서 잠깐 침묵했다. 그도 최영란 이사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조사를 통해서 잘 알았다. 다만 한부 그룹 전체를 비관적으로 볼지는 몰랐다.
물론 최영란 이사를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최해진 본부장이 굳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혼사와도 관련이 있었다.
‘설마 한부 그룹이 줄도산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최상현 비서실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최영란 이사의 주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니 더 신경을 쓰지 마.”
“하, 하지만…….”
“네 의도는 잘 알겠다. 이 X 리포트는 이전에 이미 말이 돌았어. 당시에도 말이 무성했지. 물론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네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으마. 그렇다고 이걸 무조건 신봉해서는 곤란해.”
최해진 본부장은 몇 차례 더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해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뒤늦게야 최영란이 왜 그렇게 자신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는지 깨달았다.
‘이래서였구나.’
물론 최상현 비서실장은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이걸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최영란 이사가 저놈과의 혼사를 깰 수도 있어. 차라리 최용욱 회장이 이 일을 알았다면 간단한 일인데, 골치 아프네. 일단 최문경 부회장에게 알려야겠어.’
* * *
최문경 부회장은 한부 그룹과의 연수를 위해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는 식사 모임에서 만난 조카 최민혁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불안했다.
그런 차에 최상현 한부 그룹 비서실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에게 들은 내용은 그도 전혀 예상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머리에 뚜껑이 열릴 정도로 분노했다.
‘이게 드디어 미쳤구나. 한부 그룹이 파산할지도 모른다니.’
그의 처지에서는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차라리 한부 그룹보다 KM 그룹이 도산한다는 것이 더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이경 여사가 먼저 나섰다.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끼어들지 마세요.”
“할 수 있겠어?”
“해야지. 그나저나 걱정이에요. 이 일도 분명히 민혁 그놈이 중간에 이간질한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겠지.”
최해진 본부장에 대한 평판은 딱 모범생 재벌 3세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부모에게 대들 리는 없다. 결국, 최영란이 범인이다.
그런데 최영란이 과연 혼자 이 문제를 고민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미 가족 모임에서부터 단단히 음모를 꾸미는 듯한 최민혁 실장의 모습을 봐서는 최영란에게 직접 손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최문경 부회장도 아차 싶어서 뒤늦게 이마를 잡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최민혁이 왜 최용욱 회장에게 일러바치지 않는지 그게 더 이상했다.
‘설마 이걸 빌미로 날 계속 괴롭힐 생각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아내 김이경 여사가 이번 일을 잘 해결하기만을 바랐다.
김이경 여사는 바로 최영란에게 연락해서 집으로 호출했다.
최영란은 안 그래도 최해진과의 만남 문제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그녀 지시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김이경은 바로 화를 냈다.
“너 미쳤니? 도대체 최해진 본부장이 뭐가 어때서 그러는 거야? 이번 혼사가 그냥 너 혼자 결정해서 일어나는 일인 줄 아니?!”
“마음이 안 움직여.”
“지랄한다. 네가 일반인이라도 되는 줄 알아? 싫으면 혼사를 접고?”
“그래도 싫은 걸 어떻게 해.”
김이경도 하나 있는 장녀가 사춘기 소녀처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자 화가 났다.
“내가 듣기로 두 사람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니?!”
“…미안.”
“야, 도대체 최해진 본부장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야?!!”
최영란 이사도 김이경 여사의 반발이 심해지자 뻔히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무 곱상해서 난 싫어.”
“다른 엉뚱한 생각은 없고?”
“…무슨 말이야.”
“이것아, 도대체 네가 사업을 얼마나 안다고, 일 잘하는 애를 부추겨. 한부 그룹이 부도가 난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어떻게 안 거야? 설마 해진 씨가 다 말한 거야?”
“어휴, 정말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 이것아, 네 시아버지 될 사람이 전화했더라. 도대체 이런 허황된 이야기를 왜 믿는지 모르겠다고 그래!”
“…….”
최영란 이사는 발악하는 김이경 여사와 한쪽에서 불구경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보면서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제야 최민혁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했는지 깨달았다.
‘하긴 민혁이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냐.’
애초에 최상현 비서실장, 최문경 부회장, 김이경 여사는 X 리포트 자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 KM 그룹에 일어난 변화를 떠올렸다.
‘장승일 실장님조차 X 리포트를 믿는 눈치였어. 하면 할아버지도 똑같다는 이야기잖아.’
뒤늦게 떠오른 것은 바로 KM 그룹의 구조조정이다.
처음에 한국 대기업들이 죄다 미쳤다고 했던 일이 바로 이 구조조정이다.
그렇게 보면 이 일을 배후에서 진행하게 한 최민혁 실장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민혁아, 너 정말 최고다!’
최영란 이사는 이 덕분에 더 확신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조언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녀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한부 그룹이 파산한다고 확신해. 그런 집안에 시집가서 빚쟁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야!!”
김이경 여사는 황당한 눈으로 장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니, 그녀의 분노는 곧 폭발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2옥타브를 넘어서 3옥타브까지 올라갔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나섰다.
“이번 혼사는 두 집안 사이에서 구두로 약속하기는 했지만, 이번 혼사는 영란이 너도 괜찮다고 해서 한 일이야. 그리고 최해진 본부장 그 녀석도 널 좋아하고, 그러면 된 것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