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최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해진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란 씨 본인의 의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겠어요. 최소한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영란 씨를 보낼 수 없습니다!”
진심 어린 남자의 애정을 느낀 최영란은 꽉 움켜쥔 최해진의 손을 보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팔에 힘을 다 빼고 말았다.
그녀는 잠깐 망설였다.
한부 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민혁이도 딱히 한부 그룹에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어. 한부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엮여 들어가는 것을 염려한 거야.’
실상 사실이었다. 최민혁은 한부 그룹에 전혀 어떤 감정도 없었다. 다만 IMF를 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기에 거리를 둔 것이다.
문제는 한부 그룹의 운명이 이미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영란은 결국 뜨거운 최해진의 시선을 의식하자 한숨을 내쉰 채 한부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해진 씨가 싫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가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한부 그룹 때문이에요. 한부 그룹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최해진이 과연 자신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의아했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이 이야기를 잘 믿지 않으니까.
아니, 실상 그녀의 친구 중에 이 이야기를 해 봤는데,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비웃었으니까.
그녀는 최해진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자금 출처에 대해서 다들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정치권 로비를 통해서 은행권에서 막대한 대출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어요. 만약 그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듣고 있습니다. 계속해 주세요.”
그런데 최해진은 좀 달랐다. 그는 단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히 그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이것이 최해진에 대해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다.
최해진은 집안의 도움을 얻기는 했지만 자기 실력으로 하버드 경영대에 입학했다. 그의 능력은 진짜였다. 사실 하버드 대학 졸업자로서 경제에 대한 식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는 최영란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영란은 그게 놀라웠다.
“…제 말이 이해가 되세요?”
최해진은 꽤 놀랐다. 그는 최영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잠깐 이 문제를 고민해 봤다.
“으음, 솔직히 의문은 많습니다.”
“그렇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다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녀는 크게 실망했다.
최해진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몇 가지 공감 가는 부분은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경제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기준을 토대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 본다면, 영란 씨 주장이 전혀 허황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 정말이세요?”
최해진은 그제야 최영란 손을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란 씨의 지금 결정을 잠깐 보류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최영란 씨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 집안 아닙니까. 아마 우리 할아버지의 독선적이고, 불법적인 경영 방식을 염려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지적이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정권이 바뀌거나 정권의 눈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순간에 우리 그룹은 공중분해 될 수도 있으니까.”
“…….”
그녀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한동안 최해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최해진의 태도는 소극적인 성향 때문에 집안의 지시를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최영란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설마 나 때문인가?’
실상 최영란과 비슷하게 이미 그녀에게 깊은 정을 느낀 최해진은 내심 한부 그룹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것을 떠올린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물론 최영란에게 밝은 미소를 보였다.
“제가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네.”
최영란은 멋진 모습을 남기고는 사라지는 최해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 한 일이었다.
‘민혁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 * *
최민혁은 호들갑을 떨면서 나타난 최영란 누나를 보면서 혀를 찼다.
“미, 민혁아, 최해진 씨 말이야. 내 이야기를 전부 다 들어주었어. 세상에 난 그런 남자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 민혁이 너처럼 매몰찬 그런 남자가 아니야. 가슴이 따스한 남자야.”
“…내가 나쁜 남자라고?”
“아, 그게 아니야. 내 말은, 으음, 차도남, 그래, 차도남 이미지야. 넌 그런 이미지와는 좀 다르니까.”
최민혁은 횡설수설하는 최영란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정말 최해진이 정말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 주장을 다 믿었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단순히 그 주장만으로 진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했어. 정말 똑똑하고, 듬직하더라.”
최민혁은 ‘지랄한다’란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대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뭐, 괜찮은 남자인 것 같네.”
“어, 내 말 단 한마디도 그냥 듣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그건 뜻밖이네.”
최민혁도 고개를 갸웃했다. 실상 최영란이 한 말은 X 리포트에서 다 언급된 내용이다. 그건 이미 기사로 나간 적이 있어서 이리저리 찾아보면 다 정보를 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 누구도 X 리포트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 민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해진 씨는 정말 멋진 남자야!”
최민혁은 벌써 눈에 콩깍지가 씐 최영란의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최해진이 한부 그룹 내의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마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최영란은 자기 남자를 깎아내리는 최민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설마 질투하는 거야?”
“누나, 정신이 나갔구나.”
“아, 미안, 내 말이 지나쳤어. 그런데 해진 씨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거라고 했단 말이야.”
최민혁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X 리포트에 대한 사실을 안다고 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봤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최해진 본부장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야. 과연 한부 그룹 내에서 그렇게 생각할까?”
“…설마 다른 사람은 해진 씨의 주장을 믿지 않을 거란 소리야?”
“어. 쉽게 예를 들면, 우리 KM 그룹이 있잖아. 할아버지도 X 리포트를 처음에 봤을 때는 비웃었어.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이라는 예가 있잖아.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한부 그룹에 기웃거리는 것을 봐. 아마 나에 대한 반감 때문에 불나방처럼 그런 행동을 했을 거야. 그런데 내막을 전혀 모르는 한부 그룹은 어떨까? 택도 없는 소리야.”
“…….”
최영란 이사는 아버지 최문경 부회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계속 초를 치는 최민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최민혁 주장처럼 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최민혁도 최영란에게 자신이 모진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찜찜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지구가 달 주변을 도는 것은 아니었다.
“하버드 경영학과 출신이라면 능력을 무시하기는 그렇지. 그런데 다른 것을 떠나서 최해진의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은 이미 한부 그룹이란 마차를 멈출 수 있는 단계가 아냐. 난 누나에게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는 않아. 최해진 그 남자는 포기하는 것이 좋아. 그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지 비극일 테니까.”
“…….”
최영란 이사는 생각 같아서는 최민혁의 얼굴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냉정한 최민혁의 주장은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언령이 되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까.
거기다 이걸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있다.
지금까지 최민혁이 한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 정말 그렇게 될까?’
* * *
지금 한부 그룹의 상황은 이런저런 잡음으로 말이 많았다.
바로 공세적인 사업 영역 확장 때문이다.
철강 부분만 해도 열연강판 사업에 끼어들었다.
더 황당한 것은 국내 수입 대행사를 인수해서 외제 차 판매 시장에까지 뛰어들었다.
IMC 인수가 그 시작이었다.
이 플랜 자체는 중형 외제차를 이용해서 국내 외제 자동차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기 위함이었다.
또한 우원건설 인수를 통해서 건설 사업 덩치를 키웠다.
따라서 이런 외형적인 투자는 한부 그룹의 방침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최해진 본부장이 국내에 들어온 이유와도 관계가 있다.
최영란과 헤어진 최해진 본부장은 물론 바로 최상현 비서실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원건설 기획 팀을 총동원해서 우선 최영란 이사가 한 주장부터 하나씩 정리했다. 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X 리포트가 이미 알음알음 국내 언론사를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원건설 역시 그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X 리포트 시나리오가 한부 그룹의 공격적인 움직임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안 좋은 좀이 있다면 ‘X 리포터’라는 영화의 주연배우가 한부 그룹인 점이다.
한부 그룹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집단으로 묘사되었다.
“…….”
최해진 본부장은 보고서를 보면서 한동안 충격에 빠져서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바로 삼영신용금고였다.
X 리포트에는 정확히 이 삼영신용금고가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탄식하면서도 X 리포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고를 올리던 안호민 기획 팀장은 오히려 이를 갈았다.
“어떤 새끼가 이렇게 질 나쁜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X 리포터를 흘린 놈을 찾아서 법적조처를 하겠습니다!”
“잠깐만요. 이 보고가 거짓이란 말입니까?”
“말이 안 되니까요. 잡음이 끊이지 않은 가스사업만 해도 망할 수가 없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이 사업은 반드시 진행되야 하는 일입니다.”
“그럴지도.”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X 리포트를 보자 이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 좋습니다. 지금과 같다면 문제가 없겠죠. 만약 외부 충격 때문에 그룹 자금이 경색되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네? 아니, 왜 그런 고민을…….”
“아니, 기업이 겪을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 대한 비상 계획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우유부단한 안호민 기획 팀장은 괜히 최해진의 눈치만 봤다. 그 역시 최해진 본부장이 낙하산 인사라서 아부만 잘하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꽤 날카로운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다시 한번 철저하게 조사해 보세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길 수 있는 시나리오까지 다시 검토하세요. 아버지에게 직접 보고할 테니까.”
“…최상현 비서실장님에게 말입니까?”
“네, 아마 할아버지에게 보고가 올라갈 거예요. 그러니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네.”
안호민 기획 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최해진 본부장이 설마 이렇게 까칠하게 나올지는 몰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명진 회장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잘 알았다.
자칫하다가 회사에서 갈려 나갈 수도 있었다.
‘젠장.’
그런데 최해진 본부장도 최영란 이사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이 X 리포트를 필요 이상 더 파고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지랑 상의를 해봐야겠어.’
* * *
하버드 대학 출신은 확실히 다른 눈으로 본다.
그건 한부 그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다만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버드 대학 출신에게 맡겨두지는 않는다.
최상현 비서실장이 그랬다. 그는 아들 최해진 본부장이 가져온 보고서를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 읽고 나서는 한동안 침묵했다.
“해진아.”
“네?”
“네가 하버드 경영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경영이란 것은 단순히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냐.”
“압니다.”
“아니, 넌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