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71화 (471/1,021)

#471.

두 사람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침중했다.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원래 계획한 일은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뒤늦게 최문경 부회장이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절감했다. 자신이 직접 최민혁 실장과 맞붙어서 싸우고서야 최문경 부회장의 입장을 이해한 것이다.

“최 부회장를 만나서 지난 일에 대해서는 사과해. 필요하다면 약속을 잡아.”

“…알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최근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심란해서 자신의 장녀 최영란 이사가 설립한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를 찾았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부가 가치가 높은 사업이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KM 그룹 관련자 중에는 이와 관련된 사업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장녀 최영란 이사가 설립한 회사였던 것이다.

‘민혁이 그놈이 아이디어를 준 회사였으니까.’

KM 산업 오승환 사장과 조철동 부사장은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는 벤처와 같은 냄새를 물씬 풍겼다.

매출 규모만 놓고 보면 회사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자본을 댈 테니, 이사부터 가.”

차마 아버지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거절을 못 한 최영란 이사는 냉정했다.

“그건 알아서 할 겁니다.”

“다 널 위한 거다.”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르네요. 정부에서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투자를 대폭 늘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것 때문이 아닌가요?”

“…….”

최문경 부회장은 잠깐 자신을 의심하는 장녀를 째려봤다.

그런데 솔직히 최영란 이사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도 문득 자신이 제안한 일에 욕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실제로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의 장녀가 설립한 회사다. 자신이 먹는다고 해도 어차피 최영란은 다시 KM 그룹으로 들어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최영란 이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아버지 회사에는 다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KM 그룹은 내 소유가 아니다.”

“정확히는 할아버지 소유죠.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여자가 나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날 무시하는 거냐?”

최영란 이사는 비웃듯이 말했다.

“만약 단순히 돈만 내겠다면 받죠. 물론 계약서에 명시해 줘야 합니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니?”

“아버지는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하.”

두 사람의 칼부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 최문경 부회장은 최영란 이사를 협박했다.

“내 허락이 없이 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왜요? 국세청이라도 동원하시게요? 마음대로 해보세요!”

“야!!”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말을 더해 갈수록 두 사람 간의 말싸움은 오히려 더 격화되었다.

부녀간의 무시무시한 갈등에 끼어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김희수 연구소장조차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채 AD 설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원은 최영란 이사의 눈치를 볼 뿐 차마 최문경 부회장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장녀 최영란 이사의 지적대로 실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괜찮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얼핏 보면 AD 설계가 별것 없는 회사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전력 계통 칩에 선택과 집중을 한 덕분에 경쟁사도 없었다.

이 바닥에 끼어들기에는 수요가 그리 크지 않았다.

더욱이 전력 칩에 들어가는 칩이라서 상당한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AD 설계 임직원의 경험치는 가파르게 올랐다.

불과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지만 AD 설계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아마 이 경험을 토대로 2~3년만 지난다면 무섭게 성장할 회사였다.

‘민혁이 놈의 조언을 그대로 따른 영란이 이 녀석 능력도 만만치 않아. 하지만 민혁 이놈의 안목은 정말 놀라워.’

권재홍 비서실장은 살기가 가득한 최영란 이사의 시선을 의식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부분은 작년 기준으로 연간 천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반도체 시장의 6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메모리보다 더 크군.”

“그래서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메모리 영역이 아니라 비메모리 영역 쪽으로 넓혀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긴 그건 우리 아버지 꿈이기도 했지.”

최문경 부회장은 혼자 독백하듯이 말하면서 AD 설계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AD 설계의 임직원들은 자신이 와도 일에 깊이 빠져 있었다.

김영란 이사가 아예 따로 지시한 것 같았다.

“문제는 자본금이 만만치 않지?”

“초기 투자금은 최소한 천억 정도면 어렵지 않습니다. 대만 쪽이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데, 상당한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런가?”

최문경 부회장은 살기가 가득한 장녀 김영란 이사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AD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는 새삼 조카 최민혁 실장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죽으라고 욕만 했는데, 요즘 시간이 들어서 주변을 돌아보고서야 딱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내 뜻대로 밀어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샐로먼 브러더스 행동이 그 답이었다.

조카 최민혁과 치고받고 싸우면서 정작 아무런 일도 못 했다.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요즘은 최용욱 회장조차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이 그렇다고 최민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따가운 장녀의 시선을 뒤로한 채 AD 설계에서 나오다가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한 사람을 만났다.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지난 앙금을 잊어버렸다. 차라리 그 일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뭐, 오다가다가 보기도 했잖아. 그런데 몸 귀하신 분이 왜 날 찾아온 건가?”

데이비드 싱어는 힐끗 AD 설계의 건물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자신이 조사한 회사 중의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상념을 떨쳐 버렸다.

“아무래도 지난 일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왔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님이 지난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인제 와서?”

“네, 특히 지난 일에 대해서 데니스 샐로먼 이사님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이상하네.”

최문경 부회장은 데이비드 싱어의 사과를 아예 믿지 않았다. 그는 자존심밖에 없는 이 양키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눈치가 빨랐다.

“아, KM 전자 주가 때문에 말들이 많던데, 그것 때문인가?”

“아, 아닙니다. 사과해야 할 일을 했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쯧.”

최문경 부회장은 가소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은 또 아니었다.

“알았어. 그 사과, 받지.”

“감사합니다. 혹시 비메모리 반도체 영역 쪽에 관심이 많으면…….”

“아, 그건 그룹 내에서 알아서 할 생각이야. 정 돈이 부족하면 그쪽에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참고로 비메모리 쪽은 전문적인 인력과 장비 확보가 가장 핵심입니다. 실제로 필요한 전문 인력을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충고는 고마워.”

최문경 부회장은 데이비드 싱어와 간단하게 이야기만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는 차량 안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KM 전자 관련 기사를 확인했다.

“난리가 났군.”

-13% ~ 13%까지, 단 하루 만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주가 변동에 대해서 언론사는 사실은 물론이고 소설까지 쓰고 있었다.

그 내용이 얼마나 황당한지, 보면 볼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에 정부 조직까지 끼어들어서 사태를 더 키웠다.

정부 조직이 주식시장에 관여하면서 안 그래도 말이 많은 곳에 폭탄을 던진 꼴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그런데 종합주가지수는 오히려 폭등한 덕분에 딱히 정부 조직의 관여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은 곳이 있었다.

바로 샐로먼 브러더스다.

이들은 최민혁 실장을 타깃으로 삼아서 공격하다 보니, 선을 넘은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과 싸우다가 보면 이성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얘들이 정신을 놓은 건가? 아니면 최민혁 이놈에게 된통 당해서 미친 건가?’

“…민혁이 이놈이 인물은 인물이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미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오늘 있었던 KM 전자의 주가 정보를 보고받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전에…….”

“아, 괜찮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 자네보고 일 놓으라고 했잖아.”

“그래도…….”

최문경 부회장은 쿨하게 이번 일만큼은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인정했다.

“내 조카지만 대단한 놈이잖아. 그 대단한 샐로먼 브러더스를 상대로 이 쇼를 벌이다니.”

“그렇습니다. 데이비드 싱어 그 친구가 굳이 방문한 것도 이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봐야 알 수도 있는 법이니까.”

“어떻게 할까요? 데니스 샐로먼 이사와 다시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 괜찮아. 지금 생각해 보면 민혁이 이놈의 능력을 인정해 줘야 해. 따지고 보면, 나로서는 오히려 잘된 셈이니까.”

“하면…….”

“민혁이 그놈은 어디 있어?”

“잠시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다시 비서 팀에게 전화했는데, 최민혁 실장의 행적에 대한 보고는 바로 받을 수가 있었다.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응? 또 미국이야? 갑자기 왜? 아, 에플을 이용할 생각인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긴 에플 대주주이기도 하니, 만약 에플 가치가 오른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장사네. 한번 그쪽을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재미있네. 그나저나 민혁이 이놈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만드는구나.’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권재홍 비서실장이 급하게 정리한 보고서 내용을 한 번 쭉 읽어봤다.

그도 조카 최민혁을 상대할 때는 마치 말기암에 걸린 환자처럼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막상 그놈이 샐로먼 브러더스에게 한 방 먹인 것을 보자 속이 다 시원했다.

‘이게 사이다인가? 그나저나 이놈은 미국에서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것일까?’

* * *

최민혁은 최병연 소장과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한국 종합주가지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실로 어이가 없었다.

‘이 인간들이 미쳤구나.’

종합주가지수 변동 폭을 보면서 최민혁은 다소 당황했다.

‘이건 너무 심한데?’

KM 전자 주가는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작전주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공매도하든, 주식을 사든 다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보면 샐로먼 브러더스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단기 차익에 따른 주가 변동 과정에서 하락폭이 심할 때 기관이나 개인이 꽤 많이 들어왔다.

즉 사고 팔고를 반복하면서 그 차익을 제법 챙긴 것이다.

이것만 봐도 이번 작업에 투입된 샐러먼 브러더스의 트레이드가 얼마나 놀라운 실력을 갖췄는지 잘 보여주었다.

최민혁도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종합주가지수 변동 폭을 보면서 이 현상이 IMF 시기에 급등락을 반복하는 종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결국 IMF 시에 한국을 흔든 주범 중의 하나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아니야. 샐로먼 브러더스가 주범이라고 하기는 힘들어. 당시에 안 낀 세력은 없겠지. 한국을 뜯어먹기 딱 좋은 시기이니까.’

딱히 최민혁은 샐로먼 브러더스가 IMF를 일으켰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최문경 부회장의 배후라는 점이다.

‘이들이 태도를 바꾸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최문경 부회장을 택한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욕망, 탄탄한 정치 로비 능력, 기본 실력도 제법 되고, 타협하기에도 좋지. 특히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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