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김상구 회장은 겉으로는 자신을 인정한 것 같았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아니었다.
그리고 김희찬 부사장은 경고했다.
“물론 네가 최민혁 실장과 싸우면서 경험을 꽤 쌓은 것은 안다. 그렇다고 네 독단적으로 뭔가 결정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을 잊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테니까!”
“…….”
김현탁 본부장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놀랍게도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다.
‘황당하네.’
하지만 이런 일의 근원이 김상구 회장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직도 김상구 회장이 DL 그룹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늘 비웃었던 작은아버지 김용만 전무가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최훈열 전무의 아내인 김여정도 말이다. 김여정이 굳이 DL 그룹을 포기하고, 최훈열 전무와 정략결혼 한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김현탁 본부장은 새삼 자신의 엿 같은 환경에 모멸감을 느끼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차라리 민혁 그놈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한번 제대로 엿 먹이는 것을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 * *
김현탁 본부장의 염원은 그냥 단순한 기대로 끝나지 않았다.
DL 그룹이 한국 대기업 특성 중의 하나인 느린 의사 결정 때문에 미적거리는 순간에도 에플 주가는 2.3달러를 돌파해 버린 것이었다.
“하.”
김현탁 본부장은 크게 당황했다. 도대체 에플 주가의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스티븐이 나와서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해도 이런 주가 흐름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미국의 그 어떤 기업도 언론플레이를 한다고 해서 주가가 계속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현탁 본부장의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은 뜻밖에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식은 단기로 오를 수가 있어. 이에 일회일비를 할 필요는 없다.”
김현탁 본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김희찬 부사장에게 툴툴거렸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지시를 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회장님이 지시했다고 해도 서두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2.3 달러면 너무 높아. 지금은 지켜봐야 한다.”
“그렇습니까?”
“에플 주가가 일시적으로 작전 세력에 의해서 오를 수는 있어도 그게 지속될 수는 없다. 에플의 미래 가치를 떠받쳐 줄 물건이 없어!”
“지난주에 나온 스티븐의 타임지 인터뷰를 보면 준비해 둔 비밀 무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있을 수도 있지. 에플이 작은 회사도 아닌데, 신제품이 왜 없겠느냐. 하지만 지금까지 그 신제품들이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최근 에플의 5년간 매출은 설명이 안 된다.”
“결국 스티븐도 실패할 것이라 말씀이군요.”
“에플의 10년 주가가 그 증거다. 에플은 이미 수술조차 하기 힘든 단계의 환자다!”
“그렇습니까?”
김희찬 부사장의 말에 김현탁 본부장 자신이 한 이야기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할아버지가 있을 때 그저 적당히 공감하는 척만 했구나.’
그는 솔직히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보면 숨이 막혀서 더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에플 주가가 계속 폭등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그의 바람대로 에플 주가는 여전히 계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근 10년 만에 처음 있는 에플 최고가였다.
김희찬 부사장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김현탁 본부장의 태도 때문에 결국 입을 열었다.
“단기로 들어와 있는 금융이 우리 DL 화재에도 큰 부담이다. 0.4 달러 에플 주가라면 모르지만 2달러 이상의 에플 주가는 사들일 시기가 아니다. 만약 에플 주가가 폭락해서 1년 정도 저점을 다진다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 분석은 에플 매출을 기준으로 삼아서 정량적인 해석에 따른 전략 기획실의 분석 결과다.”
“…알겠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입맛을 다시면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단기자금은 그저 핑계라고 생각했다. 괜히 나대다가 아버지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쉽네. 이번은 기회라는 느낌이 확실한데 말이야.’
그는 단기 일본 금융 자본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 최민혁 실장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해서 샅샅이 DL 그룹을 살폈지만, 이 부분은 간과했다. 현금 유동성이 좋은 DL 그룹이 설마 1년 후에 단기자금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었다.
더욱이 김현탁 본부장은 이번에도 최민혁 실장이 결코 실패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차라리 자기 돈으로 에플 주식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돈이 문제인데…….’
* * *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이나 최두진 사장의 묻지 마 에플 주식 매입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하는 에플 투자는 과거 자신에게 배운 경험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하긴 손해를 많이 봤지.’
그리고 굳이 자신들이 알아서 에플 주식을 사겠다고 하는데, 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DL 그룹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는 스티븐을 이용해서 최대한 에플 주가를 흔들어 보았다.
예상대로 DL 그룹은 에플 주식에 대해서는 관망세를 취했다.
‘하긴 2.2 달러면 너무 많이 올랐지.’
0.4 달러 기준으로 본다면 무려 5배나 오른 셈이다.
자신은 에플 지분 40%를 10억 달러에 사들였으니.
단순 에플 지분 자산 가치만 놓고 보면 이제 무려 50억 달러였다.
‘하, 돈 벌기가 정말 쉬워.’
물론 어디까지 숫자에 불과했다.
에플 대주주인 입장에서 에플 주식을 매각할 수는 없으니까.
‘뭐, 우영민 부장이 알아서 잘하겠지. 이번 에플 주가 폭등으로 단기 수익도 꽤 클 테니.’
하지만 최민혁은 결코 DL 그룹이 에플의 주가로 재미를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DL 그룹을 면밀하게 감시했다.
“특히 김현탁 본부장을 중심으로 지켜보세요. 움직인다면 그가 제일 가능성이 높아요. 김희찬 부사장은 신중해서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김상구 회장은 김희찬 부사장을 믿기에 일단 지켜만 볼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최민혁 실장의 예측은 정확하게 떨어졌다.
사전에 몰랐다면 알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DL 그룹 계열사인 DL 자동차 보험이 다섯 차례에 걸쳐서 무려 200억 규모의 자사주 펀드에 가입했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불과 일주일 사이에 DL 자동차 보험 주식을 무려 6%나 팔아 치웠다.
증여 시점에 주가가 고작 3천 원. 매각 대금은 2만 원이 넘었다. 무려 7배가 넘는 차익 실현을 했는데, 무려 100억 가까운 차익을 벌었다.
주가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대주주가 주식을 처분해서 엄청난 이익을 본 일로, 전형적인 내부자 거래였다.
“흠.”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이 가져온 내부자 거래의 정석 자료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차명을 쓰기는 했지만, 곳곳에 증거가 남았다.
“내부자 거래를 할 거면 차라리 들통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최민혁의 지시대로 김현탁 본부장의 동향을 주시했던 김명준 과장은 다행히 이 일이 왜 이루어졌는지 알았다.
“…아무래도 미국에 투자하려고 급히 자금을 만든 것 같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이 무슨 미국에 투자… 설마 에플 지분을 사들이려고 이 짓을 한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큰돈이 김현탁 본부장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최민혁은 영문을 몰랐다. 김현탁 본부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희찬 부사장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인데, 신기하네요.”
“아무래도 DL 그룹 시선이 우리 쪽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까? 김현탁 본부장이 설마 자신이 가진 지분 일부를 매각할 거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알아도 모른 척할 수도 있겠군요.”
“네?”
“아, 아니에요. 뭐 욕심 때문에 정신이 나가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 이 정보 좋네요. 당분간 DL 그룹을 흔들 대안으로 괜찮아요.”
“…남부지검 증권 수사 팀에 제보할까요?”
“그러세요. 아, 이왕이면 우리 박두영 부장검사님을 통해서 정보가 가도록 하세요. 이번 일로 우리 박두영 부장검사님이 더 주목을 받을 테니. 다만 우리가 DL 그룹 눈에 띄어서는 곤란합니다. 아직은 노골적으로 DL 그룹을 건드릴 시기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문득 앞으로 DL 그룹을 더 건드리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 최민혁의 말에 질문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또 다른 꼼수라도 있는 걸까?’
* * *
박두영 부장검사는 현관 앞에 놓인 서류 가방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다만 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김명준 과장이 가볍게 인사한 후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일이지?’
그는 자신이 받은 자료를 보기가 부담스러웠다.
이제 최민혁 실장은 과거의 그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
이번 시사 초대석 사건 이후에 최민혁 실장의 인기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에플 인수 후에 에플 주가가 무려 2.3 달러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뉴스보다 더 충격적인 결과가 바로 이 에플의 주가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에플 인수를 대한민국 전 국민이 반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에플 주가가 폭등했다.
10년 동안 0.3 달러를 행보했던 에플 주가가 이런 현상을 보인 것은 누가 봐도 잘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요즘 TV를 틀었다 하면 나오는 뉴스도 전부 이 에플 뉴스였다.
[…하면 갑작스러운 에플 주가의 폭등 원인에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최근 미국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내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다른 채널은 에플 인수설과 관련된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시사 초대석에서 나온 이야기 역시 에플 주가의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증권 전문가까지 초청해서 10년 내의 에플 주가 흐름을 하나씩 설명했다.
“아, 정말 뭐야!”
그녀가 분노한 것은 이 시사 초대석 때문에 그녀가 즐겨 보는 막장 드라마가 휴방을 했기 때문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분노한 아내를 보자 자기 스스로 상의를 벗어서 옷장에 걸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내가 일어나서 그의 옷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쳐다보았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거 업무 서류.”
“당신, 설마 집에까지 가져와서 일을 하려는 거예요?!”
“아냐. 내가 볼 서류 아니라니까.”
“당신 담당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그는 마치 보란 듯이 아내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내는 박두영 부장검사 말을 믿지 않았다. 서류 가방을 열어서 확인했다.
“증권 사건이구나.”
그녀는 뒤늦게야 피식 웃었다. 증권 쪽은 남편 담당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는 달랐다. 그는 자기 담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서류를 받아서 대충 살펴보았다. DL 그룹의 내부자 거래 증거였다.
“흠.”
그도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그 당사자가 김현탁 본부장이라는 것을 알자 쓰게 웃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과 DL 그룹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검찰 요직에 있는 검사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좋을 수가 없지. 최훈열 전무 배후가 DL 그룹이니까. 이들이 하려고 했던 것도 최민혁을 끌어내려서 KM 전자를 먹으려던 거였으니까.’
이제는 중앙지검 내부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서류는 또 다른 최민혁 실장의 보복이었다.
하지만 그도 뒤늦게야 아내가 돌린 또 다른 채널에서 ‘에플 주가 폭등’을 다룬 뉴스를 보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것 때문이었군.’
* * *
남부지검 증권 수사 팀 박상희 부부장은 갑자기 찾아온 박두영 부장검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쑥 내미는 서류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 혀를 내둘렀다.
“김현탁 본부장, 이 친구가 또 사고 쳤네.”
“살인 교사죄가 혐의 없음으로 끝났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은데, 아마 욕망을 못 이긴 것 같아.”
“재벌 3세가 이러는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잖아.”
“증거가 너무 명확해서 잡아넣기는 어렵지 않을 거다.”
그는 피식 웃었다.
“선배가 어쩐 일로 잘 요리된 음식을 넘긴 거야?”
박두영 부장검사도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