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29화 (429/1,021)

#429.

조성돈 팀장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배종대 과장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 다른 팀원은 다들 KMP-02에 빠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도 않았다.

“…….”

박광민 사원 역시 두 사람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주 넋을 잃은 표정으로 KMP-02에 글씨를 써봤다.

마치 연필로 노트에 필기하는 듯한 즉각적인 반응은 실로 믿을 수가 없는 결과물이었다.

뉴튼의 메시지 패드와는 격 자체가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K투스를 이용한 이어잭이다.

그 환상적인 음질은 유선 이어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K투스는 문형섭 부사장님이 직접 주도해서 진행한 일이야.”

“문형섭 부사장님이 직접 관여했다는 말입니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단순히 이어잭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응용이 가능해.”

“…그렇군요.”

기획 팀은 다들 혀를 내두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왠지 프로젝트에서 자신들이 소외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머릿속이 복잡한 팀원들의 얼굴을 보면서 툴툴거렸다. 그는 차 열쇠를 꺼내서 KMP-02 표면을 빡빡 긁었다.

“겉에 유리는 켐코 사업부에서 과거 만들어 둔 글라스를 사용했어. 경도가 높아서 지금처럼 차 키로 긁어도 흠집이 나지 않아.”

“……!”

‘켐코’ 유리란 말에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배종대 과장이 소리쳤다.

“설마 켐코 사업부를 인수한 것이 이 용도였습니까?”

“그래.”

“하지만 이건 좀 심합니다. 우리 기획 팀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개발 팀에서 먼저 이런 결과물을 만든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씁쓸했다.

“여기에 들어간 기술이 서로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욱이 보안 문제도 있어. 정보가 새 나가면서 당장 문제가 될 일이니까.”

배종대 과장 역시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기획 팀이 모르는 부분이 꽤 있었다. 그게 진짜 문제였다.

“그래도 사전에 언급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배 과장 자네 마음은 알아. 나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검토를 해보면 알겠지만 당장 와컴 기술만 해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해.”

와컴과 협상 중에 와컴이 만약 이 정보를 알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다른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IPS LCD만 해도 오성 전자와 LC 전자가 서로 견제를 하는 상황이다.

굳이 이런 차세대 제품의 정보가 그들에게 흘러간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결국 중요한 보안 정보는 기획 팀에서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획 팀이 이해하려고 해도 자신들이 이 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했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 기획 팀이 관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개발 팀이 우리에게 개발 현황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따로 작업하다니!”

최병연 이사는 과거 콜린스 개발 때 삽질한 경험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배종대 과장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은 따로 보고를 받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힐끗 KMP-02를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충 분위기는 굳이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이 KMP-02를 사용해 보고 난 후에 다음 주까지 개선할 점을 보고하게.”

“…….”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데, 이 KMP-02에 사용된 기술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대략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막상 그 결과물을 보자 다들 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기획 팀에서 계속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이 결과물만 놓고 보면 진행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었다.

‘…차세대 제품 윤곽은 보였지만, 설마 결과물이 벌써 나왔었다니. 가만, 맙소사 최 실장님의 목적이 이거였구나.’

* * *

박광민 사원은 회의실을 나와서 KMP-02 표면을 커터 칼로 긁어 보았다. 역시나 긁힌 자국이 전혀 남지 않았다.

“…정말 끝내주는구나.”

배종대 과장은 의자를 돌려 앉은 채로 박광민 사원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박 사원도 꽤 놀랐나 보네.”

“다, 당연하죠. 설마 여기에 켐코 글라스가 사용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그렇지.”

그 역시 이번 KMP-02 시제품을 보면서 매우 놀랐다.

다른 것을 떠나서 IPS-LCD가 이런 용도로 사용될 줄은 몰랐다.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가 올린 보고서를 다시 살피면서 탄식했다. 그 역시 이 보고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차세대 제품의 결과물과 직접 관련된 것을 보자 큰 충격을 받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었다.

기획 팀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연구소가 자발적으로 먼저 움직인 것 때문이다.

큰 줄기를 정한 것은 역시 조성돈 팀장과 최병연 이사였다.

“정말 열심히 해야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필요 없는 사람이 될지 모르니까.”

“……!”

박광민 사원은 그 말에 깜짝 놀랐고, 그건 다른 기획 팀원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굳은 안색을 한 채 자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고도 단 한 사람 퇴근하는 이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도.

새벽 1시가 넘어서 조성돈 팀장이 사온 간식을 먹으면서도 다들 자리를 지켰다.

박광민 사원은 피곤해서 정말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매사에 부정적인 정영일조차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야, 정 대리, 이 인간은 그냥 칼같이 집에 가버리는구나.”

‘정 대리님은 벌써 퇴근한 거야?’

피로에 절어 있는 다른 기획 팀원들은 다들 입맛을 다시면서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정성근 대리가 밤늦게까지 일하면 그게 더 스트레스였다.

박광민 사원은 잠이 오는 것을 참은 채 억지로 계속 KMP-02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가 그런 중에 찾은 것은 바로 정성근 대리 보고서의 첨부 자료였다.

그 자료는 지난주 날짜로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이게 뭐지?’

바로 크레이그 행크스가 올린 보고서였다.

-KMP-02 적용 OS 특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NextOS에서 유사한 특허를 올렸는데, 유사점이 많습니다.

박광민 사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메일을 크레이그 행크스에 보냈는데,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제가 NextOS에 있을 때, 팀장의 지시를 받아서 모바일 NextOS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젝트 자체는 2년 정도 되었습니다.]

다만 NextOS 경영 상태가 나빠지면서 이 프로젝트는 중지되었다.

KMP-01에 사용된 OS가 바로 이 기획안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크레이그, 스콧, 베트랑드가 쉽게 KMP-01 OS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들 세 사람은 이미 폐기된 프로젝트이고, 차이점이 많아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NextOS에서 갑자기 특허를 출원한 것이었다.

그건 마치 최민혁 실장이 와컴을 죽이기 위해 특허 3,000건을 출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티, 팀장님, 아무래도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배종대 과장이 커피를 들고 걷다가 끼어들었다.

“광민 씨, 뭔데? 너무 피곤하면 그냥 일찍 들어가는 것이 어때…….”

하지만 배종대 과장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 박광민이 프린트한 내용물을 살피다가 조성돈 팀장에게 소리쳤다.

“조 팀장님, 이거 아무래도 한번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조성돈 팀장이 뒤늦게 업데이트 항목을 살핀 후에 곧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강준석 대리에게 답변은 바로 왔다.

그는 국제 전화를 걸어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한 후에 박광민 사원을 쳐다보았다.

“박 사원, 고생했어.”

“아, 아닙니다.”

박광민 사원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제대로 한 건 올렸다고 확신했다.

‘돼, 됐다.’

하지만 다른 팀원 안색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다들 오늘 퇴근이 어렵다는 것을 곧 깨달은 것이었다.

* * *

최민혁도 최근 KM 전자 분위기가 빡빡하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그가 딱히 회사 임직원을 직접 압박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성과 때문에 다들 큰 부담을 느낀 것이다.

더욱이 와컴 지분 인수 이후에 KM 전자 분위기는 한결 더 치열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과를 내지 않으면, 후임에 뒤처질 수 있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강준석 대리가 그 좋은 예다.

신입 사원 교육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는데, 결국 미국 벨린 소프트 지사에 가 있었다.

승진과 더블어서 누구나 원하는 미국에서의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즉 길은 이제 누구에나 열려 있었다.

자신이 성과만 낸다면 당장 워싱턴에 가서 일할 수도 있었다. 비록 국내 본사에 안정적인 사내 복지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 매달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새벽 2시, 3시까지 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들 좋아서 일하는데,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습니다.”

“글쎄요.”

최민혁은 잠을 제대로 못 자셔 피부가 푸석푸석한 조성돈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팀장답게 밑에 직원이 늦게까지 일을 하니, 같이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압박한 건가? 하지만 기획 팀에게 모든 정보를 다 공개하기에도 애매하니까. 알아서 잘 따라오기는 하지만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나 보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획 팀이 이 KMP-02 관련 정보를 다 안다면 당연히 맡겨야 할 일이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대부분은 최민혁 자신이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중이다.

그 일 하나하나를 기획 팀에게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그럭저럭 따라오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번처럼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을 사전에 검토하기를 바랐다.

“NextOS에서 특허를 출시했다는 말이군요.”

“이게 가볍게 볼 수가 없습니다. 크레이그 행크스 말에 따르면 그 자신도 이 특허가 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특허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이미 출원한 특허의 10%정도는 걸쳐 있다. 스티븐이 태클을 건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그건 맞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네요. 특허 출원 날짜가 크레이그가 NextOS에서 그만둔 지 일주일 후였네요.”

“그 부분은 크레이그조차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자신이 NextOS에 있을 때만 해도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크레이그가 회사를 떠난 후에 관심을 뒀나 보네요.”

“네? 그 말씀은…….”

“아무래도 NextOS 윗선에서 끼어든 것 같네요.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제가 알기로 NextOS의 CEO인 스티븐밖에 없습니다.”

“스티븐이라면, 설마 에플의 창업자인 그 스티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크게 당황하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본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는 절대로 스티븐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기 싫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런데 스티븐은 확실히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미국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상대로 스티븐이 나쁘지는 않았어. 에플 복귀를 밀어줘서 아군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골치 아파졌네.’

“아무래도 우 부장 통해서 스티븐의 행보를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다만 조성돈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스티븐과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제가 알기로 에플에서 쫓겨난 후에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열심히 부활의 나래를 펴고 있죠. 아마 스티븐은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과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스티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에플 창업자라서가 아니라 강준석, 정성돈 대리 보고서를 보면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낸 성과가 스티븐과 알게 모르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스티븐이라…….’

* * *

회의실에 다시 모인 기획 팀 배종대 과장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소리쳤다.

“에플 창업자인 그 스티븐 말입니까?”

“그래.”

“와, 이거 진담입니까? 아니, 거기에 스티븐이 왜 나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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