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27화 (427/1,021)

#427.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서 터지면서 한국 신라 호텔 회견장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곳을 찾아온 언론사 기자는 다들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파악했기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그 와컴이 정말 KM 전자의 투자를 받아들이다니.]

[와컴은 히타치 공작소 같은 일본 대기업보다 폐쇄적이라고 알려졌는데, 믿기지 않아.]

[최민혁 실장이 또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까? 난 협박을 했다는 데 한 표!]

[하긴 최 실장이 좋게 좋게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역시 그 특허가 문제였어.]

[이번에 스마트 펜 관련 특허가 와컴에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지. 내가 와컴 사장이라도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거야.]

소란스러운 기자들 사이에서 범용구 기자 역시 다과를 먹으면서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최광수 기자는 놀랄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대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상 위에 KM 전자의 오영근 사장과 와컴의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 올라왔다. 그들은 기자들 앞에서 서로 밝은 얼굴을 한 채 이번 협상의 최종 계약서에 서명했다.

와컴 지분 40%를 고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2억 달러에 넘기는 일이다. 물론 계약서상에는 특허 사용에 대한 항목과 경영 간섭에 대한 일부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KM 전자는 기존에 와컴이 해왔던 경영에 대해서는 불간섭 원칙을 밝혔다. 다만 모바일 제품에 한해서만큼은 예외였다.

계약서 서명이 끝나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미친 듯이 타올랐다.

오영근 사장과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서로 친한 친구처럼 악수를 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범용구 기자는 아쉬운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늘 협상의 주인공이 최민혁 실장인데, 아예 보이지 않네요.”

최광수 기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이번 협상과 관련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 같았다.

다행히 협상장 문 입구에 최민혁 실장이 잠깐 보였다.

두 사람은 번개같이 돌아서는 최민혁 실장을 향해서 달렸다.

다른 기자 수십 명 역시 뒤늦게 최민혁 실장을 발견해서 같이 달렸다.

최민혁은 협상장 현장을 확인만 하고 돌아서는 찰나에 수십 명의 기자가 몰려드는 것에 질색했다.

김명준 과장을 비롯한 수행원이 다급하게 기자를 향해서 장벽을 쳤다.

범용구 기자가 버럭 소리쳤다.

[실장님,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최소한 공인이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대답을 해주십시오!!]

쩌렁쩌렁 울리는 범 기자의 말이 그 시작이었다.

40명의 기자가 동시에 최민혁 실장을 향해서 같이 외쳤다.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최민혁도 열화와도 같은 한국 기자의 모습에 결국 멈추고 말았다. 사실 이제부터는 신비주의로 계속 갈 수는 없었다.

‘뭐,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이제 9부 능선을 넘은 마당에 굳이 숨겨서 진행할 상황은 아니니까.’

-질문 3가지만 받겠습니다.

기자들은 다들 움찔했다. 그들은 예상 밖의 최민혁 실장 반응에 당황했다. 다만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것이 있어서 갈등했다.

막상 최민혁 실장이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하자 뭘 물어봐야 할지 크게 당황했다.

범용구 기자가 잽싸게 나섰다.

[제가 듣기로 오성가의 막내딸인 안지연을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오성 가문과 KM 그룹이 서로 한 가족이 되는 겁니까?]

[만난 적은 있습니다. 다음 질문?]

간단한 대답에 40명의 기자들은 동시에 범용구 기자를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까운 질문 3가지 중의 하나가 날아갔기 때문이다.

‘젠장.’

최광수 기자가 그 틈을 이용해서 슬그머니 나서고 말았다.

[한영 일보의 최광수 기자입니다. 와컴을 인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차세대 제품 때문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씨발’, ‘거지같네’, ‘빌어먹을’과 같은 욕설 소리가 난무했다.

최민혁 실장은 최근 언론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인터뷰 기회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요한 기회가 두 가지나 날아갔으니.

기자들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다들 머리를 싸매고, 질문할 것을 떠올렸다.

심지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다음 질문을 고민했다.

범용구 기자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슬쩍 끼어들었다.

[요즘 들어서 통 TV 사업부 매각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최민혁 실장님은 이 사업 매각을 깜빡하신 겁니까?]

[콜린스 사업 매각은 이사회 내부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확정된 사실은 없습니다. 설사 결론이 난다고 해도 콜린스 매각은 워낙에 덩치가 커서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이것으로 질문은 끝마치겠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두 사람을 일별하고는 준비된 차량에 올라탔다.

뒤늦게 몰려온 60명의 기자는 멍한 표정으로 떠나는 최민혁의 차량을 보고 난 후에 범용구 기자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던 범용구 기자는 잽싸게 가장 먼저 도망쳤다.

하지만 눈치가 느린 최광수 기자는 결국 기자들에게 붙들려서 매타작을 당하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난 질문을 했을 뿐이야!”

“이 개새끼야, 죽어라!!”

* * *

와컴 지분의 매각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일반 시민이 느끼는 가장 큰 부분은 역시 2억 달러에 불과한 지분 인수 대금이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와컴의 40% 지분 가치가 2억 달러는 넘기 때문이다.

대충 나오는 이야기가 3~4억 달러 선이다.

뒤늦게 K투스를 비롯한 몇 가지 발전된 기술이 제공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다들 수긍했다.

와컴은 이 기술을 이용하면 고만고만한 1, 2세대가 아니라 3세대 신제품을 내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와컴 성장이 그만큼 더 빨라진다는 의미다.

거기에 KM 전자가 와컴 기술을 이용해서 내놓을 차기작의 가치도 주목을 받았다.

최민혁의 행보를 지켜보던 김현탁 본부장이 이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KM 그룹과 DL 그룹이 합작한 KD LCD 설립 때문에 정신이 없는 틈에 이루어진 일에 기가 찼다.

“최 실장 이 인간은 정말 대단하구나.”

“…….”

박태정 차장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을 정리해서 보고한 것만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두 회사 간에 일어난 정황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질문하다가 곧 탄식하고 말았다.

“오성 전자는 왜 이 일을 그냥… 아, IPS LCD 때문이구나.”

그 역시 VA 패널과 관련된 자잘한 문제를 정리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는 일이 너무 많았다. 김호동 박사가 준 자료는 꽤 중요했다. 문제는 그 자료가 단순히 연구용이라는 점이다.

상업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일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니, 잘 믿기지가 않아. 우리 김용만 전무님은 뭘 하고 있대,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네. 조용합니다.”

“쯧.”

김현탁 본부장은 내심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당장에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최민혁 실장이 부담스러워 다른 이들이 나서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심지어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조차 요즘은 뒤로 물러나 버렸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움직인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거도 그냥 소문이었어?”

“그쪽은 최민혁 실장 일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고 합니다.”

“정말? 오성 전략실이 최민혁 실장에게 손을 들었다고?”

“최근 IPS LCD 시제품이 PDP 패널보다 더 상업적으로 좋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아예 지켜만 봅니다.”

“아, PDP 패널이라, 그렇겠네. 거기에 투자한 돈만 해도 수천억은 기본이니까.”

오성 전자가 PDP 패널에 투자한 돈은 천문학적이었다.

아마 LCD 패널 시장이 빠르게 성장한다면 오성 그룹은 내부 문제부터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PDP 패널 사업을 포기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김현탁 본부장도 PDP 패널 전략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오성 그룹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차 하는 실수 한 번에 수천억이 그냥 훅 하고 날아가고 만다.

이 미묘한 시기에 최민혁 실장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자살골인 셈이다.

그런데 문득 자신조차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긴 우린 VA 패널 때문에 정신이 나가 있으니.’

김현탁 본부장은 푸념을 털어놓았다.

“세상이 너무 최민혁 실장 그 인간만을 편애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 이건 정말 너무 불공평해!”

“…….”

하지만 박태정 차장은 김현탁 본부장 이야기에 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사건 같은 경우에는 최민혁 실장이 철저하게 판을 깔아놓고, 일을 밀어붙였다고 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도 김현탁 본부장이 폭발할 것 같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릅니다. 최민혁 실장이 저렇게 날뛰는데, 견제할 이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누군가 나설 겁니까.”

“그렇지? 맞아, 그래야지. 틀림없이 최 실장 저놈을 끌어내리는 자가 있을 거야!”

* * *

김현탁 본부장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당장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압박하거나 하는 이가 없었다.

그중에 한 세력인 한국 언론은 KM 전자의 와컴 지분의 인수를 한동안 계속 다루었다.

덕분에 최민혁 실장 명성이 이제는 서서히 물 위로 떠올랐다.

과거에도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꽤 알려졌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당장 정부 기관에서도 최민혁 실장을 최용욱 회장의 손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인물로 지켜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장 박두영 부장검사 역시 이전처럼 가볍게 최민혁 실장을 만날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비밀리에 최민혁을 만났지만, 그 당시엔 주변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파파라치 사진조차 신경을 써야 했다.

따라서 공개적인 장소는 아예 피했다.

그가 택한 장소는 중앙지검에서 멀지 않은 한 식당이다.

회식을 핑계로 이 자리를 택했는데, 최민혁 실장과 접촉한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들어와서는 문을 잠갔다.

최민혁은 이미 손을 씻고 있었는데, 화장실 거울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박 부장검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박두영 부장검사도 손을 씻는 척하면서 화장실 내부를 다시 살폈다. 다행히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피로에 지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 실장님은 여전하십니다.”

“제가요?”

“하루도 조용히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름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봤습니다.”

“아, 기자회견 말입니까.”

“인기가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습니다.”

“하하하, 별일 아닙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기자들 모습을 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자들 모습이야 늘 그렇습니다.”

최민혁은 가벼운 이야기로 박두영 부장검사와 안부를 전했다. 다만 오늘 이 자리를 청한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내사는 어떻습니까?”

“깨끗합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을 시켜서 우리 둘째 큰아버지와 만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마 비자금 때문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밝혀진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 부분은 다시 조사를 해봤는데, 증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있던 몇몇 법인은 이미 폐업을 한 상황입니다.”

“그런가요?”

“더욱이 비자금을 처리하는 과정 자체에서 차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설사 증거를 찾는다고 해도 최문경 부회장과 연결 고리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부분을 따로 수사하고는 있지만,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박두영 부장판사는 ‘물론 그것까지 확인한다고 해도 외부 압력 때문에 수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박두영 부장검사가 언급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새삼 혀를 내둘렀다. 최문경 부회장이 허술하게 일 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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