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03화 (403/1,021)

#403.

최용욱 회장이 이제까지 쌓은 관록이 있는데, KM 그룹 내에 도는 소문의 출처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증거는 없다.

‘문경이 이놈 짓이겠지.’

황당한 일이었다.

IPS LCD 사태를 해결한다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중에 생긴 일이다.

최문경 부회장이 자신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다만 그 역시 이번 일에 한해서만큼은 최문경 부회장을 탓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은 결국 KM 그룹이 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굳이 남 좋은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최용욱 회장은 딱히 이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다만 장승일 실장은 입장이 달랐는데, IPS LCD 계열사 설립에 대한 소문을 조사해야 했다.

그런데 소문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출처가 권재홍 비서실장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보다는 최용욱 회장의 내심을 읽어서 관련 안건을 입체적으로 조사해서 보고했다.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의 절묘한 보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소문의 내용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IPS LCD 양산만 성공한다면, 오성 전자와 LC 전자와 경쟁할 수 있다고?”

“검토 결과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KM 산업, KM 건설에 이은 새로운 핵심 계열사가 가능합니다. 다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오성 전자나 LC 전자가 그냥 가만히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 오성 그룹의 안건민 회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두 그룹이 대립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KM 전자가 있기는 하지만 겹치는 것은 고작 TV 사업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TV 사업은 이미 대립 관계에 있던 품목이었다.

거기서 만약 KM 그룹이 LCD 계열사를 새로 설립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PDP 패널을 밀고 있는 오성 전자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이걸 잘 알아도 최문경 부회장의 미끼를 쉽게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IPS LCD 패널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포기하기 힘든 사업이잖아. 더욱이 실패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야. 장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장승일 실장은 머뭇거렸다. 이번 일은 최문경 부회장 짓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의 판단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갔다.

“하지만 리스크 역시 큽니다. 특히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기간입니다. LCD 패널 양산을 위해서 인력도 뽑고, 공장도 설립하려면 2~3년은 족히 잡아야 합니다.”

그랬다.

IPS 신사업을 시작하면 막대한 자금이 새로운 사업에 묶여 버린다. 앞으로 KM 그룹 자금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차입금을 들어 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시나리오는 이전의 패턴과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정말 이 기회가 아까웠다. 기술, 자본, 인력이 다 있는데, 이런 사업을 하지 말자니. 그는 결국 KM 그룹 구조조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우리 한국 경제에 위기가 오기는 올까? 솔직히 다른 그룹에서 우리 회사의 지나친 구조조정을 보고 말들이 많아.”

말들이 많은 정도가 아니다.

다른 대기업들은 은행 빚을 산더미처럼 내서 사업 규모를 확장 중이다.

그런데 유독 KM 그룹만이 사업을 축소하고, 부실기업을 정리 중이었다.

모든 한국 대기업이 난리를 치는데, 유독 혼자 숨어서 체질 개선을 하고 있으니.

최용욱 회장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금감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받아야 하나?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도대체 KM 그룹 내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그래?!”

장승일 실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지만, 최민혁의 지시는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쉽게 말해서 불안을 조성하는 일이다.

“…크게 신경을 쓸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야. 금감원에서 따로 조사를 진행 중이야. 특히 X 리포트와 관련된 안건에 대해서는 다시 원점에서 검토 중이야.”

“설마 그걸 믿는다는 말입니까?”

“최근 지방 경제가 안 좋잖아. 돈줄이 막히니, 아무래도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아. 그런데 아무도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X 리포트만큼은 달랐으니까. 그리고 우리 KM 그룹 구조조정이 때맞춰 일어났잖아.”

장승일 실장은 전혀 예상도 못 한 이야기에 눈을 끔뻑였다.

“정부 공무원이 그렇게 능동적이라니, 조금 놀랐습니다.”

“아, 물론 대다수는 아니야. 그런데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도 필요하잖아. 형식적이라고 해도 조사는 할 필요가 있어. 이런 상황에서 유독 우리 KM 그룹만 난리를 치니, 따로 확인해 본 거야.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 위기 우려는 과도하다는 것이 몇 번에 걸친 검토 결과야.”

“…….”

겉으로는 장승일 실장도 최용욱 회장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서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야기다.

‘벌써 여유가 생겼다고 딴생각을 하는구나.’

KM 그룹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규모가 큰 부실 계열사를 다 속아냈다. 노조 협의 이후에 점진적으로 인력을 재편하면서 KM 그룹 계열사도 하나씩 살아났다.

대표적인 예로 KM 인스트루먼트는 불필요한 사업을 다 정리한 후에 반도체 정비에만 집중했다. 그 덕분에 전년 대비 매출은 7% 줄었지만, 영업이익이나 순이익은 250% 가까이 늘어났다.

이런 계열사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긴 계열사는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다.

KM 그룹 재정 상황이 건실해지자 여러 곳에서 말들이 나왔다.

굳이 무리하게 구조조정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투자를 늘려서 이 성장세를 이어가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주장 대부분은 공허한 주장에 불과했다.

실제 신사업 성공률만 본다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꼭 그렇지 않은 계열사도 있다.

“AD 설계 매출이 눈부시게 늘어나고 있잖아. 모든 계열사 주장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어.”

“하지만 AD 설계는 다른 계열사와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님의 조언을 받아서 내실을 다진 기업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계열사는 왜 그렇게 못 한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짓나?”

“…….”

장승일 실장은 차마 최용욱 회장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최근 IPS LCD 사태 이후에 이곳저곳에서 압박을 받던 최용욱 회장은 뭔가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딱히 저걸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모든 일의 근원은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IPS 신사업은 같은 연장선이다. 이미 어느 정도 상업화 막바지 단계에 도달한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기술 소유자도 KM 전자였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을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다른 카드를 꺼냈다.

“…최민혁 실장님과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 민혁이 말이다. 내가 지난 일도 있는데, 내 제안마저 거절하겠나? 이번 일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나도 자금을 대겠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봐, 장 실장, 우리 솔직히 이야기해 봐. 이제 급한 불은 모두 껐잖아. 그렇다면 그룹 미래를 위한 이야기를 해야 할 단계야. 문경이 그놈이 꾸미는 꼼수이기는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는 없어.”

“…네.”

장승일 실장도 더 반발하지는 않았다. 원론적인 이야기로는 맞다. 다만 그 신사업이 과연 성공할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니, 손실은 보지 않겠군. 최악의 상황에는 사업부를 매각하면 될 테니, 하, 이것도 전부 최민혁 실장님의 수법이잖아.’

열망에 가득한 최용욱 회장 모습은 확실히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 욕망의 근원은 최민혁 실장이 있었으니.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선동이 먹혔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내일 당장 최민혁 실장님을 만나서 이번 안건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하면 긍정적인 쪽이 좋겠어. 민혁 그 녀석 성격이 있으니, 그런 점도 잘 고려해 봐. 괜히 문경이가 엮여 있다는 것을 알면 예민한 반응을 보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KM 그룹 기획조정실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KM 그룹 핵심 계열사 대부분은 흑자 전환으로 돌아섰다.

지난달 계열사 지표는 탄탄한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성장세로 돌아섰다.

계열사 분위기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경영을 하자고 주장하면 당연히 바보가 된다.

구길모 차장은 평소와는 달리 웃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는 더 말이 없어?”

“계열사 대부분은 구조조정 성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대세입니다. 더욱이 실장님이 약속한 사내 복지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나간 사람도 있잖아?”

“그들 경우에는 성과 자체가 너무 낮다는 것이 대부분 의견입니다. 아예 일하지 않는 이들까지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정확히는 적성이 맞지 않은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재교육 문제는 KM 그룹도 간단히 적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업은 직업 재교육 훈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KM 전자는 그들에 대한 구제책이 있잖아?”

“그 부분은 다들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KM 그룹과 KM 전자의 차이를 이제는 다들 인정했습니다. KM 전자가 벌어들이는 수익 규모를 보면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님이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그래서 다들 최민혁 실장님 눈치만 보는 중입니다.”

그랬다.

KM 그룹이 구조조정을 통해서 변화를 이룩한 것은 좋았지만 안 좋은 점은 최민혁 실장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뱄다는 것이다.

KM 그룹 임직원 전체가 일하면서도 KM 그룹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이 가는 길을 지켜보면서 따라 배우는 중이다.

장승일 실장은 이런 현상이 딱히 좋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최문경 부회장에 비할 바는 아니군. 아주 난리가 났을 테니.’

“가만 부회장 측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없어?”

“LCD 계열사 설립에 대한 소문 퍼뜨리기에 집중해서인지 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최문경 부회장이 이제까지 쓴맛을 자주 봤다. 그는 때문에 다른 일을 다 중단하고, 이 일에만 매달렸다.

실제로 선택과 집중을 한 덕분에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 완고한 최용욱 회장조차 귀가 솔깃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KM 그룹 발전을 위해서 이런 노력을 했다면 얼마나 좋겠어? 아마 그랬다면 부회장이 지금 그룹 경영 승계를 확정을 지었을 텐데.”

장승일 실장은 혀를 찼다. 이젠 작정하고 IPS 신사업 소문을 퍼트렸다. 최용욱 회장 마음이 돌아섰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커닝의 경우는 어때?”

“거긴 좀 심각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영 승계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미국 언론에서 곧잘 나오고 있습니다. 커닝 내부 갈등이 이런 식으로 외부에 드러난 것은 처음이라서 미국 언론 역시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심각해?”

“막내인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욕심을 낸 덕분에 둘째 모리스 하우튼 이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 행동에 놀란 첫째 모건 하우튼 이사가 긴장한 상황입니다.”

애초에 모건 하우튼 이사는 이미 잠정적인 경영 승계 후보자로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반대 파벌의 움직임이 이번 갈등 때문에 수면 위에 떠올랐다.

여기에 다시 이들 배후에 있는 대주주들이 이합집산 하면서 상황이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갔다.

대주주 처지에서 자신의 입김이 들어가는 이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들도 처음에는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 중재를 받았지만, 갈등이 표면화되자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경영권 분쟁이 격화된 것이었다.

커닝 기업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경영권 탐욕에 미쳐 있는 커닝 이사회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여기에 갈등이 극대화된 것은 실리콘 밸리의 IT 기업의 폭발적인 성장도 있다.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입만 열면 이 새로운 기업에 대한 예를 들면서 기존 세력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그가 특히 롤모델로 삼은 회사가 바로 KM 전자입니다.”

“…그게 먹혀?”

“먹히다 뿐이겠습니까? 작년 KM 전자 매출은 3천억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장 KM 전자 내에 쌓인 현금만 10억 달러를 가볍게 돌파했습니다. 그런데 커닝이란 회사와 KM 전자는 닮은꼴이 많습니다. 주장이 안 먹힐 이유가 없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