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02화 (402/1,021)

#402.

분노한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조성돈 팀장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게 확실치는 않지만… 최용욱 회장님인 것으로 압니다.”

“할아버지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도 압니다. 그냥 소문이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누군가 가짜 소문을 퍼뜨린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조성돈 팀장은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은 채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이번 판을 만든 사람은 최민혁이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이 그 판에 껴서 한몫 해먹으려고 했다.

최민혁은 인상을 와락 구긴 채 한동안 씩씩거렸다. 밥상을 차려놓으니, 냉큼 그 위에 숟가락을 얻으려는 속 보이는 짓에 화가 났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인생 1회차에도 비일비재했다.

인생 2회차에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은 이유는 최문경 부회장이 최민혁이 상황을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드디어 반격다운 반격을 한 셈이다.

이 모든 것은 최민혁의 성장이 가파르게 빨라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최문경 부회장만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과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이 전부 나서서 최민혁 행보를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최민혁은 뒤늦게야 이전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 놓인 것을 인정하면서 쓰게 웃었다.

그는 할아버지 최용욱 회장이 절대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 솜씨인가. 하긴 이래야지. 발악하시네. 이래야 나도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상큼하게 밟아줄 수 있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 그것도 번거로워.’

고심에 빠진 최민혁.

상대가 먼저 잽을 날렸다면, 반대로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과 최용욱 회장이 욕심 때문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죠?”

“아, 물론입니다. KM 그룹 내에서 말이 돌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미묘한 그룹 내부 사정 때문에 이 일을 딱히 부인하지 않고는 있습니다. 그도 내심 바라는 눈치입니다. 솔직히 LC 전자보다는 KM 계열사에서 직접 하는 것이 나으니까요.”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조차 장승일 실장 의견에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실소를 지었다.

‘하긴 2년 후에 닥칠 IMF가 아니라면 나쁘지 않지. 문제는 한창 공장 설립과 양산이 막 시작될 점에 IMF가 온다는 것이니까.’

생산 설비가 있는 오성 전자나 LC 전자와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두 그룹에서는 IPS LCD 양산을 무리하게 진행한다면, 빠르면 6개월 후에 양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 팀장님이 한번 철저히 확인을 해보세요.”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저기 그런데 정말 소문대로 들어주실 겁니까?”

“우리 KM 그룹에게 이권을 주지 못할 것도 없죠. 다만 그만한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겁니다.”

“차입금 말입니까?”

“아뇨. 빌린 돈으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왕이면 우리 할아버지가 쥐고 있는 돈을 내놓는다면, 저도 찬성해야죠.”

조성돈 팀장은 뜬금없는 비자금 이야기에 눈을 끔뻑거렸다.

“…비, 비자금 말입니까?”

최민혁은 팔짱을 낀 채 툴툴거렸다.

“차라리 비자금을 양지로 끌어낼 수 있다면 이번 일도 나쁜 선택은 아니에요. 물론 조건을 좀 걸고, 일의 규모는 키워야겠죠. 우리 첫째 큰아버지 생각대로 판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꿍쳐놓은 돈을 다 토해내게 하면 최상의 패가 될 겁니다.”

“만약 IPS LCD가 콜린스처럼 성과가 좋으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IPS LCD 사업이 대박 치면 어떻게 하느냐? 아니, 그 사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업은 오성 전자나 LC 전자 쪽에 줄 겁니다. 비슷한 액정 패널 기술이 있으니, 그걸로 설득하면 됩니다. 그러니 순수하게 생각해서 검토하지만 말고 KM 그룹 자금 흐름을 철저하게 한번 확인을 해보세요.”

말을 하면서도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생각도 못 한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의 비자금을 날릴 방법이 없었는데, 잘만 엮으면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도박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보이는데, 판돈을 더 걸지 않은 이유가 없다고 봤다.

‘어쩌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 미국 돈줄을 끊어버릴 수가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IMF 때 미국으로 도주하기는 어렵지. 더욱이 IMF 동안에 KM LCD에 자금을 묶어두고, 헐값에 인수해서 LC 전자나 오성 그룹에 매각하면 되니까. 오, 이 계획 나쁘지 않잖아!’

조성돈 팀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음흉한 표정에 혀를 내두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민혁은 물론 커닝 문제도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커닝에 관한 조사도 추가 인원을 배당해서 확인해 보십시오. 상황이 바뀌면 바로 대응을 해야 하니까요. 켐코 건은 포기한 것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이 간섭하기 전만 해도 커닝 내부 갈등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첫째인 모건 하우튼 이사의 상속 문제를 어느 정도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은 이 일에 대해서 넌지시 지인에게 밝혔다.

마치 KM 그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진 것은 제프리 하우튼 이사가 반기를 든 이후다. 그는 생존이라는 목표를 앞에 둔 채 데니스 워드 부사장을 공격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경영 승계 문제에는 중도적인 입장이었지만 당혹스러운 갈등 문제 때문에 모리스 하우튼 이사의 도움을 받았다.

모리스 하우튼 이사는 시간이 갈수록 다혈질 성향을 보이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위기감을 느낀 제프리 하우튼 이사는 이사회 내에 자기 측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가 커진 것은 첫째인 모건 하우튼 이사가 이상함을 느낀 이후다.

그가 부회장이 된다고 하니, 그 반대 파벌에 있던 이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제프리 하우튼 이사에 매달렸다.

커닝 이사회 내부 갈등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다.

얼마나 이 갈등이 첨예한 지 그 불똥이 결국 오성 커닝에도 튀었다.

에이모리 하우튼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한 이후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된다는 루머가 커닝 내부에 돌았기 때문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이야 강 건너 불구경 입장이었지만 오성 커닝 내부 분위기는 달랐다.

사실 커닝이란 회사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덕분에 나름 좋은 직장이다. 아무리 이직 문화가 자유로운 미국이라고 해도 괜찮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특히 생존하기 어려운 임원들이 그 대상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 정보를 오성 전자를 통해서 얻었다.

뭐 오성 전자에서 흘렸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어이가 없군.”

권재홍 비서실장은 오히려 심각했다.

“새삼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이번 기회에 확인한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민혁이 그놈은 커닝 쪽 담당자와 만난 것이 다라면서?”

권재홍 비서실장 얼굴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커닝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면서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 대상이 바로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제프리 하우튼 이사입니다.”

“설마 민혁이 그놈이 제프리 하우튼 이사를 부추겼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갑작스러운 커닝 내부 분위기의 반전이 말이 안 됩니다. 아마 협상에서 최대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흠.”

최문경 부회장은 문득 조카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저지른 일을 하나씩 떠올렸다. 당장 먼저 떠오른 것은 최훈열 전무를 감방에 보낸 일이다.

그 이후에 생긴 일을 하나하나 돌아보면 보통 경영인과는 많이 달랐다.

‘하긴 민혁 그놈이라면 이보다 더한 짓을 하고도 남아.’

하지만 한편으로 이상했다.

“도대체 민혁 그놈은 커닝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건 아직 파악 중입니다.”

켐코 사업부 매각 관련된 사안은 커닝 이사회만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권이 걸려 있어서 누구도 그 정보를 외부에 흘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살벌한 커닝 내부 분위기 상황에서 괜한 일을 벌였다고 퇴출당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이 중요한 정보를 오성 전자 측에 흘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최민혁 동선을 알고 나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국내에 IPS LCD라는 폭탄을 터뜨려 놓고 정작 본인은 미국으로 가서 커닝이란 회사와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 커닝이 당장에 뭔가 대단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비서실에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았으니, 기다리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태평양 넘어 미국에 있는 커닝 따위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진행하는 IPS LCD 관련 계열사 문제였다.

“우리 회장님은 요즘 어때?”

권재홍 비서실장도 예상과는 다른 최용욱 회장 반응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이번 미끼를 물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회사 내에 도는 소문인데, 상관이 없잖아. 그리고 생각을 해 봐. 우리 회사가 IPS LCD 계열사를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잖아?”

“LCD 사업이 워낙에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가서 하는 말입니다.”

“아니, 그래서 IPS LCD 기술이 있잖아. 이 새로운 패널 품질이라면 절대로 망하지는 않아. 정 힘들면 이 계열사를 오성 그룹에 매각해도 나쁘지 않지. 그것도 비싸게.”

최문경 부회장이 이번 일의 롤 모델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다. 최민혁 실장은 KM 전자 계열사를 매각하면서 재미를 단단히 봤기 때문이다.

‘특히 위성 사업부는 진짜 대박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사업부를 매각할 것까지는 있나 싶었다.

그런데 KM 전자 내부에 쌓인 현금성 자산 중에 과반수가 이 매각 대금이다.

돈이 돈을 번다고 현금이 쌓이면서 이자 수익도 짭짤했다.

“아, 맞아. 민혁 그놈이 KM 전자 내에 현금을 쌓는 이유를 찾았어?”

“아직 확인 중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것도 민혁 그놈의 독단이란 소리야?”

“현재까지는 그런 것으로 압니다.”

“낌새가 전혀 없어? 아니면 뭔가 특이한 점이라도 있을 것 아냐.”

“이상한 점이라면 원화가 아니라 달러를 비축하는 것으로 압니다. 현재 7천억이 넘었는데,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1, 10억 달러 현금이라고?”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의혹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그것도 KM 전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벨린 투자까지 합치면, 25억 달러를 넘은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25억 달러라니…….”

최문경 부회장은 천문학적인 금액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 엄청난 달러를 회사 내부에 쌓아두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한 가지를 더 언급했다.

“그런데 이건 현금만을 이야기한 겁니다. KM 전자 주식을 비롯한 나머지 금액을 합치면 몇 배로 늘어납니다.”

“씨발, 개같네.”

최문경 부회장은 배가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최훈열 전무가 계획대로 잘했다면 KM 전자는 결국 자신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즉 KM 전자 재산은 전부 다 자신의 소유가 된다.

그런데 그걸 몽땅 최민혁에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조카 최민혁이 벌어들인 수십억 달러 자산에 대한 탐욕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래서 더 IPS LCD 신사업을 더 집착했다.

“이번 IPS 신사업은 반드시 성공하게 해야 해!!!”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번 일은 최용욱 회장을 이용하는 일이라서 영 내키지 않았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걱정하지 마. 아버지 성격은 내가 더 잘 아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민혁 그놈의 수작에 끌려 다닐 수만은 없다는 거야. 차라리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국면을 바꾸는 것이 좋아!”

“최 실장이 가만히 있을까요?”

“당연히 고놈의 성격에 조용히 있지 않겠지. 사냥개처럼 달려들 거야.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가 있어. 아버지도 그놈의 진짜 모습을 본다면 생각을 바꿀 테니까. 그러니 이번 일은 이미지 관리가 중요해. 비서실을 총동원해서 확인을 해봐.”

“…알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