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10~20억은 그냥 날려도 된다는 최민혁의 말에 깔린 진의에 김호동 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LC 전자는 투자금 5억만 받아도 담당자가 매일 와서 확인한다. 심지어 연구 보고서도 철저히 감시했다.
그것과 비교하면 최민혁 실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김호동 박사도 결국 최민혁의 강력한 의지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진짜 이 연구를 하실 생각입니까. 수평 액정 배열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요. 응답 속도가 너무 느리고, 실험 중에 액정이 이상하게 동작하는 문제도 생겨납니다. 사례에 따라 다 달라서 이게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야 순수한 연구 때문에 문제 삼지 않았지만 당장 LC 전자 중앙 연구소의 의 권기식 부장은 기겁하더군요. 상업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일단 지시에 충실히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큰소리치는 최민혁은 김호동 박사 이야기를 무시했다. 그런데 다시 보고서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험적인 목적과 양산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그제야 최민혁은 왜 LC 전자가 이 실험을 중간에 보류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히타치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기에 달랑 특허만 내놓고 상용화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미래 가치를 보는 최민혁으로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40억이면 충분하죠? 아,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저 돈 많습니다. 그냥 40억 날려 먹어도 괜찮아요. 비밀 계약서에 추가해서 외부에서는 알 수 없도록 할 겁니다. 김 박사님에는 절대로 피해가 안 갑니다. 다만 결과만 보여주면 됩니다.”
“…….”
40억까지 올라가자 김호동 교수도 더 고집 피울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박태훈 박사의 엉덩이는 들썩들썩했다. 그는 김호동 교수를 충혈된 눈으로 째려보면서 협박까지 했다.
‘이 자식이.’
“으음, 조, 좋습니다. 뭐 그쪽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제가 반대할 수는 없죠. 다시 말하지만, 이 연구는 그다지 상업적인 의미가 없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알다시피 샘플을 제작하는 데…….”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50억으로 가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2주 안에 이 연구 자료를 검증하고, 특허 출원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 권리는 저희가 다 가지고요. 대신에 연구 수당은 별도로 하고, 따로 인센티브를 드리겠습니다.”
그도 바로 반박하다가 ‘50억’이란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2주는 말도 안 되는……. 흠.”
하지만 최민혁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히타치와 특허 경쟁에서 이겨야 했다. 지금 시기가 아슬아슬한 만큼 평소처럼 진행할 수가 없었다.
“2주에서 하루 일정을 줄일 때마다 1억씩 더 드리죠.”
사실 2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기존 샘플로 운 좋게 된다면 가능할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김호동 박사가 괴짜라고 해도 기간을 하루씩 당겨도 1억씩 준다는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민혁은 미리 준비해 둔 추가 계약서를 바로 꺼내 놓았다.
“우리 회사 법무 팀에서 준비한 서류입니다. 확인해 보시고 바로 서명해 주세요. 이 특허에 대한 권리는 우리 쪽이 가집니다. 물론 로열티 일부에 대한 인센티브는 따로 해드리겠습니다.”
“…네.”
* * *
계약을 끝낸 후에 김호동 박사 연구실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박태훈 박사는 연구실에 있는 모든 인력을 다 불렀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 연구를 죄다 중단시켰다. 그리고 이 연구에 다 투입했다.
그는 마치 군대 조교처럼 밑에 조교들을 노예처럼 갈궜다.
김호동 교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솔직히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연구 노력은 꼭 이들만 해당하지 않았다.
히타치 공작소의 시가 마사아키 박사 역시 열정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싱글 액정을 사용한 장벽 때문에 바동거리는 그로서는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히타치 경우에는 컬러필터와 관련한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 LCD 쪽에도 다양한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즉 말로만 이야기하는 차세대 LCD가 아니라 이미 다양한 기술 기반을 하나씩 쌓고 있었다.
CRT보다 LCD 쪽에 초점을 맞춘 이 연구 방향은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의 지시를 받아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작년, 아니 올해 연초까지는 연구소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와서 그 양상이 바뀌었다.
바로 콜린스 때문이다.
차라리 콜린스가 나오자마자 시장에 대박 쳐서 세계 시장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키웠다면 오히려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콜린스는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찔끔찔끔 팔기 시작했고, 국내, 동아시아 쪽으로는 쥐똥처럼 소량으로 판매했다.
결국 그러다가 한국 시장이 뒤흔들렸다.
소니, 히타치도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해, 말어? 해, 말어? 라고 선택을 강요당한 셈이다.
LCD, PDP와 같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CRT를 포기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갑자기 시장에 나온 KMP-01 때문에 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월마트가 KM 전자의 오만한 요구를 들어줄 듯 말 듯했기 때문이다.
콜린스 수량, KMP-01 수량 각 50만 대 계약 이야기가 나왔다. KMP-01은 시장 반응에 따라서 50만 대가 더 계약에 추가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돈 것이었다.
무려 2조 3천억 물량이었다.
소니가 가장 먼저 차세대 CRT 개발 투자를 키웠다.
그 다음으로 일본 디스플레이 회사는 전부 다 CRT에 대한 개발 투자를 대폭 늘렸다.
올해 안으로 차세대 CRT를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건 히타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뒤늦게 콜린스의 원천 기술을 분석했고,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다.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은 결국 히타치 그룹 상부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다. 연구 자체에 독자성을 주는 기존의 방침과는 너무 달랐다.
그 역시 윗선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연구를 하던 기존 연구원을 이 차세대 CRT 개발 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IPS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시가 마사아키 박사는 갑자기 30명의 핵심 연구원을 차세대 CRT 쪽으로 돌리자 결국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을 찾아갔다.
“니시무라 소장님, 정말 이러면 안 됩니다. 이제 연구 막바지입니다!”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 않나?”
“지금 선별한 액정으로 속도 테스트를 우선 끝내면 됩니다. 그것만 확인이 끝나면, 연구 속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300ms가 넘는데, 그걸로 상용이 기능이 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은 테스트 중입니다. 전극 튜닝을 활용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글쎄, 내 생각은 달라. 액정 응답 특성을 줄이는 것이 필요해. 그러기 위해서는 액정 소재를 개선해야 하는데, 1~2년은 더 필요해.”
실상 액정 응답 특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서서히 결과로 나타났다.
이 특성을 잘만 활용한다면 돌파구를 찾을 수가 있었다.
기존 듀얼 전극이 아니라 다른 전극에 응용하면서다. 편광판, 컬라 필터, 광학 필름을 이용해서 빛샘을 대폭 줄이면서 절충점을 찾았다.
문제는 아직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과연 이런 방식이 상업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시가 박사도 자네도 잘 알겠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해. 최소한 잡아도 1~2년이야. 그 때문에 윗선의 지시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기존 인력을 돌린 거야. 자네도 상황을 이해해야지.”
“아니, 소장님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지금이 고비라서 쪼이면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인력을 대폭 줄이는 겁니까?”
“콜린스 때문이라고 하잖아.”
“하, 그 콜린스 때문에 제가 반대하는 겁니다. 외각 노이즈 안정화가 하루 이틀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이미 돌파구를 찾았어. 노이즈 간섭을 방해하는 물질만 찾으면 간단해.”
“아, 진짜 답답합니다. 그 물질을 찾는다고 해도 양산하기가 쉽습니까. 그것만 해도 족히 2년은 더 걸릴 겁니다!”
어지간해서는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던 시가 마사이 박사의 함성.
소장실로 들어오는 이들조차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쳐다보았다.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도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시가 마사아키 박사를 째려봤다.
“시가 박사!”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시가 박사는 그제야 이성을 차렸다. 너무 흥분해서 감정을 참지 못하고 터뜨린 것을 뒤늦게 알았다.
니시무라 야스시 소장도 시가 박사 능력을 모르지 않았다.
“이봐 시가 박사, 나도 자네 마음 모르는 것은 아냐. 그런데 그룹 윗선에서는 콜린스 때문에 난리야. 자네도 K투스 이야기를 들었을 것 아냐?”
“…그게 그렇게 심각합니까?”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 내가 자네에게 설명해야 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고비만 넘기고, 특허 출원까지만 하면…….”
“걱정하지 마. 차세대 LCD 쪽은 우리가 제일 앞서 나갔어. 우리가 죽어라고 고생하는데, 다른 회사에서 내일 당장 특허를 낼 수는 없어. 조금만 참아. 한 달이면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시가 마사아키 박사도 소장실을 나오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을 이해하면서도 쉽게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연구원을 더 집중한다고 해서 차세대 CRT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등골이 싸한 것이 분명히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빠가야로(병신!)’
* * *
차세대 LCD 개발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면 액정 문제였다. 그런데 멜코사 측에서는 뜻밖에 KM 전자 요구를 잘 들어주었다.
그들은 뜻밖에도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K투스 이후에 최민혁 명성이 대폭 늘어나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멜코사는 자신의 액정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응답 특성 문제가 컸다.
멜코사의 액정 응답 특성도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200ms까지 줄이지는 못했다.
김호동 교수 팀은 덕분에 다양한 액정 물질을 쉽게 공급받았다.
일단 이거 하나만으로 연구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박태훈 박사는 더 발광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빨리, 더 빨리!”
다만 회의실에 불려 온 이들은 이번 액정 실험에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석사 2년차 이상준은 박태훈 박사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이 연구 접은 것 아니었습니까?”
“기존 연구와는 다르다. 잘 보면 알겠지만, 싱글 전극으로 실험하는 하는 거야. 그러니 기존 연구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라!”
“하지만 거북이보다 더 느린 응답 특성이 있는 액정으로 실험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다들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 연구에 참여했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이들은 부정적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돈 때문에 이 연구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김호동 교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박태훈 박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훈 박사는 회의실에 참석한 이들 앞으로 50만 원이 봉투를 내놓았다.
“일단 연구 수당이다.”
“됐습니다. 그냥 아르바이트해도 이 정도는 이틀이면 법니다.”
김호동 교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훈 박사는 현금이 가득 든 가방에서 이백만 원씩을 추가로 배당했다.
“이거 역시 특별 수당이다.”
김호동 교수가 절묘하게 나섰다.
“연구 기간은 이 주 기준이다. 하루를 줄이면 줄일수록 수당은 더 늘어날 거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한 사람당 천만 원씩 나갈 거다.”
“네?”
다들 깜짝 놀랐다. 지난 LC 전자와 공동 연구 때도 저렇게 현금을 막 쓰지 않았다.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김호동 교수도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 더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