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계약서 내용 중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 있었다. 그런데 딱히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서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이 그려 온 스케치 자료를 보여주었다. 바로 싱글 전극을 사용한 특이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외형 자체는 자신이 실험한 싱글 전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방향성 자체가 달랐다.
액정 소자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하는 김호동 박사는 전극 특성에 따라서 다양한 거리와 속도를 중심으로 실험했다.
싱글 전극 모양 자체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걸 응용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거리에 따라서 다양한 값이 나오는데, 이걸 일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LC 전자 측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최민혁은 김호동 박사에게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이제 우리 쪽 조건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 물론 20억과는 별개로 자금이 더 필요하면 추가로 더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계약서에 명시된 것처럼 이 연구를 우선하여 처리해 주십시오.”
김호동 박사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최민혁이 만든 스케치를 살폈다. 그는 분명히 경고해도 자신 이야기를 씹어버리자 설득에 포기했는데,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것인가 싶어서 살폈다.
자신이 한 삽질 중에는 이와 유사한 것이 있었는데, 심지어 그때 만든 샘플이 아직 있었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왜 자신에게 투자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왜 절 찾아왔는지 이해가 됩니다만 이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수평 액정 배열의 문제점은 제어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느려 터진 곰도 이보다는 더 빠른 반응을 보일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냉정한 단언에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수긍할 일이었다.
김호동 박사 실력을 잘 아는 김창호 부장은 어깨너머로 최민혁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속삭였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아니, 조 팀장님이 모르면 누가 아는 겁니까?”
“그냥 지켜보기만 하세요!”
조성돈 팀장은 김창호 부장을 째려봤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런 말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다.
김창호 부장은 최민혁 실장 음모론의 실마리라도 잡고 싶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역시 KM 전자와 최민혁 사이에 도는 황당한 이야기를 잘 알았다.
K투스는 단순히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힐끗 김창호 부장을 째려본 최민혁은 역시 단호했다.
“상관없습니다. 지시한 대로만 해주세요. 투자하는 것은 다 이것 때문입니다. 김호동 박사님이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지시한 것에 관한 결과입니다!”
“…….”
김호동 박사가 LC 전자 인물이었다면 반박했을 테지만 최민혁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최민혁에 대한 소문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세계적인 천재라는 소리도 간혹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있었다.
“제가 딱히 LC 전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이런 방식의 연구에 손을 뗀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일방적인 최민혁 주장에 김호동 박사는 입술을 악물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많이는 못 기다립니다. 꼭 박사님이 아니라고 해도 대안은 있으니까요.”
정확히는 거짓말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을 한 사람은 국내에 없다.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면 적어도 1~2년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절대 거절하기 힘들 거야.’
* * *
김호동 박사가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은 최민혁 제안을 반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자존심이 상해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최민혁 실장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박태훈 박사가 계속 김호동 박사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호동 박사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제까지 그가 자존심을 내세운 덕분에 제대로 된 투자를 받지 못해서 연구실이 피해를 받았다.
콜린스가 대표적이다.
이거 역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쫓겨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기가 만든 원천 기술이 아니고서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에 관해서 다시 한번 조사를 해봤는데,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TV만 털면 나오는 것이 바로 최민혁 실장의 K투스에 대한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나온 것은 바로 KM 그룹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확실히 대단한 친구야.”
박태훈 박사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지 김호동 박사 설득에 나섰다.
“지금 KM 그룹은 두 쪽으로 갈라져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 한쪽을 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을 완벽하게 밀어붙이고 있어요.”
“최민혁 그 친구가 KM 그룹을 장악이라도 한다는 소리야?”
“아뇨. 최 실장은 그럴 필요가 없어요. KM 전자 내에 쌓이고 있는 현금만 7천억이 넘고, 최민혁 실장이 실소유주인 벨린 투자는 현금이 1조 원이 넘습니다.”
“…그게 진짜야?”
“아, 정말이죠.”
박태훈 박사는 정리한 신문 기사를 날짜별로 해서 김호동 박사에게 보여주었다. 보는 것만으로 질릴 만한 내용이었다.
“…….”
“대단하죠? 저도 이거 자료 확인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말도 못 합니다. 즉 그 말은 이 연구도 최민혁 실장이 뭔가 노리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최 실장이 시키는 대로만 해라?”
“아, 그게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최민혁 실장이 바보가 아닌데, 여유가 있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죠. 뭔가 급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연구에 가장 앞선 나라가 일본 아닙니까. 어쩌면 일본 애들은 이미 기술을 끝냈을 수도 있어요. 아, 끝나지 않은 것이 정답이겠네요. 어쩌면 최 실장이 그래서 더 난리일 수도 있고요.”
“그게 정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최 실장 행동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흠.”
김호동 박사도 그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최민혁 실장에게 살짝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최민혁 실장은 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 확실하게 밀어붙였다.
그런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힐끗 언론에 나 있는 기사를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맞네. 해야 할 때를 놓치지 않았어.’
* * *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시기를 놓치면 그다음 흐름을 쉽게 잡을 수는 없다.
김호동 박사처럼 망설이는 사람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이는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그는 콜린스, KMP-01 대형 거래 소문을 듣자 제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했다.
“권 실장, 정말이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월마트 쪽에서는 KMP-01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월마트가 KMP-01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크기가 작은 모바일 기기이기 때문이다. 이건 크기가 부담스러운 콜린스와는 달랐다.
그런데 K투스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또 달라졌다.
MP3 한 번은 운이라고 할 수 있어도 K투스는 그렇지 않았다.
KM 전자는 놀랍게도 세계적인 대기업도 없는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그 숫자를 계속해서 늘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월마트도 KM 전자의 성장세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두 회사 간의 계약이 체결된다면 이전과는 상황이 완벽히 달라진다.
KM 전자의 브랜드 파워가 격이 달라진다.
최민혁의 영향력은 폭증할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둘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대안이 없어? 에릭슨을 이용해서 특허 소송을 걸어도 되잖아?”
“그건 좀 어렵습니다. K투스는 블루투스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형태이고, 이미 특허도 KM투스가 먼저 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K투스가 블루투스를 흡수할 수 있어도 그 반대는 안 됩니다. 아니, 블루투스를 굳이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K투스만 사용해도 되니까요.”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네. 그래서 말이 많이 나옵니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K투스는 쉽게 말해서 부동산 알 박기와 비슷하다. 아파트 현장 한복판에 지름 30m 초대형 싱크홀을 박은 것이다.
“…황당하네. 아니, 그러면 에릭슨 같은 놈들이 그걸 당하고만 있는 거야?!”
“계속 접촉하는 것으로 압니다. 지금 KM 전자 본사 입구에는 드나드는 외국인이 회사 임직원보다 더 많습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뭔가 하란 말이야. 가만 최민혁 이 새끼는 지금 뭘 하고 있어. 설마 K투스를 이용해서 나에게 수작 부리는 것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그놈은 지금 뭘하고 있어?”
“그게…….”
권재홍 비서실장도 아차 싶었다. K투스에 정신이 나가서 미처 최민혁 동선을 간과한 것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버럭 소리쳤다.
“빨리 최 실장 그놈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 이놈이 뭔가 꿍꿍이가 있어!”
“…알겠습니다.”
* * *
권재홍 비서실장의 행보는 꽤 빨랐지만, 최민혁을 바로 찾지는 못했다.
최민혁은 지금 김호동 박사를 상대로 열정적인 설득을 하고 있었다.
“돈이 되고, 안 되고는 투자자가 결정하는 겁니다. 만약을 위해서 20억 투자는 별개로 했고, 이건 따로 투자할 겁니다.”
“하지만 LC 전자에서 하는 주장도…….”
“LC 전자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김호동 박사는 LC 전자에 시달리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그는 LC 전자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민혁의 무모한 도전은 막고 싶었다.
“아니, 좀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단순히 실장님을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무모한 시도 때문에 저 역시 타격을 받습니다.”
“어차피 비밀 조항이 있어서 타격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단 한 마디도 양보하지 않는 최민혁의 태도에 김호동 박사도 혀를 내둘렀다. 이런 똥고집은 또 처음이었다.
“정말 답답합니다. 이 방식으로 검토하려면 비용이 생각보다는 더 많이 듭니다. 의미도 없고요.”
“얼마가 필요하죠?”
“기존에 이 연구 진행하기 위한 세트에만 무려 3억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샘플만 다섯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에 딱 하나만 성공했습니다.”
“이미 한 세트나 성공했군요. 좋네요. 그 샘플 가지고 이 IPS 기술 검토를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추가 세트는 어차피 업체 통해서 만들어 본 적이 있으니, 10억이면 기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겠죠?”
“…….”
김호동 박사는 질려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건 아예 대화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알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단호했다.
“돈은 구애받지 마세요!”
일방적으로 막 밀어붙이는 최민혁 모습에 김호동 박사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의 양심상 길바닥을 수억을 버리는 최민혁의 행동을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동호 교수님도 처음에는 비슷했습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동호 교수라…….”
막상 한국대 일약 스타가 된 이동호 교수를 떠올리자 최민혁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서 이동호 교수가 내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속이 뒤집혔으니까.
그 이야기 중에는 황당하게 최민혁 실장에 대한 것도 있었다.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최민혁을 묘사하는데, 당시만 해도 비웃기까지 했다.
막상 직접 대면하고서야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자칫 실패하면 자금이 너무 많이 소요됩니다.”
“10억으로 부족하나 본데, 그러면 20억이면 됩니까?”
“20억이 작은 자금은 아니지만…….”
“30억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