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K투스에 대한 단 한 마디의 말도 비고 우드 박사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 출장 갔다고 그러세요.”
조성돈 팀장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한 번쯤 만나보는 것은 좋지 않을까요?”
“아마 블루투스에 대한 도움을 원한 겁니다. 쓸데없는 질문은 듣고 싶지 않아요. 괜한 조언을 해주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언론에서도 연일 실장님의 폐쇄적인 태도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그런 점도 신경 써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들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경탄했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흘러서 K투스 가치가 알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K투스를 한 기업이 다 먹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실상 이게 다른 기술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입을 다문 채 외부에 노출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폐쇄적인 태도에 대해서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이보다 권태성 기획실장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이 비고 우드 박사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소식에 피식 웃었다.
‘계획대로 잘 풀려가는군.’
결국 원래 목표한 기획 팀의 반응부터 살폈다.
역시 삽질을 계속 반복 중이다.
그는 순간 망설였다.
일정을 줄이기 위해서 나서야 할지 선뜻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뭔가 하나라도 기획 팀이 스스로 찾기를 바랐다.
그래야 최소한 기획 팀 자신이 뭔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기획 팀 모습이 안쓰러워서 도저히 중간에 훼방 놓을 수가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10명의 기획 팀이 모여서 매달리는데, ‘아, 내가 조사해 봤는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좀만 더 기다려 보자. 뭔가 열심히 시도는 하는 것 같으니까.’
* * *
KM 전자 기획 팀은 정말 별짓을 다해봤다. LCD 관련 부가 기술 쪽도 다 살폈다.
그런데 역시나 실패였다.
결국 CRT도 다시 분석해 봤다.
대표적인 기술 중의 하나가 소니의 트리니트론이다.
트리니트론 기술을 이용해서 세계 시장 1위를 장악하고 있는 소니는 TV 시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강자였다.
박상기 차장은 이 소니 기술을 다시 원점에서 살폈다.
주사 방식 자체가 독특한 트리니트론 방식이 원통을 잘라서 만드는데, 선명하고 왜곡된 평면이라는 것이 강점이었던 것이다.
‘하, 이건 아니네.’
그것은 다른 팀원 역시 비슷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경험 때문에 시야가 넓어진 배종대 과장만큼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CRT를 접어도 다시 처음부터 조사했고, 그다음은 PDP로 넘어갔다.
PDP는 전체적으로 전력 소비량이 많고, 발열이 심하다. 가스 튜브 노화 때문에 오래 사용할수록 번인이 심해져서 수명이 짧다.
가스 튜브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고해상도 제작이 어렵다.
딱 여기서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CRT, PDP, TN 패널에 원점부터 분석하려면, 액정 관련 기술이 관련되지 않을까?’
물론 액정에 관한 조사도 진행했다.
그런데 미처 간과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액정의 반응 속도 문제다.
이 특성을 극복한 회사가 있을 수도 있다.
그건 꼭 전자 회사만 해당하지 않았다.
다른 분야도 분명히 LCD와 관련이 있는 쪽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독일 회사 하나가 있었다.
“멜코사?”
갑자기 뛰어온 배종대 과장에게 조성돈 팀장이 바로 질문했다.
“그게 뭐 하는 회사야?”
“액정 재료 업체 회사인데, 액정 배열에 관한 특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회사를 조사한다면 연결되는 회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도움이 될까?”
“여기 논문을 보십시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 * *
최민혁도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망설였다.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했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이 뜻밖에도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을 찾았다.
“독일 멜코사라…….”
조성돈 팀장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 회사에 전화해서 액정 배열 특허에 관련해서 자문했고, 필요하다면 특허를 사들이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멜코사 측에서는 딱히 특허 매각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액정 배열 자체에 관한 기술이라서 이게 돈이 크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쪽은 재료 분야이고, 액정 관련 기술 쪽과 연결된다고 보지 않았다.
더욱이 LCD 관련 기술은 PDP에도 밀리는 상황이다.
아니, 콜린스 초대박을 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CRT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조성돈 팀장의 특허 매입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최민혁은 초췌한 조성돈 팀장 표정을 살폈다. 일주일 내내 주말을 반려한 채 야근만 한 탓에 노숙인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이번에는 기획 팀이 제대로 했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이 액정 배열 기술만으로는 끝이 아니겠죠?”
“마침 국내에 이 멜코사 액정을 구입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김호동 박사입니다. 이건 김 박사가 최근 연구한 논문입니다.”
조성돈 팀장이 내놓은 것은 ‘액정 배열과 LCD 연관성’, ‘액정 배열과 LCD 투과율’, ‘액정 특성을 이용한 LCD 반응 속도’와 관련된 연구 논문이었다.
‘액정 배열과 LCD 연관성’과 관련된 논문은 최민혁이 그렇게 찾는 기술이었다.
다만 딱 봐도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LCD 쪽을 파고드는 연구원이었다. 그는 혹시 협상하기 힘든 괴짜가 아닐까 싶어서 툴툴거렸다.
“김호동 박사라, 혹시 그쪽하고는 아는 지인 없습니까?”
“마침 회사 내에 김호동 박사 하고 아는 지인이 있습니다. 김창호 부장입니다. 알고 보니, 콜린스 개발에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김호동 박사였습니다.”
“김 부장에게 연락해 보세요.”
* * *
김창호 부장은 갑작스러운 조성돈 팀장 연락을 받고 본사에 도착했다.
중요한 일이라는 말 때문에 정신없이 KM 전자 본사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역시 다른 임직원처럼 KM 전자에 대한 충성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심지어 그 일이 최민혁 실장 지시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도 들었다.
긴장 어린 표정을 한 채 실장실로 들어갔다가 곧 나올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다시 조성돈 팀장을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사람을 차량에 태워서 한국대로 안내하면서도 계속 눈치를 봤다. 대신 조성돈 팀장이 묻는 말에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다.
“오성 전자 LCD 생산 설계 팀에 있다가 나온 김호동 박사는 오성과 사이가 좋지 않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 회사와 딱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호동 박사는 한국대를 나와서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는데, LCD 관련한 주변 기술을 폭넓게 알고 있는 전문가였다.
학부 전공 자체가 재료 공학과인 덕분에 다른 공학 박사에 비해서 LCD를 보다 깊이 알았다. 그는 이 경력 덕분에 다른 회사에서도 지원을 받아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아, 원래는 CRT 쪽을 연구했습니다. 저희 콜린스 개발을 도와줬던 분입니다. 특히 콜린스 양산시에 나타나는 불량률 문제를 잡아준 분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콜린스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김호동 박사였다.
최민혁은 예상을 못 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역시 콜린스 개발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다만 외부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던 것이다.
“최병연 이사하고도 잘 알겠군요?”
“네. 당시 콜린스 개발 팀하고는 다들 친한 사이입니다.”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군요.”
“최훈열 전무가 김호동 박사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는 김호동 박사를 괴롭혀서 결국 개발에 손을 떼게 했으니까요.”
지금 감옥에 있는 최훈열 전무는 김호동 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교성이 없는 김호동 박사는 최훈열 전무를 병신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최병연 이사가 두 사람 갈등을 막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최훈열 전무에게 다시 찍혀 버린 것이었다.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둘째 작은아버지가 참 많은 일을 했군요.”
김창호 부장 역시 혀를 찼다.
“당시 그 일 때문에 연구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분노한 김호동 박사는 다시 당신들과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면 지금은 해묵은 감정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자 김호동 박사 프로필을 확인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과연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혹시 다른 회사와 이권 문제 때문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습니까?”
“말이 좀 많고, 자기 고집이 강합니다만 그런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일에도 공사 구분은 분명해서 오히려 다른 업체와 갈등을 많이 일으킵니다.”
“더 참고할 만한 것은 없습니까?”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을까요?”
“기술 개발 의뢰를 맡길 생각인데…….”
“네? 기술 개발요? 그건 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당시 문제가 된 최훈열 전무는 지금 감방에 있지 않습니까. 나름 제대로 된 보복을 해준 셈인데, 좋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확실치 않습니다.”
최민혁은 넌지시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
“특허 지분에 대한 소유권 문제입니다.”
“특허 지분이라…….”
김창호 부장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특허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저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다.
결국 김호동 박사를 속여야 하는 것이 되는데, 내키지 않았다.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서 공개적으로 협상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최훈열 전무와는 다를 수가 있어. 결국, 그를 감옥에 보낸 것은 최민혁 실장님이니까.’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에 김창호 부장은 눈치를 보면서도 조 팀장을 쳐다보았다.
차분한 성격의 김창호 부장은 관리자로서 TV 사업부의 신기술에 얼마나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것은 원천 기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결국 말을 빙빙 돌렸다.
“저기 실장님, 죄송한 말이지만 TV 사업부 관련 원천 기술은 자본도 자본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설사 괜찮은 기술이 있다고 해도 그걸로 뭘 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알아요.”
최민혁은 김창호 부장이 뭘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IPS 원천 기술을 개발한 회사가 굳이 그 기술을 양산화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들이 그랬다면 자신이라고 해서 못 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야. 히타치가 삽질해서 여유는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어.’
최민혁이 입을 다물자 차 내 분위기기 이상했다.
최민혁은 차량 안에 탄 이들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자 결국 한마디 했다.
“기획 팀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LCD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이게 돈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호동 박사가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것 같은데, 아직 특허를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김호동 박사를 만나 이야기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관리자로 경험이 많은 김창호 부장이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저기 실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TV 기술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압변성기만 해도 구조 자체가 특허가 됩니다.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미 최민혁 실장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던 김창호 부장조차 콜린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이 일에 부정적이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이렇게 급하게 갈 만큼 중요합니까? 아니 제 말은 오성 전자에서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서 해도 제대로 된 결과가 안 나오는 분야인데, 아이디어만으로 가능할…….”
슬쩍 말꼬리를 흐리는 김창호 부장을 보자 최민혁이 바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