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로직 설계를 담당한 김홍준 과장 역시 공채덕 과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은 MP3 원천 기술 관련해서 경험이 있어서 차세대 LCD의 특성을 파고들었다. 최민혁 실장이 직접 지시를 내렸으니, 분명히 답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공채덕 과장은 고루한 임기석 부장과는 달리 자신의 한계를 너무 잘 알았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차라리 차세대 LCD 관련 연구하는 이들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들이 설사 답안을 내놓지 못한다고 해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교수를 말하는 건가?”
“그쪽도 좋고요. 아니면 벤처도 답이 될 겁니다. 정 안 되면, 실리콘 밸리 쪽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답을 알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몇 년에 걸쳐서 연구를 해왔으니, 우리보다 낫지 않을까요?”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던 김홍준 과장이 툴툴거렸다.
“생각해 보면, K투스도 이런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실리콘 밸리 쪽에 비밀 연구소를 만들어뒀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냥 최 실장님이 사무실에 앉아서 홀로 기술을 만들어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임기석 부장도 두 사람의 지적을 반박하지 않았다. 차라리 공채덕 과장 의견처럼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더 쉬웠다.
‘하긴 실장님이 돈이 많으니까. 돈 지랄을 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아.’
물론 인텔, IBM처럼 돈이 넘쳐나는 기업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들 역시 자본이 없어서, 인력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 내가 조 팀장님에게 얘길 해서 기획 팀의 도움을 청하지.”
“그게 제일 나은 방법입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나름 최민혁 실장처럼 한번 해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최 실장님이 한 실적 중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아. 그때는 그냥 쉽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자신들이 직접 차세대 LCD 기술을 검토하고서야 K투스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그들은 절감했다. 하지만 그들은 도저히 최민혁 실장 앞에서 그에 대한 의문 따위는 가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쪽하고 비밀리에 손을 잡은 것일까?’
* * *
조성돈 기획 팀장은 자신이 던진 공을 다시 토스 받아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임기석 부장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확실히 무리죠?”
“차세대 LCD 관련 연구는 오성 전자에서도 진행하는 일입니다. LCD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는 오성 전자에서도 쉽게 극복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면 전혀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LCD 관련 연구를 하는 연구 기관을 집중하여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역시 안 해본 것이 아닙니다. 국내 연구소는 다 조사해 봤습니다.”
“방법을 바꾸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방법이라…….”
조성돈 팀장은 임기석 부장 이야기를 듣고 나서 웃지 않았다.
애초에 어느 정도 예상한 답이다.
혹시라도 다른 대안이 있을까 싶어서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방법을 바꾸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저 방법이라도 시도해 봐야 했다. 만약 차세대 LCD 관련해서 아무런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기획 팀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다시 기획 팀을 불러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기획 팀 역시 눈치껏 조성돈 팀장의 표정을 살폈다.
박상기 차장은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조성돈 팀장은 차세대 LCD 기술 검토 이전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우선 언급했다.
“월마트 쪽과의 계약이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잘 알 겁니다. 특히 KMP-01 출시 이후로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월마트 쪽은 다른 외국 기업과는 달리 KM 전자와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KM 전자의 약점을 찾아서 공격하려 했다.
그런 월마트가 KM 전자에서 신제품이 나왔는데 그걸 그냥 소극적으로 지켜볼 리가 없었다.
실상 KMP-01에 대한 분석을 가장 먼저 한 기업이 바로 월마트였다.
그리고 월마트 이사회는 KMP-01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KM 전자가 가진 기술, 자본을 심각하게 여긴 것이었다.
이제는 콜린스 문제가 아니었다.
KMP-01이라는 새로운 모바일 기기에 집중해야 할 시기다.
만약 월마트가 이 KMP-01을 주도적으로 활용한다면 산적한 많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콜린스 공급 계약 문제도 이전처럼 질질 끌 수는 없었다.
설사 손해를 본다고 해도 KMP-01까지 같이 팔아야 했다.
이건 KM 전자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런 좋은 기회를 마냥 좋게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성 전자, LC 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관망세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견제를 해야 할 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K투스가 실장님이 다른 세력을 시선을 끌려고 만들어놓은 미끼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K투스는 지금 오성 전자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에릭슨의 비고 우드 박사 호텔을 직접 찾아갔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게 단순히 시선을 모을 용도란 말입니까?”
“후유.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임 부장이 부탁한 것도 있으니, 그 기준으로 해서 일단 대학 연구소를 한번 찾아봐. 지금은 차세대 LCD 하나에만 집중해. LCD가 아니라 LCD와 관련된 여러 부분을 거꾸로 파서 올라가는 것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연결된 실마리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 * *
조성돈 팀장이 주도한 KM 전자 기획 팀은 다시 차세대 LCD 관련 연구소를 조사했지만 딱 이거다 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차세대 LCD 관련 기술을 연구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정작 쓸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이보다는 뉴턴 메시지 패드에 적용된 TN 흑백 LCD 품질을 보고서야 한계를 느꼈다. 그들은 왜 에플 컴퓨터가 삽질했는지 몰랐는데, 뒤늦게 조사하고서야 이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이 말하는 차세대 LCD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는 알았다.
문제는 그 핵심 기술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을 경험하는 것은 딱히 기획 팀만이 아니었다.
오성 전자 권태성 기획실장 역시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 에릭슨에서 블루투스 프로젝트를 담당한 비고 우드 박사가 있는 호텔을 먼저 찾아갔다.
물론 비고 우드 박사는 권태성 기획실장의 만남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계속 뒤를 쫓은 덕분에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사님, 잠깐만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고 우드 박사는 집요한 권태성 실장을 떨치면서 후다닥 도망갔다.
권태성 실장이 보다 못해서 소리쳤다.
“K투스를 만든 사람을 압니다!!”
비고 우드 박사는 도망치다가 움찔 몸을 떨었고, 결국 호텔 라운지에서 권태성 실장 일행을 만났다.
간단한 소개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누굽니까?”
“제가 오성 전자 기획실장으로 K투스와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고 우드 박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돌아섰다.
“최, 최민혁 실장입니다!”
“최민혁 실장? 그게 누구입니까?”
“KM 전자의 기획실장입니다. IFA 강연을 하기도 했고, KMP-01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입니다.”
비고 우드 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야가 틀려서인지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름을 듣자 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런 사람이 K투스 표준을 만들어냈다는 말입니까? K투스가 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K투스는 단순한 로직이 아니에요.”
K투스는 물론 디지털 처리를 하는 파트가 있다. 그런데 이와는 독립적으로 RF 쪽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안테나 쪽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 RF 부분 스펙 자체는 간단해도 그걸 설계하는 부분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적인 설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디지털, 아날로그 설계를 동시에 해야 한다.
설계 이전에 무선 관련 부분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만으로 3~4년은 족히 걸리는 일이다. 실제로 블루투스가 나온 것은 6년이 지난 후다.
그것도 성능이 좋지 않아서 관심이 있는 기업이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쓸 만한 기술이 나온 것은 대략 8년 정도가 지난 후다.
비고 우드 박사는 어이가 없는 듯 계속 툴툴거렸다.
“당신네들 오성 전자는 남의 기술을 그냥 베껴서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히 블루투스와 같은 근거리 통신망 기술은 애초에 차원이 다릅니다!”
“…압니다.”
“아니, 몰라요. 그냥 돈이면 다 된다는 그 썩은 태도부터 바꾸어야 할 겁니다.”
“박사님, 말이 지나치십니다. 그래서 우리 오성 전자도 이번에 다른 기업처럼 블루투스 컨소시엄에 투자하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비고 우드 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우리 기술보다 더 발전된 K투스가 나왔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심각한 눈으로 비고 우드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K투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대안부터 찾으려고 했다. 정 안 되면 에릭슨 진영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K투스의 한계를 알면 얼마든지 최민혁 실장을 견제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K투스가 그렇게 발전된 기술입니까?”
“말을 하면 더 뭐 합니까. 지금 당장 무선 이어잭에 사용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 말은 다른 모바일 기기에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한 모든 근거리 기기에 말이죠.”
“설마요?”
비고 우드 박사는 혀를 찼다.
“오성 전자는 제대로 조사는 해보고 절 찾은 겁니까? K투스 때문에 블루투스를 접게 생겼어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란 말입니다!”
“…….”
권태성 기획실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는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그는 비고 우드 박사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K투스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제대로 깨달았다. 단순히 근거리 통신망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파트를 설계한 사람은 이주옥 과장을 도움을 얻은 최구만 과장이다.
RF칩은 조창호 부장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친 것이다.
마치 콜린스처럼.
비고 우드 박사 처지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작년부터 시작해서 삽질만 거듭한 채 아직도 헤매는 중이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쉬운 기술은 아니군요.”
비고 우드 박사는 그제야 안색을 굳혔다. 그는 권태성 실장 말이 그저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최민혁 실장이란 친구가 K투스를 고안한 것 맞습니까?”
“그게 사실…….”
권태성 기획실장도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막상 또 상대가 질문하니,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네 기업은 정말 모르겠어요. 과거 오성 전자 임원 마인드에 크게 실망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군요. 사람, 아니 기업 본성은 역시 바뀌지 않습니다!”
“…….”
권태성 기획실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욕적인 상대 반응에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최 실장…….’
* * *
최민혁은 기획 팀 행보를 지켜보면서 K투스에 대한 반응이 어떤지 지켜보았다. 그가 말로는 별거 아닌 기술이라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과는 달리 K투스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아니, 뒤늦게 숟가락을 얻는 이도 나왔다.
[근거리 통신망은 한 기업이 독점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이 기술은 모든 기업에 공개되어야 하는 기술입니다!]
남의 회사 기술을 강제로 강탈하자는 의견조차 나왔다.
최민혁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
‘하여간에 그놈의 탐욕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MP3에 연이어서 나온 K투스 기술에 관한 관심은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물론 에릭슨 측의 비고 우드 박사 측에서 계속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지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