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최민혁은 딱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팔로알토 네트웍스에 투자할 마음은 없지만, 첫 번째 미국 인맥으로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우영민 부장은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위치 자체가 산타클라라 소재로써 실리콘 밸리 부동산 상승세를 타는 곳입니다. 지금 이 가격에 나온 것은 팔로알토 네트웍스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민혁도 고민에 빠졌다. 그도 실리콘 밸리 땅값은 계속 오른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차라리 건물 4동을 모두 사들인 후에 필요한 건물만 사용하고, 나머지 건물은 임대를 내놓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직원 복지로 오피스를 제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부동산 매입 사유로도 나쁘지 않아. 이왕이면 주변 건물을 더 사들여도 괜찮을 것 같아.’
“벨린 소프트 설립은 어떻게 되었어요?”
“법인 설립에 필수적인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허가를 비롯한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입니다. 본사 위치는 네트웍스 본사 건물입니다.”
“건물 매입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요?”
“한 달 안에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될 겁니다. 급하면 그쪽에서 2~3층 건물 정도는 바로 빼줄 수 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는 4개 건물 모두 사용하는데, 대형 사이버 업체로 유명하다. MS도 고객사 중의 하나일 정도로 잘 알려졌다.
전 세계 직원 수만 5,000명이 넘었는데, 본사에만 무려 2,000명이 근무 중이었다.
다만 이 회사도 최근 사정이 안 좋았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여러 보안업체에 시장을 잠식당해서 적자가 올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대신에 차선이 바로 본사 건물 매각이었다.
최민혁은 그런 점이 이상했다.
“뜻밖이군요. 아무리 회사 사정이 안 좋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본사 건물을 매각할 의사를 보이지 않을 텐데요.”
“그게 조건이 일시금으로 지급할 때야 가능합니다.”
“다른 조건이라면 쉽지 않다는 말인가요?”
“이미 몇몇 미국 업체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이클 케이지 부사장 제안에 다들 고개를 절레 흔듭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조건이니까요. 소문으로 구조조정 할 생각도 있는 눈치였습니다.”
정확히는 글로벌 자산 투자 회사 몇 곳이 8% 기대 수익률을 노리고 오는 협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벨린 투자가 관심을 보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팔로알토 네트워크는 단기 유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실제로 지금 위기를 넘긴다면 차세대 방화벽 제품을 이용해서 후발 주자를 극복할 수도 있었다.
지금 회사가 휘청이는 것은 무리한 확장이 문제였다.
우영민은 최민혁 실장의 성격을 잘 알기에 적극 나섰고,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2억 달러가 좀 넘는군요. 그 큰돈을 일시불로 지급할 생각을 하다니.”
우영민 부장은 멋쩍은 표정을 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부동산 투자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장님이 이걸 원할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굳이 국내 부동산이나 주식 매각을 마무리한 이유라고 봅니다.”
“하하하, 좋네요. 제가 그래서 우영민 부장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일단 계약은 계약대로 진행하고, 벨린 소프트 사무실도 만드세요. 그리고 급한 대로 사람이 거주할 만한 건물 20곳도 마련하고요. 필요하면 그냥 건물을 매입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 이 건물들은 이번에 염두에 둔 친구들에게 직원 복지로 줄 생각입니다. 물론 집을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무상 렌트죠. 회사에 다니는 동안에 쓸 수 있게 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라면 실리콘 밸리 인재들도 많은 관심을 두겠군요.”
“그런 목적도 있어요. 여기 이 명단에 있는 친구들에 관한 조사도 같이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아, 이왕이면 우 부장이 미국에 직접 가서 빠르게 진행하세요. 건물 매입 계약과는 별개로 벨린 소프트와 벨린 투자 캘리포니아 지사 설립도 선행해서 진행하기 바랍니다. 그래야 스카우트하기 편합니다.”
“…네.”
우영민 부장은 갑작스러운 최민혁의 지시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제까지 조용히 있다가도 움직일 때는 정말 전광석화 같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최민혁은 이미 인사 팀에서 검토 중이기는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교차검증까지 진행했다. 정보는 많이 알수록 낫다고 판단했다.
‘계획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서 너무 성급하지는 않아. 차라리 이 시기에 미국 기반을 다져놓는 것도 좋지. 이번 미국행에 같이 갈 친구 명단도 추려봐야겠어.’
* * *
최민혁은 미국행 명단을 추리면서 인생 1회차 기억을 하나씩 노트에 적어나갔다. 그는 모바일 OS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역할을 써넣었다.
‘국내 MP3 OS 시장은 재미를 많이 못 봤어. 꼭 리눅스 타입 OS가 중심이 되어서라기보다는 역시 호환성 문제일까?’
지금의 MP3 OS를 개발한 오상현 과장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OS 품질 자체는 좋았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다.
호환성이나 이식성 문제는 쉽지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SDK 문제도 간단하지는 않았다.
지금 국내 게임 중소 업체에 외주 결과가 그 증거였다.
최민혁이 굳이 20개 외주 게임업체에 프로젝트를 준 것은 딱히 그들에게 뭔가 큰 기대를 했다기보다는 이식성 문제가 해결될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썩 좋지가 않았다.
동작은 하는데, 안정성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건 오상현 과장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그의 한계였다.
오상현 과장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는 결국 고민을 한 끝에 오상현 과장을 호출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 MP3 OS가 최선인지 간단하게 대답해 보세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MP3 OS를 가지고 응용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어요. 하드웨어가 바뀌면 그때 가서 작업하겠다는 것은 효율성 문제입니다.”
“그거야…….”
오상현 과장은 간단히 대답하면서도 크게 당황했다. 최민혁 실장이 호환성이나 이식성 문제를 걸고넘어질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오성 전자 내에서 최고의 OS 엔지니어답게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정확히는 리눅스 타입의 문제입니다. 리눅스는 어떻게 보면 커널뿐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가 결합하면서 비교적 완전한 운영 체제가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커널에 다른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
오상현 과장도 나름 자신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따로 추가했다. 그는 리눅스 커널을 입맛대로 다루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OS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MP3 OS에 사용되고 있는 OS다.
따라서 근본적인 한계가 많이 존재한다.
이식성과 호환성 문제를 고려해서 계속 작업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런 부분은 취약했다.
최악은 아예 설계를 다시 해야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그래머 실력 문제와 제품의 안정성 문제는 좀 달랐다.
게임과 같은 응용프로그램을 올리는 것이 한 예이다.
오상현 과장은 최민혁의 따가운 시선을 보다가 결국 푸념을 털어놓았다.
“…강준석 씨 기획안에 따르면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통한 정보교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푸념을 넣어놓은 오상현 과장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에게 이 부분은 말씀드려야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될까 싶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딱히 오상현 과장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대기업의 전형적인 문제였다. 하드웨어와는 달리 소프트웨어는 주먹구구식으로 쥐어짜면 쉽게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고질적인 문제를 파악하자 오히려 피식 웃었다.
“직원 문제입니까?”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오성 전자와 같은 다른 대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적에만 치중해서 완성도가 높은 결과를 도출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상하군요. 제가 다른 대기업처럼 요구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압니다. 그런데 제가 해왔던 일 대다수는 이미 오성 전자에 있을 때…….”
잘못된 시작이다. 오상현 과장도 딱히 그러고 싶어서가 그런 것이 아니다. 오성 전자에 있을 때 위에서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리는 무리수를 둔다. 결과는 결국 꼬이고, 꼬여서 안 좋은 형태로 나타났다.
선행 개발물이거나 아니면 무난한 제품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형태는 이야기가 다르다.
최민혁은 자신이 원한 답을 듣자 오상현 과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가 있어요. 오 과장님은 자신이 한 결과물이 고작 국내에서만 노는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원합니까?”
“…그거야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한 실적을 스스로 버려야 하는데, 할 수 있겠습니까?”
“…….”
오상현 과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에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민혁이 원하는 것이 자신이 한 모든 것을 다 갈아엎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콜린스 대박 신화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 통한다. 아니,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도 있다.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내색할 수 없었다. 최민혁은 그 이상을 보는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한 가지 호기심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뭐로 대체한다는 말입니까?”
“Darwin입니다.”
“Darwin이라…….”
Darwin은 커널로 이루어진 리눅스와는 달리 XNU 커널 기반으로 혼자 돌아가는 완전한 운영 체제다. 따라서 통일성만 놓고 본다면 리눅스보다는 나은 편이다.
물론 최민혁은 이런 기술적인 점 때문에 Darwin을 언급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스카우트하려는 이들이 이 Darwin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들이 모바일 OS 시장 일부를 석권한 사람이니까.’
최민혁도 이 부분에는 처음부터 선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앞으로 인생 1회차 지식을 맹신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따지고 보면, 강준석 씨 덕분에 깨달았으니까.’
그 자신은 인생 1회차의 단편적인 미래를 알아도 세세한 부분까지 모른다. 리눅스 커널과 Darwin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은 사업적인 면에서 누가 승자가 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오상현 과장을 압박한 것도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를 바라서 였다.
오상현 과장은 머리를 한창 굴리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실장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오상현 과장도 말을 해놓고서야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가만 혹시 Darwin 쪽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그제야 방긋 웃었다.
“속일 수가 없네요.”
“으음.”
오상현 과장은 그제야 최민혁 말뜻을 알아듣고는 힐끗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오성 전자의 그 꼰대가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강요 같은 강요를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최민혁의 얼굴을 봐서는 또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국내에서 나름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닥이 좁아서 그런데, 혹시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바닥이 아니라 해외 바닥입니다. 아마 이름만 들어서는 모를 겁니다. 다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오상현 과장님이 한 작업을 Darwin에 포팅하는 겁니다. 그러니 중심은 여전히 오상현 과장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독단적으로 움직여서는 곤란합니다. 그들과 손발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
오상현 과장은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최민혁은 그런 오상현 과장 마음을 잘 알았다.
“아마 오 과장님도 그들을 보면 꽤 흥미를 느낄 겁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들은 OS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들이니까.”
오상현 과장도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최고의 천재라 말에 자신이 생각한 스케일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실장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는 일은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