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아냐. 최 팀장님 이야기로는 최 실장님이 초기 설계안을 다 내놓았댔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여기까지 나온 거야.”
“…신기하네요.”
이주옥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역시 KM 전자로 와서 느낀 가장 큰 의문이 자꾸 나오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위에서 툭툭 나오는 기술은 다른 곳에서 볼 수가 없는 기술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결국 ‘최민혁 실장님은 의문투성이다!’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다 김창호 부장에게 전화 연락을 받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히 최구만 과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지시를 받았기에 기획 팀이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김창호 부장까지 같이 올지는 몰랐다.
‘귀찮은 양반이 또 왔어.’
* * *
최근 콜린스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서 부품 관리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김창호 부장은 안산 공장 연구소 안에 들어와서도 푸념을 털어놓았다.
“여, 최 과장, 정말 오랜만이야. 아주 신수가 훤해졌어?”
김창호 부장을 피해 다닌 최구만 과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는 동행한 기획 팀이나 강준석 팀은 아예 신경 쓰지도 못했다.
“큼, 죄송합니다. 자주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창호 부장은 최구만 과장 옆에 바짝 붙어서 쿡쿡 밀었다.
“그런가? 또 최 실장님 핑계를 대려고?”
최구만 과장은 불편한 얼굴을 한 채 슬쩍슬쩍 뒤로 물러났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김창호 부장은 코 밑으로 내려간 안경을 위로 올리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물건을 그따위로 만들어 놓고, 난 모르는 사람인 양 그러고 다녀도 괜찮아?”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공장 분위기 파악하면 그런 말이 안 나올 걸, 다들 벼르고 있어.”
그제야 최구만 과장도 슬쩍 고개를 숙였다.
“저도 공장에 착 달라붙어 있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 됩니다. 최 실장님이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데, 제 능력 밖의 요구가 많습니다.”
“그놈의 입만 살아서는.”
최구만 과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공장 분위기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나만 해도 3주 내내 공장에서 살았어. 요즘 내 딸내미가 내 얼굴을 기억 못 해!”
푸념이지만 딱히 단순히 불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안산 공장 임직원은 전부 다 비상 대기다. 콜린스 판매를 시작한 후에 들어오는 불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부품 불량도 있었는데, 업체와 중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주문량이 최근 와서 대폭 늘어났다.
단순히 해외 바이어 반응만이 아니라 국내 판매도 대폭 늘어났다.
김창호 부장은 최구만 과장에게 한 소리 하려다가 책상 위에 놓인 새로운 칩 테스트 진행 설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처음 보는 작은 보드에 장착된 칩 테스트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뭔가?”
“아, 전원 칩 테스트용입니다.”
그는 콜린스와는 전혀 다른 타입에 고개를 갸웃한 채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대형 TV에서 사용되는 부품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설마 신제품에 들어가는 거야?”
이 자리에서 자세한 내막을 말할 수가 없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신제품 비슷합니다. 이 전원 칩은 이주옥 과장이 과거 했던 제품 개발에 비해서 도움을 많이 얻었습니다. 생소한 일이라서 고생도 많고요. 이것 때문에 콜린스 쪽은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최구만 과장을 타박하던 김창호 부장도 더 반박하지 못했다. 그 역시 딱히 자기 업무 영역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 신기했다. 최구만 과장은 이런 아날로그 칩 설계에 경험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본사에서 진행하는 일이 이거였군.”
“그때는 아직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공장 쪽에는 말하기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이제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으니, 본격적으로 이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래?”
김창호 부장은 최구만 과장 이야기가 골치 아픈지 그다음은 더 듣지 않았다. 그는 지금 콜린스 생산 문제와 중소형 콜린스 개발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특히 중소형 콜린스는 기존 대형 콜린스를 다운그레이드한 타입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이 프로젝트 때문에 공장 내의 연구소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김창호 부장은 최구만 과장의 도움을 얻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가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왜 최구만 과장이 이 자리에 오라고 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획 팀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묘한 분위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임웅 대리가 다시 박광민을 슬쩍 밀었다.
박광민 사원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임웅 대리를 째려본 후에 눈치껏 입을 열었다.
“아, 이 친구들을 콜린스 생산 팀에 투입해서 맛만 보게 하면 됩니다.”
“공장 경험을 미리 쌓도록 해달라는 소리 맞지? 그런데 이제 막 신입 사원 교육 받는 친구들을 공장에 투입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아?”
“하지만 양산 경험이 전혀 없으면 앞으로 일을 풀어가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최 실장님의 의견입니다. 자신이 진행한 기획안을 끝까지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작 1주일 경험으로 효과가 있을까?”
“그래도 아예 모르면 머리만 굴리는 방식으로 일해서 생산성이 떨어지니, 비록 효과는 떨어지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알겠네.”
김창호 부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산 경험이 전혀 없으면, 자기가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모를 수가 있어. 결국, 단기에 최대한 굴려서 감을 잡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리인데…….’
그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직접 경험한 터라 이 갑작스러운 일에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강준석 팀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능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최 실장님이 이렇게 끼고 도는 것일까?’
그로서는 신입 친구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강준석 팀은 김창호 부장 표정이 사늘하게 변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어수룩하게 굴릴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 * *
강준석 팀은 안산 공장에 내려오기가 무섭게 콜린스 조립 설비에 들어갔다.
이미 공장 라인에 있던 책임자는 김창호 부장에게 지시를 받아서인지 야릇한 표정으로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어서 와, 생산 라인은 처음이지?”
“네, 잘 부탁합니다.”
힘찬 모습을 보였지만 라인 실무진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음흉한 시선으로 신입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물론 초짜인 그들이 중요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부품 처리와 같은 간단한 일을 주로 하면서 콜린스 조립 라인에서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간단한 조립을 맡았다.
그런데 이 일이 생각보다는 중노동이다. 콜린스가 대형 TV인 까닭에 조립 공정에 끼어드는 것만으로 쉽지가 않았다.
쉽게 말해서 무겁다는 소리다.
특히 날카로운 부분에 잘못 스치기라도 하면 상처도 쉽게 생겨났다.
강준석조차 질겁했다.
그중에는 불량품을 따로 걸러내는 일도 있었다.
김창호 부장은 아예 자신이 나서서 이들 일을 돌봐주면서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해 주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딱 한 번에 가자. 제대로 못 하면 몸으로 떼울 수밖에 없어. 여기 다른 직원과는 달리 자네들은 특별 대우를 받기 때문에 하루 16시간 정도 일하게 될 거야.]
[…네.]
‘젠장, 이건 노동 착취잖아.’
16시간에 말에도 강준석 팀은 차마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들도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했기에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일주일에 걸쳐 진행된 이 일은 생각 이상으로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강준석은 군 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질적으로 강도가 올라간 공장 라인은 더 끔찍했다.
더욱이 콜린스 물량이 밀린 덕분에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에서 죽으라고 일을 해야 했다.
보통 신입 사원이라면 기가 죽을 일이고, 불만이 나올 일이다.
하지만 강준석은 불평불만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지시에 따랐다.
그는 이 지시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자신이 만든 기획안과 현실이 좀 다르다는 점이다.
‘…이건 아니구나.’
강준석 본인 딴에는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짜깁기해서 그럴듯한 기획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콜린스 조립 라인을 경험해 본 후에 다양한 문제점을 찾아냈다.
‘젠장맞을, 이거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냐?’
그래서 권우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기획안이 채택된 이유를 잘 모르겠어.”
“공감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권우영은 다른 팀원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낙하산 인사가 있나 싶었다. 간단한 호구 조사가 이어졌는데, 그런 경우는 없었다. 가장 잘나가는 친구가 고작 아버지가 중견기업 부장이었다.
“우리가 왜 선택이 된 것일까?”
다른 이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준석만큼은 부족한 점을 파악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느꼈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 얼굴을 떠올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미 이것을 다 알고 있었어.’
* * *
점점 적응해 가는 강준석 팀과는 달리 마른 체형의 이주옥 과장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조창호 차장의 제안을 받아서 냉큼 KM 전자로 옮겼다.
정작 옮기고 나니 새로운 사업부 쪽에 소속될 줄 알았는데, TV 사업부 쪽으로 내려왔다. 그렇다고 TV 사업부 소속도 아니었다.
최구만 과장은 이주옥 과장을 계속 위로했다.
“조금만 참아. 이게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사내 시스템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안산 공장 직원과도 잘 적응하지 못한 상황이다. 아마 다른 회사였다면 당장에 때려치우고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주옥 과장은 최근 KM 전자 주가가 다시 20만 원을 돌파한 것을 보자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오성 전자에 아는 지인조차 자신에게 연락해서 사내 추천을 해달라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 일주일 만에 피로에 파김치가 된 강준석 팀을 보면서 혀를 찾다.
“설마 저도 생산 라인 경험이 없다고 콜린스 생산 라인에 투입하는 것은 아니겠죠?”
최구만 과장은 두려움에 몸을 떠는 이주옥 과장을 위로해 주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쟤들 보니, 그 말을 믿기가 어렵네요.”
좀비처럼 팍 썩어 있는 강준석 팀은 사회 경험이 처음이라서 죽을 맛이었다. 그들은 직장 생활이 항상 이런가 싶어서 기가 팍 죽었다.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이해한 것과 공장에서 중노동을 경험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최구만 과장은 축 처져 있는 강준석 팀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 재들은 좀 특이한 경우잖아. 최 실장님이 작정하고 밀어주는 것 같으니까.”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제품 양산 경험을 쌓도록 하는 의도는 이해가 되는데, 저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글쎄.”
최구만 과장도 딱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최민혁 실장에서 따로 지시를 받았다. 결국, 그도 강준석 팀 옆으로 가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최 실장님의 의도는 알겠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
아니, 그는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만약 강준석 팀이 내놓은 결과물이 기대 이하가 된다면 최민혁 실장이 ‘어, 겨우 이거야?’하고 넘어갈 양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작정하고 더 굴릴지도 몰라. 그건 진짜 아니잖아.’
“자자, 강준석 씨, 조금만 참자. 이번만 견뎌내면 더 이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모두 힘내자, 파이팅!”
“…….”
강준석 팀은 지쳐서 ‘파이팅!’ 할 기운조차 없었다.
* * *
김창호 부장은 처음에는 약간의 의구심과 불만을 가지고 최민혁 실장 지시대로 따랐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강준석 팀 적응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제법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