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12화 (312/1,021)

#312.

“너무 억울했습니다.”

“이 새끼야, 민혁이 그 새끼가 어떤 놈인지 이제는 충분히 알 것 아니냐. 그런 놈이 구치소에서 풀려나기가 무섭게 최민혁을 찾아갔어? 민혁, 그 새끼가 다시 협박범으로 고소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냐?!!”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아들 김기범 모습에 김용만 전무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최민혁 그 새끼에게 초기 자금 40억을 투자한 사람이 저에요. 벨린 투자금도 최민혁 그놈이 차명으로 밀어 넣은 금액이란 말입니다.”

“그거야…….”

김용만 전무도 뒤늦게 과거 일을 떠올렸다. 저 투자에 대한 내막은 그 역시 잘 알았다. 자기 일이 아니라서 간과하고 말았다. 막상 김기범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김기범은 억울한 사람처럼 계속 하소연했다.

“지금 주가 기준으로 무려 3,000억이 넘는 돈입니다.”

“하지만 이미 중간에 정상을 다 받았잖아?”

“그게 사기죠!”

이마를 잡은 김용만 전무는 한동안 아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도 뒤늦게야 최근 벨린 투자의 지분 매각 소식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팠다.

김기범 말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 자신조차 아들놈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00억이라니.’

하지만 그도 DL 전자 법무 팀을 불러 상의해도 답이 없다는 것을 알자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보다는 김기범이 문제였다.

“너도 재열이 소식 들었지?”

“하, 그 병신이 제대로 사고 쳤더군요. 지금 봐서는 형량이 최하가 10년은 나올 텐데,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잘 아는 놈이 그런 짓을 저질러?”

“전 최소한 어린애들이랑은 안 놀았습니다.”

“그게 자랑이다.”

“제 말은 지켜야 할 선은 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김용만 전무는 한동안 김기범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도 제발 조심해라. 특히 민혁이 그놈 근처에도 가지 마.”

“알았어요.”

“아니, 진담이다. 지금 네 할아버지도 최민혁 문제 때문에 잔뜩 열받아 있다. 괜히 실수하다가는 넌 끝장이다.”

김기범 역시 DL 그룹 사태를 집사 변호사 통해서 들었다.

“…그렇게 심각해요?”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해. 고객의 계약 해지가 주춤하기는 했지만, 신규 가입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다른 대기업이 우리 고객을 빼갔다.”

“하지만 오성 생명도 이번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는데요?”

“타격을 받았지. 하지만 DL 화재와 계약을 해지 한 사람이 오성 그룹을 비롯한 다른 대기업 보험 계열사 쪽으로 돌아섰어.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김상구 회장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지속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힘이 있는 대기업 보험 계열사는 마치 한통속이라도 된 것처럼 DL 화재를 뜯어 먹었다. 어이가 없는 것은 공정위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도 이를 의도적으로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번 일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손해를 본 권력자가 손을 잡은 것이었다.

“…….”

김기범도 굳은 얼굴을 한 채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사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군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첫째 큰아버지 능력만은 인정합니다. 그렇게 순순히 당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네 말이 맞다. 형님 능력이 대단해서 이렇게라도 막아낸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아.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최민혁 그놈 짓이란 말이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최민혁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그 난리를 친 거야?!”

“…죄송해요.”

고개를 푹 숙인 김기범은 차마 더 분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꿈인가 싶었다. 최민수가 왜 굳이 지난 일을 잊고 화해의 손을 내미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질문했다.

“그런데 최민혁 그 새끼 정략결혼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오성가의 사위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 서자가 어떻게 오성가와 인맥을 맺습니까?”

“후유, 그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저, 정말입니까? 안건민 회장이 정략결혼을 용납한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안건민 회장이 주도한다는 소리가 파다하더라.”

“마, 말도 안 됩니다!”

김용만 전무도 한숨을 내쉬다가 담배 하나를 꺼내서 피웠다. 그 역시 이번 일을 도저히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 쪽에서 난리가 난 것을 봐서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소송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도 이번 일만큼은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두고 보겠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김용만 전무는 오히려 쓰게 웃었다. 그는 최민혁 그놈이 부담스러워서 지켜만 보기로 했다는 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 쪽보다 더 답답한 사람이 있어. 그러니 굳이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

“최문경 부회장 말입니까?”

“그래. 최민수 얼굴 보면 알 것 아냐.”

“아, 하긴 민수가 면회 온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번 일 때문이었군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황당하네요. 오성가와 혼사라니.”

한때는 오성가 쪽에 혼사를 이야기했다가 개 쪽을 당한 김기범 처지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 *

김용만 전무의 말처럼 최민혁의 정략결혼설 때문에 시끄러운 곳은 그 어는 곳도 아닌 최문경 부회장 쪽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나서서 어떻게 이번 정략 결혼설을 막으려고 했지만, 아예 통하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아내 김이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이경 여사 역시 어이가 없었지만, 이번 일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영주 여사를 직접 찾아갔다.

“어머님, 정말 이 혼사를 추진하실 겁니까?”

도끼눈을 한 첫째 며느리를 보자 이영주 여사도 한숨을 내쉬었다.

“며늘아기야, 이번 일은 나도 아무런 힘이 없어. 오성가 쪽에서 일방적으로 미는 것이니까.”

“그건 이미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알아요. 아니, 어머님도 생각을 해보세요. 민혁이가 서자잖아요. 그런 애가 과연 오성가 사위가 되어서 제대로 숨 한 번 쉴 수나 있겠어요?”

“글쎄다. 내가 듣기로는 반대라고 하더구나. 무궁화 위성 퓨즈 사태도 민혁이 그 녀석이 해결해서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고 해.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과연 손자 녀석을 구박할 수 있을까?”

“어머님!”

“야, 시끄럽다!”

“죄송해요. 하지만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오성가에서 우리 민혁이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수작일 뿐입니다.”

“흠.”

이영주 여사가 따가운 눈으로 김이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기로 최민혁을 가장 괴롭힌 사람 중의 하나가 김이경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인제 와서 최민혁을 끌어안은 것처럼 이야기하니, 어이가 없었다.

김이경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은 집안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우리 집안이 한쪽으로 기울이진 경우에는 절대로 혼사를 승낙할 수 없습니다!”

“며늘아기야.”

“네, 어머님.”

“너 아직도 착각하나 본데, 이번 일은 내가 주도한 것이 아냐. 오성가 사모님이 먼저 알아보고 제안을 한 거야. 그리고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도 아냐. 콜린스 매각설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야.”

“그래서 더 허락할 수 없잖습니까. 이번 일을 기회로 콜린스 사업부를 헐값에 사들이려고 하는 수작 아닙니까. 아니 우리 민혁이가 뭐가 답답해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입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집요한 김이경은 마치 불경을 암송하는 불자승처럼 이영주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이영주 여사도 질려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이경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다.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혼사는 절대로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다른 처자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아셨으면 합니다.”

“…….”

이영주 여사는 김여경의 기세에 눌려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늘 조용하던 사람이 저렇게 날뛰니,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다.

* * *

콜린스 매각설과 정략결혼설은 시간이 갈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언론조차 KM 전자 주가 폭등 때문에 이 정략결혼설을 심각하게 다루었다.

[최민혁 실장은 과연 오성가의 사위가 되는 건가?]

[오성가는 외 최민혁 실장과의 혼사를 추진하는 건가?]

[오성가가 이번 정략 결혼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콜린스 사업부인가?]

KM 전자 주가는 이 설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5만 원에 안착한 이후에 조정을 받으면 13만 원과 17만원 선 사이를 오락가락했기 때문이었다.

벨린 투자는 덕분에 지분을 계속 팔아치워서 재미를 단단히 봤다. 무려 3,300억을 추가로 팔아치웠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벨린 투자는 현금 보유고를 무려 7,500억까지 끌어올렸다.

이 사태를 시기하고, 위험성을 느낀 이들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최동영 상무조차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 도움을 얻어서 KM 건설을 계속 괴롭힌 악성 사업을 털어냈지만 그렇다고 최문경 부회장 편을 들지 않았다.

그 역시 촬영장을 찾아갔다.

하이에나 촬영장은 평소와는 그 열기가 많이 달랐다.

“컷컷컷!”

분노한 심진모 감독이 김승연 위에 올라탄 채로 있는 최재현에게 달려갔다.

“재현 씨,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아니, 강간을 그렇게 혐오스럽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감정선을 건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네?”

“강간 때문에 김승연 씨가 최재현 씨에 대한 감정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강간이 그렇게 극단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제 말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강간을 어떻게 좋은 강간으로 묘사하란 말입니까?”

“그게 연기력이죠. 제가 최재현 씨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건 김승연이 최재현 연기를 받쳐주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김승연의 예민한 분위기가 죽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문제는 김승연에게 있는데, 자꾸 자신 탓을 하는 최재현은 심진모 감독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억울한 감정을 참은 채 심진도 감독을 째려봤다.

심진모 감독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촬영장 밖에 도착한 밥차였다.

“어?”

다른 스텝도 뒤늦게 또다시 찾아온 밥차에 혀를 내둘렀다.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계속되는 밥차 행렬이 부담스러웠다.

정미선은 막 자신이 다음 신에 들어갈 찰나에 생긴 일이라서 또 누군가 싶었다.

경호원에 둘러싸인 채 다가오는 슈트 가이는 뜻밖에도 최동영 상무였다.

“제수씨, 안녕하세요.”

“아, 설마 셋째 아주버님?”

단아한 최동영 상무는 어지간한 연기인 못지않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감정을 잘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실제로 최씨 일가 중에 최병문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좀 늦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따가운 심진모 감독 시선에 다급하게 ‘시아버님의 셋째 아들입니다!’라고 속삭였다.

“……!”

심진모 감독은 최문경 부회장에 이은 최동영 상무 방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스텝에게도 말해 일단 촬영을 중단했다.

“밥 먹고 합시다.”

* * *

심진모 감독은 경호원 보호를 받은 채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면서 음료수를 들이켰다.

마가 껴서인지 계속 촬영이 방해받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하소연하기에도 그랬다.

최재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미선 씨를 이대로 둘 겁니까?”

“별수가 없잖아.”

“제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알아. 정 억울하면 자네가 직접 미선 씨에게 항의를 해봐.”

“아니, 배우 나부랭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재벌가에 항의를 합니까?!”

“그러면 닥치고 있던지.”

“아니, 감독님, 정말 이번 영화는 포기한 겁니까. 이대로는 안 됩니다!”

“…방법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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