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05화 (305/1,021)

#305.

ETRI 위성 사업부의 박재호 실장과 김승구 팀장을 떠올린 권태성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잘 압니다.]

[그쪽을 통해서 무궁화 위성 사업에 대해서 우리 기획 팀에서 검토를 해봤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더군요. 위성 발사에 대한 협상에서 돈을 제법 아끼려고 한 겁니다.]

[그거야 경비를 아끼려고 한 것 아닙니까.]

[물론 일반적인 위성 부품은 그렇습니다만 연료통 점화 퓨즈는 이야기가 좀 다르죠. 자칫하면 불량이 생길 수가 있어요.]

[설마 록히드 마틴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전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록히드 사람이라고 권태성 실장님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확인은 간단해요. 연료통 점화 퓨즈 제조사와 제조일을 확인하면 되니까. 나머지는 권 실장님이 알아서 해야 할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

권태성 실장은 한동안 수화기를 든 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 말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일까?’

* * *

막연한 말에는 사람이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언급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더욱이 그 대상이 주인이라면 무조건 의심할 수는 없다.

권태성 실장이 그랬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조언을 듣기가 무섭게 연료통 점화 퓨즈에 대한 문제를 계속해서 지적했다.

심지어 록히드 마틴, 정부 관계자, ETRI 연구원을 비롯한 이번 무궁화 위성과 관련된 실무자가 모인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번 무궁화 위성 제작과 관련해서 부품이 대대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성 제작 단가 때문으로 압니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하자는 겁니다.]

권태성 실장의 주장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ETRI 디지털 위성 발사 팀 연구원 도움을 얻어서 문제가 될 만한 부품을 일일이 지적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냥 끝나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절박했던 것이다.

[만약 이번 무궁화 위성 발사가 실패로 끝난다면 우리 오성 전자는 수천억의 손실을 보게 됩니다. 정보 통신부를 비롯한 다른 정부 부처 역시 타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저 역시 책임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이번 일 때문에 비웃음을 살지언정 이번 일은 반드시 확인해야겠습니다!]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의 이런 모습은 오성 전자 내에서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큰 불협화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상황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제조일과 제조사에 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상황이 바뀌었다.

록히드 마틴도 바보가 아닌데, 이상한 싸구려 부품을 쓸 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 무궁화 위성은 한국 정부가 계속 협상하면서 돈을 깎았다.

결국 록히드 마틴 측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이익을 좀 더 보기 위해서 이왕이면 가장 저가의 부품을 선택했다.

대대적인 교체가 아니었다.

위성 부품 중에서 그럭저럭 남아 있는 재고를 최대한 활용했다.

연료통 점화 퓨즈도 그런 부품 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제조 기한이 무려 1년이 넘었다. 이 사실은 록히드 마틴에서 부품 데이터베이스를 돌리고 난 후에 바로 찾아냈다.

그리고 추가 검사가 진행되었다.

결국 6번 연료통 점화 퓨즈 문제가 드러난 것이었다.

무궁화 위성 발사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드러난 이 문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록히드 마틴은 부랴부랴 사과했고, 이번 일에 관한 책임을 지겠다고 발표했다.

“…….”

권태성 실장은 기쁨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 속에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만약 무궁화 위성이 그대로 발사되었다면 최악에는 무궁화 위성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사, 살았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왜 디지털 위성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인지 깨달았다. 만약 무궁화 위성 사업에 문제가 생긴다면 최소 6~7년 후에나 무궁화 위성 발사가 가능했다.

결국 디지털 위성 사업은 그때까지는 다 올 스톱이라는 의미였다.

“…….”

임권수 부장 역시 교수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권태성 실장은 잘하면 책임에서 피해갈 수 있어도 그는 무조건 아웃이기 때문이다.

황광수 차장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저도 권 실장님이 너무 최민혁 실장을 의식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의식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후유.”

여전히 심호흡만 하는 권태성 실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이 무서웠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진행 시작부터 시작해서 무궁화 위성까지 이어진 모든 일에 최민혁 실장은 알게 모르게 관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도대체 최 실장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안 것일까? ETRI 측 말로는 자신들 쪽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했어. 위성 부품은 따로 알 수가 없다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최민혁에게 질문하기도 그랬다.

설사 질문한다고 해도 제대로 답을 해줄 리가 만무했다.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이 요구한 일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자. 방송국에 힘 좀 쓰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으니까.’

* * *

남수현 변호사 뉴스 인터뷰는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

인터뷰상에서 남수현 변호사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선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판결을 결정하는 것은 언론이 아닙니다. 오직 증거와 증인을 통해서 판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원칙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별다른 것이 없는 인터뷰 내용은 처음에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보다는 남수현 변호사에 대한 흑색선전이 더 일어났다.

하지만 소송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증인으로 나선 이상수 과장이 점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상황이 점점 달라졌다.

DL 화재의 남수현 변호사에 대한 공세 자체가 이 증인과 증거에 묻혀 버렸다.

이 과정에서 메이저 방송사뿐만 아니라 언론사도 남수현 변호사 인터뷰를 계속해서 보냈다. 언론사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남수현 변호사를 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DL 화재에서 남수현 변호사를 공격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 생생한 증인과 증언이 반사적으로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DL 화재 직원이 돈을 노려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조차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보통 뉴스는 묻히기 마련인데, 이 경우는 오히려 반대였다.

DL 화재가 언론을 이용해서 강하게 나갈수록 남수현 변호사의 주장이 오히려 더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이런 변화에도 묵묵히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재판을 결정하는 것은 증인과 증거에 따릅니다. 그 어떤 외부 요인이 이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여론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앞뒤 꽉 막힌 남수현 변호사의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은 그 답답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오히려 이런 모습이 신뢰도 주었다.

바로 정의의 변호사.

공정한 변호사.

법과 원칙에 충실한 변호사.

어떤 역경에도 진실을 이길 것이라고 믿는 신념의 변호사.

그 사람이 바로 남수현 변호사다.

자연스럽게 뒤를 이어서 남수현 변호사의 지난 행적에 관한 기사 나왔다.

그 내용은 처음 언론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황당한 사실은 허위 사실을 퍼뜨린 언론사와 진실을 기사화한 신문사가 똑같다는 거야!]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남수현 변호사는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기사는 이전과 지금이 또 달랐던 것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역시 DL 그룹 김상구 회장이었다.

이번 일은 소송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론을 통한 여론 플레이가 들통이 난 점이 더 컸다.

“기가 막히는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런 경우는 나도 상상을 못 했어.”

김상구 회장조차 이번 일에 대해 영문을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그는 남수현 변호사가 보인 행동에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남 변호사 이 친구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남수현 변호사는 원래 부장 검사일 때는 꽤 청렴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좀 달라졌다는 거냐?”

“네. 위에서 휘둘리기 시작하면서도 자기 일에 환멸을 느꼈고, 생존을 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아치 검사와는 좀 달랐습니다.”

김상구 회장은 혀를 찼다. 딱 들어보니, 믿을 만한 친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번 소송에서 자기 반대편에 서버린 것이었다.

“그래? 괜찮은 친구군. 하지만 하필이면 그런 친구가 우리 상대라는 것이 아쉽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단순히 남수현 변호사가 정의의 변호사이기 때문에 변한 것이 아니었다.

언론사에서 갑자기 남수현 변호사를 밀어준다는 점이 문제였다.

“혹시 남수현 변호사 이 친구 배후에 누가 있지는 않았어?”

“제가 확인한 바로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겉으로는 드러날 리가 없겠지. 그러면 최민혁 그놈 짓이군.”

“그런데 또 그게 묘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성 전자 측에서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그놈이 왜 갑자기 끼어들어?!”

“그게 이번 특정금전신탁 때문에 보복이라는 설이 파다합니다.”

“끙.”

김상구 회장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자신조차 이번 일 때문에 손해를 입은 대기업 총수를 만나서 사과했다.

그런데 아직 그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해외에 나가 있는 대기업 총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재산상에 큰 피해를 입은 대기업 총수가 그냥 이 일을 넘길 리가 만무했다. 그중에는 오성 그룹도 있었다. 문제는 오성 생명 손실액은 김상구 회장이 말로 무마할 수준이 아니었다.

“골치군. 최 회장이나 최 실장은 어때?”

“아닙니다. 그쪽에서 특별히 이번 일로 움직인 흔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방송사 국장도 최민혁 실장을 이 일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합니다.”

“정말 안건민 회장 짓이란 말인가?”

김상구 회장도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다. 안건민 회장은 최용욱 회장처럼 쉽게 처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자칫 DL 그룹이 안 회장 눈 밖에 벗어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번 특정금전신탁을 빌미 삼아서 중앙지검 쪽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이가 바로 안건민 회장이기 때문이다.

“일단 문제가 되는 원인은 남수현 변호사잖아.”

“…제가 남 변호사를 다시 만나보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괜히 구설에 올랐다가는 더 상황이 꼬일 거야. 차라리 상대 변호사를 만나서 적당히 타협하는 방향으로 가.”

“네?”

김상구 회장도 이번 일에 어떤 형태로든지 안건민 회장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성 그룹은 KM 전자와는 상대가 달랐다.

“이미 우리가 졌어. 남수현 변호사는 대기업을 상대하는 정의의 검사잖아. 그것도 법과 원칙에 충실한 이미지를 굳혔어. 그런 상대와 계속 싸워봐야 우리만 나쁜 놈이 될 뿐이야.”

“하지만 피해가…….”

“차라리 순순히 인정하자. 너 설마 오성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김희찬 부사장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꼬일지는 상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 * *

갑작스러운 기자 회견이었다.

김희찬 부사장이 DL 화재를 대표해서 이번 소송에 대해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DL 화재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에 따른 피해를 당한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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