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93화 (293/1,021)

#293.

물론 최민혁으로서는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아쉽네요.”

“당분간은 회사 내부에 손을 쓰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정리하는 것이 좋죠. 만약 조직이 커지고 나면 손을 쓰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실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봤을 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죠. 어차피 실장님이 할 일은 산적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안산 공장 내부 분위기를 계속 살펴보는 것으로 하죠. 만에 하나가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최민혁의 태도에 김명준 과장은 혀를 차고 말았다.

실제로 최민혁은 이번 보복전을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김명준 과장이 사무실을 비우자 DL 그룹을 파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DL 전자 재무제표와 매출 현황을 확인하다가 곧 생각을 바꾸었다. 노조를 이용해서 설사 DL 전자에 파업을 조장한다고 해서 큰 타격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DL 화재가 문제인데…….’

문제는 이 DL 화재는 KM 산업처럼 최민혁 자신의 연결 고리가 없었다.

최민혁이 번거롭게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 참석해서 최문경 부회장 영향력을 줄이는 방법을 택한 것도 차선책이다.

그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나서 DL 그룹 전체를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하농 인수.

최민혁 자신이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갈등을 일으킨 것 때문에 DL 그룹의 하농 인수도 이런저런 고비를 맞았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하농 인수로구먼. 차라리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좀 더 갈등을 부추겼어야 했나. 아니, 그건 어려워.’

하농 인수 과정은 드러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 기업의 설립자는 김창업과, 정봉삼이었는데,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좋았다.

문제가 생긴 것은 두 사람이 죽고 난 후다.

김창업의 사위가 사장이 된 후에 정봉삼 일가를 경영에서 배제했다.

당시 두 창업 일가의 지분은 대략 24%, 22%으로 비슷해서 갈등이 커졌다.

이때 끼어든 것이 바로 DL 화재였다.

주주 지분도 인수하고, 공개 매수도 해서 34%까지 지분을 끌어올렸다. 더욱이 정씨 인가의 도움을 얻어서 경영권을 얻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DL 그룹은 특정금전신탁이라는 기발한 방법을 사용했다.

특정금전신탁은 은행에 유가 증권이나 대출과 같은 신탁재산 운용 방법을 지정한 것이다. 자기 돈이 아닌 고객의 돈을 이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돈을 이용해서 자기 사익을 챙긴다.

얼핏 봐서는 나빠 보이지 않는데, 문제는 손실이 난 경우다.

결국 투자를 해서 이익을 보면, 자신이 먹는다. 만약 손실이 난다면 위탁자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아니면 담당자에게 돌리는 수가 있다.

즉 이 신탁을 담당한 직원의 과실로 몰아간다면 손실이 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민혁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큘러스 프로젝트 지분 매입 출처를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특정금전신탁을 이용했다.

‘하, 기가 막히네.’

결국 DL 화재는 자기 돈은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위탁자 자금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사익을 챙겨온 것이었다.

‘이상하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말인가?’

최민혁은 조사 내역을 살피다가 문득 인생 1회차 기억과 매칭되는 미래 기사를 떠올렸다. DL 화재 직원 중에 이 특정금전신탁을 담당하던 직원의 녹취록이 나온 사건이다.

‘김창주 부장이라…….’

* * *

김소연은 얼마 전에 자살한 아버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가 저지른 사건 때문에 집은 은행에 넘어갔고, 길바닥으로 내쫓겨났다.

어머니는 그 일로 인해서 화병을 얻어서 항우울제를 먹어야 했다.

항우울제를 먹지 않으면 하루도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아직도 꿈인가 싶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 내내 지난 일이 떠올라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덕분에 점장에게 한 소리 들은 것은 덤이다.

김소연은 결국 잘 다니던 대학을 휴학했는데, 이미 졸업은 포기했다.

당장 어머니 약값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다.

월세 집 바로 앞 언덕에 서 있는 고급 세단에서 몇 사람이 내려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김소연 씨?”

“아, 네, 마, 맞아요. 그, 그런 데 누구신지?”

그녀는 혹시라도 상대가 빚쟁이일까 싶었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당장 이 자리에서 피하고 싶었다.

뒤에 서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가 불쑥 그녀 앞에 나섰다.

“전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으니, 너무 두려워서 마시기 바랍니다.”

“네?”

“김소연 씨 선친 일 때문입니다.”

“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별일이 아니면 당장 가주세요.”

“설마 선친의 누명을 이대로 두고 볼 생각입니까?”

“네? 그, 그게 무슨 말인지…….”

“DL 화재가 사용하는 특정금전신탁은 꽤 매력적인 편법입니다. 다만 투자를 했다가 실패했을 때 큰 문제가 됩니다. DL 화재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책임자에게 보험을 걸어두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 책임을 책임자에게 돌리면 간단하니까.”

“…설마.”

“맞습니다. 신탁자 자금 손실을 모두 그 책임자에게 뒤집어씌우면 됩니다. 결국, 담당자는 막대한 빚을 져야 하겠죠.”

김소영은 뒤늦게야 아버지가 자살하기 전에 보였던 이상한 행동을 떠올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행동했다.

특히 갑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한 행동은 평소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증거도 없잖아요. DL 화재 법무 팀에서 얼마나 우리 가족을 괴롭혔는지 안다면 그런 말씀을 못 할 겁니다.”

“설마 선친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네?”

“최소한 가족을 보호할 보험을 만들어 뒀을 겁니다.”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결코 가족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씀은 고맙지만…….”

“제가 다행히 김창주 부장을 통해서 신탁에 대해서 문의를 해봤기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설마 증거가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녀는 크게 당황해서 잠깐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수행원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그가 수작을 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따라오세요.”

* * *

반지하 12평 남짓한 원룸은 제대로 청소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가득한 약봉지만으로도 집 안에 환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최민혁은 방 안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김소영이 김창주 부장이 남겨놓은 짐을 가져오는 것을 지켜봤다.

김소연은 아버지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아예 선친이 남겨놓은 짐을 확인도 하지 않았다.

최민혁 눈빛이 반짝였다.

‘비록 5년 후에 밝혀져서 큰 소용이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를 거야. 그 물건이… 여기 있군.’

“이 노트북을 잠깐 분해해도 괜찮겠죠?”

“네? 아니 그건 왜…….”

“김창주 부장이 저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입니다.”

“알았어요.”

최민혁은 가져온 드라이버로 노트북 후면 나사를 하나씩 풀었다.

옆에 동행한 김명준 과장은 황당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김창주 부장과 김소연을 조사하기는 했지만, 영문을 몰랐다.

‘도대체 언제 실장님이 김창주 부장이랑 만난 것일까?’

그의 생각이야 어쨌든 노트북 나사가 풀리자 노트북 뒤 커버가 열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트북 후면에 SD-CARD 하나가 테이핑 처리되어 있었다.

“……!”

김소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치켜떴다.

하지만 최민혁은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난 후에 노트북이 고장 나서 수리점에 맡겼다가 이 SD-CARD를 발견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김소연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녹취 파일이 들어가 있었다.

[실장님, 전 절대로 이 일을 못합니다. 이거 만약에 잘못되면 큰 손실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보고 책임지란 말입니까?]

[하, 김 부장 그 친구도 답답한 소리를 하는군. 이 일이 자네 깜냥으로 책임질 일 같아. 다 윗선에서 알아서 하는 거야. 자네는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설마 김 상무님이 지시한 겁니까?]

[김 상무가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나!]

[하면 김희찬 부사장이 지시한 일이란 말입니까?]

[이제 분위기 파악했어?]

[그래도 전 절대로 못합니다. 아니면 김희찬 부사장님을 직접 만나서 확인을 받고 싶습니다. 이 일을 책임진 저로서는 보험이 필요합니다!]

[아, 그 친구 참.]

다음 녹취 파일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껴 있었다.

[김 부장, 이제 믿겠나?]

[설마 부사장님이 직접 지시를 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 알 만한 친구가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나. 괜히 일을 만들지 말고, 최 이사 말대로 하게. 자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손실이 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제가 조사한 그 기업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적으로 썩었습니다. 사장이 회사 자산을 빼돌려서…….]

[그건 걱정하지 마. 다 내부적으로 조사한 것이니까. 그 회사가 가진 원천 기술은 이야기가 달라. 자네는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심해. ]

[…지시한 대로 따르겠습니다.]

‘빙고.’

최민혁은 쾌재를 불렀다. 녹음 파일 뒤에는 수십 개의 파일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DL 화재 김희찬 부사장은 특정금전신탁의 리스크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사실을 폭로했음에도 김희찬 부사장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DL 화재는 그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편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

그는 힐끗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 김소연 모습을 발견했다. 뒤늦게야 아버지가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소연씨, 이번 일은 우리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DL 그룹은 만만한 기업이 아닙니다. 자칫하다가 오히려 당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이 인간에게 복수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이자까지 쳐서 보복할 겁니다. 그리고 김소연 씨 아버님께서 저에게 한 부탁입니다.”

“부탁할게요.”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다만 효과를 최대한 올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겁니다. 그런 점을 양해주세요.”

“알았어요.”

그는 김소연 집을 나오면서 곧바로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최 실장. 아, 요즘 너무 자주 전화를 하는 건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정의 사회 구현일 뿐입니다. 그럼요. 박 부장검사님에게는 괜찮은 복권이죠. 아, 물론이죠. 이번에는 자료만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박두영 부장검사도 부담스러운지 머뭇거렸다.

최민혁은 이미 DL 화재와 관련되어서 이슈가 된 사건을 잘 알았다.

[특정금전신탁과 관련된 사건이라서 아마 중앙지검 윗선에서도 오히려 환호할 겁니다. 설마 이 좋은 사건을 그냥……. 아 그래요? 물론이죠. 제가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요. 전 딱 정보만 넘길 겁니다.]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피식 웃고 말았다.

김명준 과장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 반응이 좀 이상하군요.”

“아무래도 성 접대 별장 사건 때문에 부담을 느끼나 봐요.”

“이쪽저쪽에서 많이 괴롭히나 보군요.”

“그렇죠. 아무리 박 부장검사라고 해도 여당, 야당이 싸잡아서 씹어 대니, 버틸 재간이 없을 겁니다. DL 그룹의 박상구 회장이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군요.”

김명준 과장은 노트북 관련해서 질문을 할까 하다가 사악한 미소를 짓는 최민혁 얼굴을 보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신탁은 위탁자가 수탁자에게 특정 재산 다양한 방법으로 관리하는 데 필요한 법률 행위다.

이 계약 체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원금 보전과 이익 보전 약정 효력이다.

원칙적으로는 신탁 회사 모든 책임을 지는데, 예외적인 조항이 있다.

바로 개인이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원금 손실이 일어나도 신탁 회사에 무조건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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