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이런 곳은 평생 처음인 안선종 팀장은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구준모 차장을 쳐다보았다.
“구 차장은 이번에 인센티브를 많이 받았나 봐.”
“사회 생활하면서 돈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 아니겠습니까?”
“글쎄, 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우선 한잔 드시죠.”
안선종 팀장도 일단 구준모 차장이 주는 술을 계속 받아마셨다. 그는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그보다 구준모 차장의 용건이 더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자리까지 마련한 건가?”
“다름이 아니라 TV 사업부 매각설 때문입니다.”
“그건 사실무근이라고 이미 본사에서 기자 회견까지 했지 않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소니의 반응을 보면 도저히 그렇게 보기 힘듭니다. 오다 히로 부사장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KM 전자 본사를 들락날락하겠습니까?”
“그거야 자네 생각이고, 그 이야기라면 난 그만 일어나겠네.”
“잠깐만요. 제 말은……. KM 전자 경영진의 너무 극단적인 면 때문에 상의하고 싶습니다.”
“그거야 임원진이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 아닌가. 당장 이일태 이사만 해도 이제까지 한 실적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자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좀 다릅니다. 이일태 이사님은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허, 그 친구도 참,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나?”
“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노조 내에서도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KM 전자,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최민혁 실장님의 독단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최 실장님 덕분에 자네나 내가 인센티브 받은 것도 사실이야. 회사 주가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설마 그걸 부인하자는 건가?”
“저도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TV 사업부 매각이 된다면 어지간한 직원은 다 그만둬야 합니다. 그것을 걱정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평안했던 안선종 팀장 안색이 곧바로 단단히 굳어버렸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구준모 차장을 쳐다보았다.
“자네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아는가?”
“저도 최민혁 실장님 실적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구 차장.”
“네?”
“동물도 은혜를 갚을 줄 알아.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오히려 등에 칼을 꼽지. 자네가 딱 그 꼴이야. 불과 작년에만 해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나라고 나발을 불던 이가 자네 아닌가. 이제 먹고 살 만하니, 최 실장 등에 비수를 꽂고 싶은 건가?”
“안 부장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안선종 부장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구 차장 이 친구야, 인간이 그러면 안 되네. 자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인지 의심스러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일태 이사나 김현우 상무 그 쓰레기를 당장에 제거하지 않은 최민혁 실장님이 답답해 보였어. 자네도 조심하게!”
“제 말은…….”
“닥쳐!”
구준모 차장은 자리를 떠나버리는 안선종 부장 뒷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안선종 부장은 노조에게 제법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거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낸 건가?’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부담스러웠다. 아직 노조 내부 의견을 도출하기 전에 괜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두려웠다. 자신 역시 이일태 이사나 김현우 상무처럼 회사에서 축출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날 미행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 * *
“구준모 차장이라…….”
최민혁은 구준모 차장 프로필을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미 회사에 문제가 있는 이들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김명준 과장은 슬쩍 한마디 해주었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평소에 과격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잘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정홍순 공장장이 물러난 후에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박상식 수석 부장이 공장장이 된 후에 구준모 차장 태도가 바뀐 겁니까?”
“네. 특히 박상식 수석부장은 회사에 반감을 드러내는 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도파로 누구 편을 잘 들지 않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중도파라서 뒤로 물러나 있지만 자기 이익이 된다면 오히려 암묵적으로 구준모 차장을 밀어주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구준모 차장이 더 날뛰는 것이고요.”
김명준 과장도 뒤늦게 최민혁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 점은 안선종 부장이 구준모 차장과 크게 다투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겠죠.”
최민혁도 망원 카메라로 찍은 두 사람의 회식 장면을 힐끗 다시 쳐다보았다. 그 사진 안에는 안선종 부장이 화를 내면서 떠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구조조정 덕분에 안산 공장 직원 수도 최저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 작은 공장 내에서도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만약 공장 규모가 커졌다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민혁은 한국 노조가 어떤 식으로 변해가는지 인생 1회차에서 잘 봤다. 그는 때문에 이번 일도 원점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잘나가는 회사가 정작 망하는 것은 내부 분란에서 시작되니까요. 과장급 이상의 실무진 성향에 대해서 최대한 정보를 얻으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몇 마디 더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도 이런 방향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민혁 역시 자신이 내린 지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부 분란 문제를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새삼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렸다. 생존만 고민하다 보니, 정작 이런 문제는 간과한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 만족한 직원도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가 있다는 점이야. 하, 이거 생각보다 쉽지가 않구나.’
* * *
안선종 팀장은 구준모 차장에게 화를 내면서 헤어졌지만, 그 일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걱정되어서 소형 TV 선행 개빌 팀의 김창호 부장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다.
김창호 부장도 욕설부터 내뱉었다.
“하, 인간들 정말 돌겠네요. 아니, 구 차장 그 친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회사가 커지면서 욕심도 생겼나 봐. 특히 최훈열 전무 라인이 사라지면서 견제하는 세력도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그게 인간이 할 짓입니까?!”
“맞아. 그런데 걱정되는 것은 박상식 수석 부장 태도야.”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 일어납니까. 박상식 수석 부장은 공장장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누누이 말했지 않습니까. 부장님이 차라리 공장장에 나서라고.”
안선종 팀장은 툴툴거렸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공장장을 하겠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는 것이 맞아.”
“아니, 나이가 있으니, 이제 관리직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연구만 하실 겁니까.”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그래도 제가 나이는 어립니다.”
“실없는 소리는 마. 지금 책임 소재를 묻자고 자네를 부른 것은 아니니까.”
“모르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실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또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될 겁니다.”
“설마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할까? 그저 의견을 내세운 거잖아.”
“의견도 의견 나름 아닙니까. 지금과 같은 시기에 노조 파업이라니. 제가 알기로 공장 내에 과장급 이상 직원은 작년 연봉 이상을 인센티브로 받았습니다. 인간이라면 여기에 더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TV 사업부 매각설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안선종 팀장도 나름 걱정해서 한 말이다.
김창호 부장은 콜린스 개발에서 나름 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안선종 팀장의 기대와는 다르게 대답했다.
“그거 말입니까? 아니, 그러면 안선종 팀장님은 우리 TV 사업부가 이대로 괜찮을 거로 생각합니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안선종 팀장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면 우리도 다른 업체처럼 디지털 TV에 투자하면 되지 않을까?”
김창호 부장은 검은색 뿔테 안경을 가볍게 위로 올리면서 지금까지 쌓아둔 말을 터뜨렸다.
“LC 전자나 오성 전자에서 디지털 TV에 투자하는 규모를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니, 콜린스 공급을 좀 무리해서 올리면 그만한 자금을 우리도 만들 수 있어!”
“판로는 어떻게 합니까? 월마트에서 갑질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우리가 영업망이 취약한 점을 이용해서 온갖 갑질을 일삼고 있어요!”
“그거야…….”
김창호 부장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TV 사업부는 수명 연장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머리가 제대로 된 경영진이라면 TV 사업부 매각이 자연스럽죠. 오성 전자는 단기에 최대한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인 것도 맞지 않습니까.”
“김 부장 말이 좀 심하네.”
“안 팀장님, 우리 서로 마음이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그건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
안선종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쉬쉬하지만, TV 사업부 미래가 불투명한 것을 인정했다. 그래도 쉽게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이 일은 평생을 받쳐온 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장님이 있지 않은가. 콜린스처럼 다시 대박을 친다면…….”
“최민혁 실장님이 무슨 신입니까. 그냥 막 대박작을 찍어내게 말입니다. 실장님 스스로 능력을 인정하니, 매각을 고민하는 것이겠죠.”
“…….”
안선종 팀장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대박 한 번 나기도 어렵다. 그런데 연속으로 대박을 다시 터뜨리는 것은 좀 다르다.
한국 10대 대기업이 왜 중소기업 기술을 강제로 뺏고 하겠는가. 다 이런 리스크를 감안하기 때문에 자행되는 편법이다.
김창호 부장은 그동안에 쌓인 콜린스의 어두운 면에 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네. 안 팀장님도 알고, 저도 다 압니다. 심지어 공장 실무진이라면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전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콜린스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집착하는 거죠. 그게 노조 불만으로 나타난 것이고요.”
“…….”
안선종 팀장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김창호 부장은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냥 폭탄을 막 던졌다.
그런데 그게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하면 TV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치세. 그리고 나면 공장 임직원은 어떻게 되는 건가?”
“새로운 사업으로 대체하겠죠.”
“신사업? 그런 이야기는 처음인데…….”
안선종 팀장이나 김창호 부장은 MP3 개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이들은 콜린스 모델이나 콜린스 수정 모델에만 집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실제로 콜린스 양산 공급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민혁은 콜린스에 정신이 나간 안산 공장에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MP3 관련된 여러 가지 테스트는 최병연 팀장이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그는 아예 경기도 근처에 작은 공장을 사들여서 철저하게 정보를 관리했다.
그나마 최구만 과장과 같이 지내는 김창호 부장은 정보를 일부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아직 잘 몰랐다.
“전 최병연 부장에게 새로운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 이야기는 다른 직원에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알겠네. 하지만 걱정이야.”
안선종 팀장은 새로운 아이템이란 말에 살짝 기대했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 경영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콜린스 생산이 최우선입니다.”
“노조는 어떻게 하고?”
“안 팀장님도 이렇게 확신하지 못하는데, 노조가 쉽게 동요하겠습니까. 정 불편하면 안 팀장님이 노조를 불러 다독거려 주세요.”
“…알겠네.”
안선종 팀장은 김창호 부장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친구 말이 맞아.’
* * *
안선종 팀장은 콜린스 개발 이후에 공장 내에서도 꽤 주목을 받았다. 그가 나서서 손을 쓰자 공장의 동요는 금방 가라앉았다.
김현탁 사장이 손을 쓴 결과치고는 아쉽기만 했다.
거기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KM 전자를 넘어서서 이미 KM 그룹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