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수갑까지 찬 채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던 김재열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별장에서 조성우 실장이 격렬하게 반항하다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떠올리면서 아직도 이게 꿈인가 싶었다.
취조하던 담당 형사도 넋을 잃은 김재열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것은 몇 사람이 취조실 안으로 들어온 이후다.
“너, 미, 민혁,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와?!”
경악한 김재열은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수갑 때문에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같이 따라 들어온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담당 형사를 밖으로 내보내라고 눈짓했다.
담당 형사도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민혁과 동행한 안현수 변호사는 이미 어느 정도 내막을 들었지만 돌아가는 영문을 몰라서 최민혁의 눈치만 봤다.
최민혁은 김재열 맞은편에 앉고는 담배를 내밀었다.
“필래?”
“이 새끼가……. 아니다.”
김재열은 결국 최민혁이 내민 담배를 베어 물었다. 그는 뒤편에 숨어 있는 송도연을 보자 최민혁을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서, 설마 네, 네놈 짓이냐?”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처럼 툴툴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연락받고 나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
눈동자만 굴리던 김재열은 그제야 최민혁이 그 별장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별장에 오가는 사람은 최소한 동영상이 찍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그는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최민혁은 분명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번 일을 나랑 엮을 생각인가 본데,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왜 온 거야?”
“말했잖아. 수사 팀이 참고인으로 도연이, 이 녀석에게 연락했어. 지금 미래 기획사도 대규모 수사 팀이 투입되어서 여죄를 캐고 있으니, 아마 대부분 연습생에게 다 연락이 갔을 거다.”
“…….”
참담한 김재열은 그제야 중앙지검이 작정하고 이번 별장과 관련된 자를 수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제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송도연을 힐끗 쳐다봤고, 이를 악물었다.
“난 할 말이 없다.”
“글쎄. 네가 저지른 범죄 증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최민혁은 이 상황에서 오리발을 내미는 김재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별장에 숨겨둔 동영상이라면 알겠지?”
움찔 몸을 떤 김재열은 눈을 부릅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실은 그 동영상은 그가 아는 은밀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그걸 네, 네가 어떻게…….”
“우리 이야기 길게 끌지 말자.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야. 도연이 계약을 파기해. 조성우 실장은 네 서명이 없으면 계약 해지는 불가하다고 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니까. 그러면 그 증거가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
김재열은 한동안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별장에서 파티를 즐기면서 자신의 동영상을 따로 관리했다.
그리고 그 동영상을 별장에 따로 숨겨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을 나중에 보험으로 계속 써먹기 위함이다.
‘도대체 이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설마 날 미행이라도 한 건가? 아니,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야 알 리가 없지.’
그는 뒤늦게야 김현탁이 한 충고를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최민혁이 보통 놈이 아니니까 조심하라고 하는 말이 결코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송도연이 자살한 이유 중에 하나가 송도연의 섹스 비디오라는 것을 잘 알았다. 비록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김재열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을 명분 삼아서 김재열이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게끔 손을 쓸 생각이다.
“어때?”
“…….”
김재열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질문도 하기 힘들었다.
불행히도 이곳은 취조실.
벽면에 달린 CCTV 카메라로 담당 형사가 지켜보고 있다.
만약 소란을 피워서 동영상 이야기가 그들 귀에 들어가면 정말 끝장이다.
최민혁은 사악하게 웃었다.
“아, 걱정하지 마. 내가 따로 그 물건은 챙겨뒀으니까. 도연이 계약만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그 증거는 조용히 사라지게 될 거다.”
내심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 자리에서 방방 뛸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그 동영상이 수사 팀 손에 들어가면 형량이 얼마나 늘어날지 예상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정말 송도연 계약만 해지해 주면,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거냐?”
“난 너와는 달라서 약속은 지켜.”
안현수 변호사가 슬쩍 송도연과 관련된 수정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 내용은 기존 계약을 다 취소하고, 심지어 기존 있었던 모든 일을 없던 것이라는 내용이다.
김재열은 한동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동영상은 절대로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
아무리 DL 그룹이라고 해도 그 증거가 수사 팀에 넘어가면 형량이 얼마나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알겠다.”
그는 펜을 들고 서명하려다가 문득 계약서 내용 한 부분을 발견했다.
최민혁이 눈치는 빨랐다.
“아, 위약금은 없다.”
“하, 하지만…….”
“이 정도로 조용히 끝내자. 넌 지금 송도연이 문제가 아냐.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수십 명이 넘어. 그들에 대한 대응만도 쉽지 않을 거다. 이왕이면 송도연은 그냥 빼는 것이 어때?”
사실이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외에 이미 똑같이 당한 이들도 이번 수사에 협조했다.
워낙에 사건이 커지면서 다들 입을 연 것이다.
덕분에 미래 기획사 직원 중에 60%가 모두 구속되어서 수사를 받는 중이다.
그런데 김재열에게 좋지 않은 것은 이 과정에서 미래 기획사와 그 자신과의 유착 관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김재열은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방송국 PD에게 돈을 주고받았는데, 그 증거마저 드러났다. 너무 갑자기 수사 팀이 덮친 덕분에 제대로 증거를 없애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여죄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는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 수사 팀조차 당황하는 중이었다.
결국 수사 팀 인력이 대거 투입되면서 일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
김재열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에게 화도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취조를 받으면서 바깥의 상황을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최민혁은 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서명이 끝난 계약서를 안현수 변호사에게 내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과응보라고 하잖아.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그럼 나, 이만 물러나마. 아무리 DL 그룹이 널 도와준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거다.”
“자, 잠깐만, 저, 정말 이번 일은 네놈이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무슨 배경이 있다고 중앙지검에 힘을 쓸 수가 있겠어?”
“…….”
‘분명히 저놈 짓이야!’
김재열은 이를 갈았지만 최민혁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 *
“커피나 한잔 드시고 가시죠.”
“그럴까요. 커피 한 잔만 간단히 하고 가는 것도 좋겠군요.”
최민혁은 우르르 일어나는 서울 중앙지검 강력부 팀원과 추가로 늘어난 20명의 수사팀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최민혁의 눈치만 봤다.
과거 마약 사건 때문에 최민혁을 조사했던 이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김명준 과장에게 받은 코트를 걸친 최민혁은 힐끗 그들을 쳐다보았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김대영 수사관은 어색한 얼굴로 최민혁의 눈치만 봤다.
최해진 검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름 화끈한 성격이지만 최민혁 명성이 워낙에 자자해서 몸을 사렸다.
박두영 부장검사만이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까?”
“덕분에요.”
“혹시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아직도 영문을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송도연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모릅니다. 저는 이 친구 때문에 왔을 뿐입니다. 강제로 노예 계약을 한 덕분에 피해를 봤으니, 그 부분을 정리한 거죠.”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딱히 최민혁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는 잠깐 기다렸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힐긋 시계를 살피다가 전화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혁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사전에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부탁해 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지검 강력부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일곱 명이 나타났다.
제일 앞에 선 이는 50대 초반으로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숨을 헐떡이는 김용만 전무였다.
“야, 담당 검사 당장 나와!!”
목젖이 보일 정도로 고함을 외치는 그는 지금 상황을 잘 알았지만, 뒤에 동행한 DL 그룹 법무 팀을 믿기 때문이었다.
최민혁은 오연한 표정으로 힐끗 김용만 전무를 쳐다보았다.
그가 최훈열 전무에 이어서 벼르고 있던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어.’
솔직히 DL 그룹에는 그도 손을 댈 방법이 없어서 때만 기다렸다. 그런데 송도연 덕분에 이번에 결국 한 방 먹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김용만 전무 얼굴을 보고 싶어서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둘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시간 배정을 부탁했다.
길길이 날뛰는 김용만 전무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장남 김기범이 감방에 간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차남 김재열이 여러 가지 범죄행위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당 검사가 나서기도 전에 김용만 전무는 커피를 홀짝이는 최민혁을 발견했다.
“너, 넌, 최, 최민혁?”
“김용만 전무님, 오랜만이네요.”
아예 남인 양 부르는 목소리.
김용만 전무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최민혁을 박살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네, 네가 여기 웬일이냐?”
“재열이랑 정리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
“그건 김 전무님께서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화가 잔뜩 난 김용만 전무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놈이 감히 네가 그따위로 말할 수가 있어?!”
“그러는 김 전무님께서는 저에게 하신 일은 완전히 잊은 것 같습니다.”
“감히 어른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어른도 어른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전 김용만 전무님께서 우리 둘째 큰아버지 통해서 저에게 한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뭐?!”
김용만 전무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차가운 눈으로 김용만 전무를 응시했다.
“뭐 김 전무님 입장에서는 저는 볼품이 없는 놈이라서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 설마 그러면 지금 이 일이 네, 네놈 짓이란 말이야?”
“저런 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계약 문제 때문에 이곳에 왔다니까요. 재열이가 저 지경이 된 것은 본인이 잘못한 것 때문입니다.”
“이.”
김용만 전무는 말과는 달리 최민혁 자신이 이 일의 배후라는 것을 본능에 따라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야 딱 이 타이밍에 자신 앞에 나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더 말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제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던 김용만 전무는 이를 악물었다.
‘저, 정말 이번 일의 배후가 최민혁 저놈이란 말인가? 최훈열 전무랑 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이 일을 저질렀다고?’
그런데 그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미 이와 유사한 일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 * *
김용만 전무는 김재열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물어봤지만 김재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는 차남 김재열에게서 부탁을 받고는 허겁지겁 DL 스카이 본사로 향했다.
분노한 김용만 전무는 결국 김현탁 사장을 직접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