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해마다 TV 시장에서 소니의 시장 점유율이 추락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특히 오성 전자의 PDP TV 공략에 위기마저 느꼈다.
그런데 이 시국에 콜린스 원폭이 떨어진다면 소니의 운명이 심각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오디 히로 부사장은 그제야 만족했다. 1조 7천억 원은 소니에서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돈이다. 아마 경영진이 내막을 안다고 해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태도가 바뀔 것이다.
‘설사 이번 협상이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아. 오성 전자의 콜린스 인수를 최대한 흔들 수 있으니까. 적어도 1조 5천억은 내놓아야 할 텐데, 아무리 오성 전자라고 해도 부담이 될 거야!’
그랬다.
오다 히로 부사장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최민혁 실장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좋을지 모른다.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콜린스가 오성 전자나 LC 전자에 넘어가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있었다.
[콜린스에 대한 보고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 * *
[소니 전략 회의가 며칠 전에 소니 본사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략 회의에는 앞으로의 소니 전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합니다. 특히 디지털 TV 시장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릴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뉴스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은 소니가 늘 하던 대로 전략 회의를 열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좀 달랐다. 그는 김현우 수석 부장의 충고를 간과하지 않았다. KM 전자 TV 사업부 인수에 소니가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민혁 실장에게 이전처럼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TV 사업부 인수 때문이다.
심지어 TV 사업부 인수 과정에서 안 좋은 이미지를 줬다가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었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황태자 안재운 대리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TV 사업부 매각설이 사실인지 알고 싶다는 말입니까?”
“네. 아시다시피 우리 입장이 애매합니다. 이런 시기에 최 실장을 자극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도련님이 나서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랑 최 실장과는 그다지 안면이 없습니다.”
“다른 연줄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어떤 의미입니까?”
“DL 그룹 말입니다. 그쪽에 혹시 아는 지인이 없습니까?”
“DL 그룹 쪽은…….”
안재운 대리도 DL 그룹과는 잘 몰랐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야 안면이 없지만 모임에서 가끔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데면데면한 관계라서 그저 인사만 했을 뿐이다.
권태성 실장 눈빛이 반짝였다.
“제가 알기로 재벌 3세 끼리 모임을 자주 가지는 것으로 압니다. DL 그룹 정도라면 그런 모임에 참석할 겁니다.”
안재운 대리는 피식 웃었다. 한창 시절에 여자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지금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와 갈등 때문에 조심했다. 자칫했다가는 정말 일본으로 당장 쫓겨날 수도 있다.
“그렇죠. 하지만 저도 아버지 시선을 의식해서 요즘은 자중합니다. 제 사정은 이미 잘 아실 텐데요?”
“그래서 부탁입니다. 클럽 모임을 열고, 그저 인맥만 쌓는다면 회장님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길 원하실 겁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중재자로서 필요한 능력입니다. 더욱이 DL 그룹은 최민혁 실장과 사이가 극히 안 좋습니다.”
“아, 저도 압니다. 최 실장이 둘째 큰아버지를 감방에 보냈다면서요? 그게 정말이라니, 충격적인 일이죠. 지금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감방에 보낸 최민혁이 냉혹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대체 최훈열 전무를 어떻게 감방에 보낸 건지 그게 궁금하다는 표현이었다.
“네.”
“흠.”
안재운 대리는 몸을 사리는 권태성 실장을 보자 피식 웃고 말았다. 한편으로 호기심도 생겼다.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최민혁에 대해 선뜻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단순한 클럽 파티라면 문제가 될 것 같지가 않다.
더욱이 목적이 있다면 말이다.
‘개와 고양이를 한 방에 가둬두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나쁘지 않아. 그 와중에 필요한 정보를 알아보라는 건데, 나쁘지 않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최 실장을 초대해서 한번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죠.”
“다만 최민혁 실장을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바보가 아니니까. 무슨 의도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윗선에는 따로 이야기를 해두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감사하죠.”
* * *
“초청장이라.”
김현탁 사장은 갑자기 날아온 클럽 파티 초청장에 어이가 없었다. 그 클럽 주최자가 안재운 황태자란 점에 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친구는 일본으로 아직 안 갔어?”
“네.”
“무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박태정 비서실장도 피식 웃고 말았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과장해서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뿐이고, 전형적인 재벌 3세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시끄러운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겠어. 뭔가 다른 신사업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e오성 사업 때문에 아직 국내에 남은 것으로 압니다.”
“e오성은 또 뭐야?”
“오성 그룹에서 IT 사업에 뛰어들기에는 눈치가 보여서 따로 만든 법인입니다. 그런데 이 법인이 안재운을 키우는 게 목적이란 소리가 있습니다. 증여세를 피할 목적입니다. 이번 오큘러스 법인을 인수한 것도 이 회사입니다.”
“쯧. 그건 잘 알겠어. 그러면 사업이나 할 생각이지, 왜 굳이 이런 시답잖은 초청장이나 보낸 거야?”
“그게 좀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청장 자체가 이번 디지털 위성 사업 축하 파티로 이 사업에 관련된 이들은 다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숫자는 얼마 안 되고, 오히려 재벌 3세 위주로 참석자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최민혁 실장도?”
“네. 그래서 사장님에게도 특별히 초청장을 보낸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30대로 20대 애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데?”
“아무래도 TV 사업부 매각설 때문이 아닐까요?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발표는 했지만, 상황은 아직 잘 모르는 것이니까요.”
“고작 그게 다야?”
“그것도 그것이지만 최민혁 실장의 KM 그룹에 대한 영향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번 KM 그룹 구조 조정도 최민혁 실장이 실권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최 회장이 노망이 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힘들 거야.”
“그런데 그 소문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KM 그룹 조정 와중에 TV 사업부 매각설이 흘러나왔습니다.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습니다.”
KM 그룹 구조 조정과 KM 전자의 TV 사업부 매각설이 나오면서 별의별 소문이 다 퍼지는 중이었다. 지라시 언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문을 확대하여 해석했다.
덕분에 DL 그룹도 고개를 갸웃했다.
“흠.”
김현탁 사장도 얼굴을 찌푸렸다. 초청장 따위는 무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꼴 보기 싫은 최민혁 실장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굳이 내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데…….’
“가만 혹시 재열이 이놈에게도 초청장이 갔어?”
“네.”
그는 골치가 아팠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김재열은 최민혁과 안면이 있는 터라 클럽 분위기를 파악하는 메신저로 괜찮았다.
“재열이를 호출해.”
* * *
김현탁 사장은 안재운 클럽 파티보다는 차라리 TV 사업부 매각설에 더 집중했다. 김상구 회장 역시 KM 전자에 욕심냈다. 만약 TV 사업부 매각이 사실이라면 치고 올라갈 기회였다.
문제는 방법이다.
소니와 오성 전자가 벌써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일에 과연 DL 그룹이 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사장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실 직원이 다급하게 막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김재열이었다.
“형, 혹시 이것 때문에 불렀어?”
김현탁 사장은 양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리면서 손짓으로 비서실 직원을 밖으로 내보냈다. 김재열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팠다.
김재열은 그런 김현탁을 무시한 채 박태정 비서실장을 옆으로 훅 밀어버린 후에 그 자리에 앉아서 초청장을 내밀었다.
“형, 이거 봐. 내가 안재운 황태자에게 초청장을 받았다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불렀다.”
“역시 현탁 형도 날 믿는구나. 이거 보면서 느낀 점이 없어? 아니, 그 대단한 안재운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까.”
“흠.”
김현탁 사장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김재열이 꺼낸 초청장을 봤다. 그는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김재열에게 왜 초청장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DL 스카이 소속된 것 때문이야? 혹시 내가 빼면, 이놈을 끌어들이려고? 하, 정말로 별의별 짓을 다하네.’
당연히 그럴 수가 있다.
오성 전자 역시 DL 그룹에 꽤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최민혁과 안면이 있는 멍청한 김재열을 이용하려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안재운은 최민혁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김재열과는 잘 아는 편이었다.
오성 전자는 한국 대기업 중에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이런 기업의 황태자인 안재운은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 점을 잘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재열도 마냥 바보는 아니었다.
“형,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나도 아버지에게 대충 들은 것이 있어. 민혁이, 그 새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서?”
“됐다.”
“아니, 난 안 괜찮아. 형하고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아. 하지만 최훈열 전무님이 감옥에 갔잖아. 설마 그 일을 덮어둘 생각이야?”
“그런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거다. 넌 지금 하는 일에나 집중해.”
“아니, 그 일을 하다 보니, 뜻밖에 나도 알게 된 것이 많아. 민혁이 그 새끼 때문에 우리 그룹도 손해를 본 것이 한둘이 아니더라. 그러니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어.”
“무슨 말이야?”
“아니 막말로 형이…….”
“사장님!”
“…쯧, 그래 사장님이 민혁이, 그 새끼 불러 이야기한다고 해도 잘될까? 모임 같은 곳에 초청해도 절대로 불응할 거야. 하지만 이번 파티는 달라. 최민혁은 반드시 참석할 거야.”
김현탁 사장은 이미 최민혁에게 크게 대인 터라 최민혁 성정을 제법 알았다.
“그건 장담하기 어려워.”
“그 TV 사업부 매각설이 민혁이 그 새끼가 꼼수를 부린 거라면서? 그러면 그 대상이 오성 전자가 0순위야. 따라서 미끼에게 계속 손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번 파티에는 최소한 얼굴을 보일 수밖에 없어.”
“…….”
뜻밖의 지적에 김현탁 사장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자만 밝히는 김재열을 색다른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하자. 그게 뭘 어쨌다는 소리야?”
“아니, 이번 기회에 민혁이 그놈이 파티에 나오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완전히 사회에서 매장해 버리는 거야.”
“어떻게?”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만드는 거야.”
“쯧,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과거에 형하고는 달리 난 민혁이랑 자주 만났어. 기범이 형 파티에서지. 그 덕분에 그 자식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잘 알아.”
“…계속 해봐.”
“사실 내가 눈독 들이는 애가 하나 있는데, 걔가 딱 최민혁의 이상형이야. 아마 민혁이 그놈도 걔를 보면 팍 돌아버릴 거야.”
“설마 걔를 이용해서 최민혁을 강간범으로 만들 생각이야?”
“바로 그거야!”
김재열은 실망한 김현탁 사장 시선을 보자 잽싸게 주머니에 넣어둔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청초한 여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여러 각도에서 찍힌 사진은 그녀가 속한 미래 기획사에서 제출한 자료였다.
맑은 눈망울을 가진 그녀는 계란형 타입으로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백옥 같은 피부로 흔히 보기 힘든 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