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의도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단순한 것 같아도 복잡했다. 그는 상념을 곧 떨쳐 버렸다. 지금 당장은 당면한 사장단 회의 안건이 더 중요했다.
“이 리스트는 이번에 1차 구조조정 명단입니다.”
최민혁 역시 사장단 회의 안건을 살피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아는 인생 1회차에 따르면 멀쩡한 기업은 없었다.
‘그래도 해야지. 우리 첫째 큰아버지 손발을 잘라 버리는 것이 좋으니까.’
“참 우리 첫째 큰아버지도 이번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겠죠?”
“아, 부회장님은 지금 필리핀에 가 있어서 불참하는 것으로 압니다.”
“네? 조금 뜬금없네요. 아니 사장단 회의를 놔두고 필리핀에 가 있는 겁니까?”
“저도 이상해서 장승일 실장에게 문의해 봤는데, TRS 문제를 비롯한 산적한 문제가 많아서 부회장님은 잠깐 손을 떼는 것으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렇단 말이죠.”
최민혁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는 다시 사장단 안건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번에는 그냥 사장단 회의에 빠질까 하던 생각을 바꾸었다. 안 그래도 최문경 부회장을 흔들 방안을 찾았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좋아, 이렇게 하자. 이번에 한 번 더 흔들어 놓으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아무리 빤스런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 * *
갑작스럽게 KM 그룹 본사에서 열린 회의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최근 그룹 내에 돌고 있는 대규모 구조조정 소문 때문이다.
KM 그룹 본사 기획실 천경구 과장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될까?”
박재광 과장은 천경구 과장 성격을 아는 터라 내키지 않았지만 툴툴거렸다.
“그렇다고 하잖아요. 계열사가 있는 동기 이야기로는 분위기가 심각하대요.”
“하면 본사는?”
“본사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로 적자가 쌓인 계열사 위주니까.”
“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경구 과장은 여전히 불안했다. 계열사 구조조정 이후에 본사도 그 칼날을 피해 갈 것 같지가 않았다.
“혹시 갑자기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지?”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TRS 사업 정리하면서 거기에 매달려 있는 인력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그러지 못할 거예요.”
“아니, 그래서 인원을 더 줄일 수도 있잖아?”
“대부분이 신입인데, 걔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모르겠어.”
두 사람 이야기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가득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해갈수록 자연스럽게 요즘 돈 파티 때문에 언론에 오르내리는 KM 전자 이야기도 나왔다.
“인센티브를 많이 받은 사람은 1억이 넘는다는 소리가 파다하던데, 정말일까?”
박재광 과장은 뜻밖에 이 소문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알았다.
“그 이상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팀장급 이상 실무진은 최하가 1억 이상을 받았어요. 그건 나도 영업 팀 이승환 대리 통해서 확인한 겁니다.”
천경구 과장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
“그게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말도 마세요. 올해 누적 예상 매출이 결국 1조 3천억 원을 넘었다고 하니까.”
“KM 산업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KM 산업 작년 매출액이 10억 달러가 좀 안 되니, 현재 환율로 고려하면 그보다 더 많은 거죠. KM 전자 매출이 KM 산업 매출을 넘어선 거죠.”
작년 아시아 매출 규모로 본다면 오성 전기가 12억 달러로 8위, 대운 전자가 15억 달러로 7위에 올라 있었다.
오성 전관이 18억 달러, LC 반도체가 17억 달러로 각각 5위, 6위에 위치한다.
HY 전자가 26억 달러로 5위, 대운 전자가 30억 달러로 3위다.
2위는 LC 전자로 63억 달러, 대망의 1위는 역시 오성 전자로 142억 달러다.
단순 수치로만 본다면 KM 전자는 5위에 있었다.
“……!”
그만 놀란 것이 아니라 오가는 다른 임직원 역시 둘의 대화를 듣고 나서는 입을 살짝 벌렸다.
KM 전자에 대한 소문을 들어 그 상승세가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벌써 올해 예상 매출이 1조 3천억 원이 나온 것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에게 반감을 품은 천경구 과장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박재광 과장은 딱히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는 때문에 집요하게 질문하는 천경구 과장을 무시한 채 갑자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장승일 실장을 발견했다.
그는 쪼르르 장승일 실장 앞으로 달려가서 고개를 숙였다.
“장 실장님, 점심은 드셨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가볍게 대답한 후에 지시를 내렸다.
“어, 그런데 박 과장도 빨리 올라가서 사장단 회의나 준비해.”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내려오신 겁니까?”
“최 실장님이 곧 도착한다고 연락을 받아서 마중 나온 거야.”
“아, 네. 가만 설마 최 실장님도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겁니까?”
“그래. 이번 모임부터 참석하니, 가서 자리 문제가 없도록 신경 써.”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박재광 과장은 올라가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내려와서 본사 로비 앞을 쳐다보았다.
장승일 실장만이 아니었다.
KM 인스트루먼트의 김환진 사장이 허겁지겁 내려와서 장승일 실장 옆에 섰다.
그리고 추가로 내려온 계열사 사장 숫자는 열 세 명으로 늘어났다.
계열사 사장을 포함해서 실세가 다 포함된 터라 임직원조차 긴장한 채 허겁지겁 옆으로 물러났다.
도대체 누가 오나 싶어서 다들 눈을 크게 추켜 떴다.
“회장님이 오시는 건가?”
때마침 도착한 차량 한 대는 중형 세단이었다.
차량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김명준 과장이었고, 그는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량에서 내린 최민혁은 마음에 안 든 얼굴이었다.
“김 과장님,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이럴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명준 과장은 턱짓으로 물러나면서 본사 앞에 몰려와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벌써 스무 명 가까이 늘어난 이들 앞에는 장승일 실장이 있었다.
그는 최민혁을 보자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계열사 사장들도 장승일 실장에 맞추어서 다들 허리를 숙였다.
절도 있는 모습은 마치 군대의 사열 모습을 보는 듯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마치 최용욱 회장이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 나이의 최민혁은 안색을 잔뜩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KM 그룹 본사를 오가는 임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사 임직원도 이 광경을 다 쳐다보았다. 심지어 그중에는 기자도 있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사진기를 들었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은 이미 KM 그룹 본사에도 미치고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보이는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만큼 최민혁의 인지도가 KM 그룹 내에서 수식으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최민혁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채 본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걸어가는 길의 앞쪽은 마치 물이 갈라지듯이 쫙 벌어졌다.
임직원은 전부 다른 한쪽으로 물러나서 멍하니 최민혁의 걸음을 지켜봤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 사람이 최민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전이라면 쇼한다고 수군거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KM 전자 임직원이 돈으로 파티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설마 최 실장님이 본격적으로 KM 그룹 경영에 끼어든 건가?]
[당연한 일 아닐까.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최 실장님이 오직 KM 전자 경영만 관리하는 것은 우리 그룹에도 손해야.]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넌 최 실장님이 쌓은 실적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KM 전자에 다니는 지인 이야기로는 꿀 직장이란다. 자기에게 맡은 일만 잘하면 거의 터치가 없대!]
이것 또한 사실이었다.
구조조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은 대부분 쓸려 나갔다.
남은 사람은 합리적인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연봉보다 몇 배나 많은 인센티브를 챙긴다. 그러니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들은 이들은 차라리 최민혁 실장이 KM 그룹 회장이 된다면 자신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 동경의 눈빛으로 최민혁 실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 모습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최용욱 회장 지시는 아니었지만 이런 이벤트도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안 그러면 실장님은 KM 그룹을 나 몰라라 하고 남을 분이니.’
다만 그도 본사 건물 앞에 내린 차량 한 대를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최민혁이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같은 시간에 도착하려고 했던 최용욱 회장이 탄 차였다.
* * *
“허참,”
차에서 내린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최민혁이 사라진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별다른 표정이 없는 채윤집 집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장 실장, 나름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채 집사,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누가 보면 저 녀석이 회장인 줄 알겠어.”
“좀 과하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런 의식이 오히려 최민혁 실장에게 KM 그룹이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도록 할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필요가 있어?”
“제가 조사한 바로는 최민혁 실장은 그룹 경영권에 관심 없습니다.”
장남 최문경 부회장의 탐욕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확실합니다. 다만 계속 회장님 눈치를 보는 것은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견제 때문입니다.”
“정말인가?”
“최문경 부회장은 최훈열 전무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최민혁 실장을 견제했습니다. 기획실장 자리에 승진한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줄줄이 나오는 이야기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과거였다.
채윤집 집사도 오랫동안 조사를 한 덕분에 최민혁과 주변의 인맥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았다.
최용욱 회장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네. 이번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것도 회장님 지시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마침 부회장님이 자리에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화들짝 놀란 KM 그룹 본사 경비 모습에 손짓으로 소란을 막았다.
하지만 삼삼오오 모여 있던 KM 그룹 임직원은 여전히 최용욱 회장 모습에 기립 자세를 취했다.
그들도 뒤늦게 최용욱 회장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다행히 최용욱 회장이 나서서 그들을 말릴 덕분에 별다른 소란은 없었다.
물론 데스크는 허겁지겁 기획 팀에 전화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그런 소란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으음,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을 쓰지 말자고. 중요한 것은 우리 KM 그룹이니까. 아무리 민혁이, 고 녀석이 다른 꼼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 KM 그룹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저도 공감입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하려고 할 겁니다.”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르지만, 목표는 똑같으니까. 고 녀석을 한 번 지켜보자고.”
* * *
KM 그룹 사장단 회의실 분위기도 로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이 모습을 보이자 계열사 사장들은 다들 회장을 본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행동이 못마땅한 이도 적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들 일어났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 옆자리에 앉은 채 힐끗 계열사 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중에는 오영근 사장도 있었다.
서로 잠깐 눈인사만 나누었다.
장승일 실장이 어색하지 않도록 옆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최용욱 회장이 벌써 도착했다는 말에 다급하게 사장실을 나섰다가 불과 1분 만에 최용욱 회장과 같이 다시 돌아왔다.
최용욱 회장이 나타나자 다시 사장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했다.
최용욱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회의실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진 사장단 회의.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는 KM 그룹 각 계열사의 실적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가 필요 없는 사업부가 꽤 많았다.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KM 인스트루먼트인데, 광학기기 사업부와 시계 사업부를 분사시켜서 KM 옵틱스를 설립했다.
KM 옵틱스는 이름만 KM 계열사뿐인지, 완전히 계열사가 분리된 것이었다.
[KM 인스트루먼트는 의료 기기만 매각하고 나면 나머지 사업부 위주로 해서 새로운 혁신을 거듭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