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힙합은 음악, 춤, 패션이 모두 합쳐서 이루어진 포괄적인 음악이다.
단순한 한 면으로 보면 안 된다.
힙합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전에도 존재해 왔던 것이다.
후에 여기에 백댄서의 음악이 더해졌다.
격렬한 웨이브, 몸을 꺾는 동작으로 이루어진 춤이 추가되었다.
바로 브레이크 댄스다.
최민혁은 굳이 댄스를 갖춘 힙합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보다는 힙합의 다른 면을 차지하는 그라피티에 주목했다.
MP3 디자인이 그라피티 예술과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잦은 디자인 변경이 있었지만, 디자인 팀은 이 제안에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기발한 아이디어에요.”
최민혁 역시 만족했다.
“그렇다면 참고로 해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만 하면 좀 더 색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아요.”
“좋네요.”
그들 역시 최민혁 실장이 계속 내놓은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한국적인 정서와는 다른 이 색다른 디자인 때문에 MP3의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다른 국내 모바일 제품과는 격이 달라졌다.
색다른 무늬가 자연스럽게 이목을 끌었다.
최민혁은 물론 이런 디자인 팀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취미 생활로 삼았던 이지수가 자주 애창한 노래 중에 몇 곡을 더 선정했다.
‘I believe I can steer’, ‘One sweet time’, ‘Change the earth’와 같은 곡이다. 대부분이 대박을 쳤던 노래였다.
인생 1회차에서 한국 사람조차 노래를 부르면 ‘아, 그 노래~.’ 라고 알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그는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 노래를 일괄적으로 다 정리해서 손을 봤다. 모두 3곡을 더해서 4곡을 만든 것이었다.
나머지 노래 6곡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시선을 끌 거야.’
최민혁은 다시 한번 노래를 정리한 후에 조성돈 팀장을 불러 곡을 내밀었다.
“…….”
조성도 팀장은 물끄러미 노래를 살핀 후에 최민혁 눈치를 봤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도 아는 지인이 있어서 부탁한 곡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 검증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모호한 내용이다. 실상 정확히 누가 이 자료를 줬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도 몇 달 전이라면 질문하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음악에 대해서 잘 몰라 이 노래의 가치가 어떤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혹시나 김명준 과장이 알까 싶어서 쳐다보았다.
김명준 과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자신은 잘 모른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아는 바로 최민혁이 미국 쪽 지인과 만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휴식할 때 전화로 이야기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그저 왜 쳐다보느냐고 웃기만 했다.
‘뭔가 더 있구나.’
* * *
최민혁 인생 1회차에서 ‘I believe I can steer’는 아예 대놓고 추락하는 장면에서 많이 사용된 노래로 유명하다.
다르게 보면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오히려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또 다르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 주제였다.
따라서 이 노래는 ‘I’ll be loving you’와는 노래 성격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작사, 작곡에는 취약한 면을 보인 배종대 과장조차 특성이 다른 점을 바로 파악했다.
“와아!”
딱 한 곡이지만 그 격이 분명히 달랐다.
아니, 기획 팀의 임직원들은 해외 노래 수백 곡을 검토하면서 경험이 쌓인 덕분에 그 가치를 바로 알아보았다.
정성근 대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실장님은 달라.”
배종대 과장은 힐끗 정성근 대리를 째려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 대리 네 말이 맞다.”
“이제 인정하시는군요.”
“내 눈앞에 물건을 보고 인정을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배 과장님의 그런 점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개소리 마!”
두 사람은 계속 투닥거렸다.
어지간한 일에 객관성을 유지하는 박상기 차장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할 말이 없네.”
이정원 과장은 음모론을 내세웠다.
“이건 정말 이상해요. 아무리 실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니, 내놓은 음악마다 이렇게 특색이 다른 것이 말이 되나요?”
“그러면 어디서 이런 노래를 가져왔을까?”
“전 실장님이 이 노래를 작사하고, 작곡했다고 믿을 수가 없어요.”
기획 팀 의견은 반반으로 갈라졌다.
최민혁 능력은 인정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봤다. 이런 식으로 독특한 노래를 찍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찬성파는 최민혁 실장의 천재적인 능력을 지적했다.
“시즈벨과 협상에서 느낀 건데, 실장님은 보는 안목이 남다른 것 같아요.”
“우리랑 보는 세계 자체가 달라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다고 봐요!”
둘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머지 두 곡 역시 자신이 조사한 곡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던 것이다.
눈치 없는 박광민 사원이 툴툴거렸다.
“이거 이번 이벤트 진짜 대박 나는 거 아닙니까? 혹시라도 빌보드에 단 1곡이라도 올라가도 홍보는 대성공이잖아요!”
“…….”
이 부분에서는 다들 확신하지 못했다. 노래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그게 빌보드 순위에 올라가는 것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들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노래는 진짜 좋네요.”
“저도 노래가 다른 노래에 비해서 몇 수 위라는 점은 인정하겠어요.”
조성돈 팀장은 팀원들이 뜻밖에 긍정적인 말을 하자 바로 입을 열었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이 정도 곡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잖아. 일단 저작권 등록부터 하고, 섭외할 가수에 관해서 조사를 해봐. 필요하다면 외주를 줘도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기획 팀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자리에 가서 노래를 살피면서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상 회의할 때와 각자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을 때와는 또 달랐다.
지금까지도 자신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계획대로 될까?’
MP3 자체도 세계 최초다. 이 기기에 탑재된 곡도 처음이다.
그런데 그 노래가 빌보드를 휩쓴다면 그건 정말 세계적인 이벤트가 될 것이다.
일에 휩쓸리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TV 사업부 매각은 어쩌면 이 일과 비교한다면 별것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획 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이 기술 변화의 분기점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실장님은 이 모든 일을 다 예상한 것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카세트 플레이어 시장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어. 그 정도라면 TV 사업부 매각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냐.’
* * *
최민혁은 기획 팀이 다시 안정을 찾자 그제야 피식 웃었다. 그는 정리한 보고서를 가져온 조성돈 팀장을 앞에 둔 채 입을 열었다.
“다른 문제는 없나요?”
“가수 선정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문제가 제법 있지만 크게 문제는 안 될 겁니다.”
최민혁 역시 자신이 제안한 노래 4곡과 기획 팀이 추가한 6곡을 포함한 10곡을 힐끗 살폈다. 나머지 기획 팀이 추가한 6곡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부분은 조 팀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틀 후에 있을 사장단 회의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한 보고서입니다.”
상반기 KM 전자의 매출과 현재 진행되는 사업에 대한 자료다.
MP3에 대한 것은 빠져 있었다.
최민혁도 뒤늦게 장승일 실장에게서 할아버지의 지시 사안을 들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보고서를 넘기면서 숫자만 살폈다.
“콜린스 누적 매출이 20만 대를 넘어섰군요.”
“유럽 쪽은 이탈리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 매출이 꾸준히 늘어서 2만 대가 더 늘어났고, 아마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으면 추가 매출이 많이 늘어날 겁니다.”
“좋네요. 굳이 서두르지 마세요. 어차피 매각하고 나면 오성 전자가 알아서 관리할 테니까.”
“정말 오성 전자에 TV 사업부를 넘길 생각입니까?”
“그게 현재로서는 가장 좋습니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내심은 조성돈 팀장에게 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IMF가 왔을 때 오성 전자 자금 사정이 빡빡해지겠지. 그러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거야. 나에 대한 압박은 더 힘들어질 거야.’
내막을 잘 모르는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얼굴에 떠오른 사악한 미소를 보자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슬쩍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월마트 측에는 3만 대를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어, 월마트가 계약서에 합의했나요?”
“아직 진행 중입니다. 다만 월마트 측도 일단 고객 반응을 본 후에 메인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나와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공급 조건은 문제가 없겠죠?”
“그건 저희 계약 조건대로 합의를 봤습니다.”
“좋네요.”
“…다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월마트가 우리 KM 전자에 대해 가지는 불만이 생각보다 너무 큽니다.”
“상관없습니다. 설사 그들이 내놓은 계약 조건대로 했다고 해도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할까요?”
“네. 그렇게 합니다. 그럴 바에는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면 다른 업체와 접촉하는 것이 났지 않을까요?”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겁니다. 월마트가 뒤에서 미국 주정부를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답이 없어요.”
“…….”
조성돈 팀장은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싶었지만 이제까지 최민혁 말이 다 옳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민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우리 KM 전자의 상표 가치에 대해서 잘 모르시네요. 우리 KM 전자에 대한 미국인 인지도는 아예 없습니다. 아니, 한국 상표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지금은 뭘 해도 쉽게 잘 안 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품질이 좋은 것은 이미 유럽에서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얼마든지 오해를 살 수 있어요. 아니면 그렇게 만들든지 하겠죠.”
“확실히 아직은 우리 KM 전자 제품의 신뢰도가 좋은 것은 아니군요.”
“그러니 괜한 오해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월마트 역시 그걸 잘 압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인지도를 빌려준 것이니까. 그 대가를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는 거죠. 마냥 억지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월마트를 상대로 일방적인 갑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이미 어느 정도 계획을 다 가지고 있었다.
최민혁은 자신의 의도가 먹혀들어 갔다고 판단했다.
“우리 KM 전자 브랜드 인지도를 키우는 역할을 콜린스가 해줄 겁니다. 딱 그 정도면 됩니다. 다른 예로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소니 같은 기업은 콜린스를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소니 인지도만 살짝 덧씌우면 날개 돋친 것처럼 팔릴 겁니다.”
“그런데 오다 히로 부사장은 별다른 연락이 없습니다.”
최민혁은 의자 뒤로 몸을 젖힌 채 팔짱을 꼈다. 느긋한 포즈를 취했다. 급할 것이 없다는 행동이었다. 목소리도 차분했다.
“지켜봐야죠. 소니가 바보는 아닙니다. 그들이 제 의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저희를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묵묵히 최민혁 이야기를 듣다가 한 가지를 걱정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앙금이 쌓여서 TV 사업부 매각이 틀어지면 소니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소니와 척을 져서도 곤란해요. MP3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은 우리가 키를 잡고 있어요. 그러니 딱히 소극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