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최민혁 입장에서 이 두사람은 KM 전자를 좀 먹는 바이러스나 마찬가지였다.
좀 둘러가기는 했지만 결국 두 사람도 정리한 셈이었다.
통쾌했다.
그래도 역시 강도가 약해서 아쉬웠다.
이 자리에서 공갈 협박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이 문제다.
이들을 합법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고생한 것을 감안해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작별 시기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니, 많이 섭섭합니다.”
“…….”
하지만 두 사람은 최민혁과 시선을 마주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시선을 땅에 박은 채 두려워했다.
최민혁은 문득 권력이 가지는 마성을 느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들을 더 밟아버리고 싶은 강한 욕망이 생겼다.
‘즐겁네.’
권력을 멀리한다라. 개소리다. 이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다. 다만 그런 내심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미지 관리가 중요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이들을 정리했다는 것을 감춰야 했다.
‘보복은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니까.’
그는 복잡한 내심을 드러나지 않은 채 한 사람씩 악수했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을 가서도 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각자 악수를 하면서도 내심 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최민혁이 만약 DL 스카이에 꼼수를 부린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차 하면 또 잘려.’
최민혁의 악명은 그 누구보다 두 사람이 잘 알기에 마른침을 삼키기만 했다.
최민혁은 두 사람의 태도에 꽤 만족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자신을 몰래 쳐다보는 이일태 이사와도 악수를 청했다.
“제가 DL 그룹은 잘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둘째 큰아버지 사돈이라서 들은 내용이 있습니다. DL 스카이는 비록 신생 회사이지만 오히려 여기보다 더 나을 수가 있습니다.”
이일태 이사도 다른 임직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갖은 수작을 다 부렸다. 최용욱 회장, 최문경 부회장, 심지어 김현탁 본부장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다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최민혁이 두렵기만 했다.
“아, 안 그래도 감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좋은 말만 나왔다.
이일태 이사의 지난 행동을 본다면 크게 난리를 쳐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은 회사가 떨어져 있더라도 얼마든지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굳이 헤어지는 마당에 악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지난 일에 대해서 쿨하게 다 털어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삶이 잘되기를 기원했다.
“다 지난 일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하시는 일이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네.”
최민혁은 문득 최민수를 찾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자 더 언급하지 않았다. 인사 팀장 이야기로는 최민수 스스로 DL 스카이 쪽으로 가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일까?’
더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일태 이사는 조용히 위성 사업 팀을 나서는 최민혁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형섭 부사장이 다시 나섰다.
“그래도 이렇게 잘 끝나서 다행이네.”
“문 부사장님, 감사합니다.”
“천만에.”
그는 문형섭 부사장이 다른 임직원과 작별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최민혁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구조조정을 한 경영자치고는 좋은 이미지를 준 셈이다.
물론 후일 닥칠 IMF를 생각한다면 딱히 최민혁이 한 말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 * *
DL 스카이는 자본금 150억으로 설립된 회사다. 주로 김상구 회장 차명 지명이 투자됐다. 겉으로 봐서는 DL 그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실상은 DL 그룹 계열사라고 봐야 한다.
이 회사의 사장은 뜻밖에도 김현탁 본부장이었다. 그는 DL 정보통신 본부장 자리를 그만두고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건 그도 미처 예상 못 한 일이었다.
김희찬 부사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나도 이번 경과를 보고 너에 대해 평가를 할 거야. 그러니 실수 없도록 해.”
“아버지, 그래도 이건 계획에 없던 일 아닙니까?!”
“어쩔 수가 없어. 공항 마약 사건 이후에 단단히 찍혔으니까. 마약을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것 때문이다!”
지난 항공 마약 사건은 여전히 DL 그룹 일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마약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김현탁 본부장이 몰래 다시 마약을 할까 염려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주먹을 콱 쥔 채 ‘씨발’을 중얼거렸다.
“그거 다 최민혁, 그 새끼 음모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네가 오는 항공편과 시간을 어떻게 사전에 알고, 민혁이 그놈이 음모를 꾸민다는 소리야?”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항을 나올 때부터 아예 작정하고 행동했습니다. 그 많은 기자가 딱 그 시간에 몰려온 것도 최민혁 때문입니다. 그건 제가 확인했습니다.”
“정말 민혁이가 언론사에서 먼저 연락을 했다는 말이야?”
“정말이라니까요!”
물론 최민혁이 손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꼭 항공 마약 사건으로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김현탁 본부장은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김희찬 부사장은 생각보다 차가운 인물이다.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미 결론이 난 거다. 오큘러스 사업에 대한 부분은 아버지도 인정했다. 그래서 확실한 비즈니스 기회를 준 거야. DL 정보통신에 있으면서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차라리 나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번 DL 스카이 실적을 보고 평가를 할 거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하게 결정한 것이 아냐. 최문경 부회장의 맏딸 최영란은 너도 잘 알 거다. 그 아이가 이번에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를 설립했어.”
“그거 미래가 있다는 소리는 크지만 실적을 쌓기는 쉽지가 않아요.”
“글쎄다. 그런데 벌써 한전에 전원 관련 칩을 납품하고 있다. 당장 올해 매출만 50억을 넘어. 다른 업체 납품 실적까지 감안하면 100억은 가볍게 넘는다.”
“저, 정말입니까?!”
김현탁 본부장도 깜짝 놀랐다. 최민혁 실장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것이었다.
“그래.”
그도 최영란과는 7살 차이로 안면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모 집안이라서 이야기를 나눈 정도에 불과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아버지 입을 통해서 최영란 이야기를 들었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할아버지가 단단히 열받았구나.’
최용욱 회장에게 열등감을 가진 김상구 회장이라면 다음 행동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김현탁 본부장도 결국 지시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네.”
답답한 아버지의 말에 새삼 최민혁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이 개새끼,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 * *
김현탁 본부장은 한동안 최민혁에 대한 분노를 쉽게 감추지 못했다. 더욱이 회사가 무려 1,200억에 오큘러스 지분을 사들인 것을 들었다.
이 일 때문에 한동안 최민혁에 대한 감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심지어 KM 전자 위성 사업부를 인수했다는 말에 질려 버렸다.
물론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DL 정보통신은 위성 사업에 대한 경험 자체가 없어서 기반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쓰레기 더미나 마찬가지인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는 아니었다.
‘최민혁, 이 빌어먹을 새끼가.’
최민혁 그 새끼가 얼마나 음흉한지 모르는 이들이라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탁 본부장은 자신이 협상장에 나서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워낙에 일이 복잡해서 자신이 낄 틈이 없었는데, 벌써 일이 이렇게 끝난 것이다.
그가 더 황당한 것은 둘째 작은아버지 김용만 전무의 차남 김재열이다. 지금 감옥에 가 있는 김기범의 동생이다. 3수로 한국대에 들어간 김기범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24살짜리가 DL 스카이의 기획실장 자리에 내정돼 있던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DL 화재에 있는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에게 가서 따졌다.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다. 너도 알다시피 DL 스카이는 디지털 위성 사업에 따른 수익 지분이 기반이 된 회사다. 당장은 손실이 나겠지만, 위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후에는 일정한 이익을 얻을 수가 있어. 나름 안정적인 사업이라서 재열이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허탈한 김현탁 본부장은 치를 떨었다.
‘결국 애새끼를 돌봐주라는 거야?’
하지만 딱히 그도 김재열을 탓할 자격은 없었다.
유럽에 있을 때 그 역시 거꾸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너도 이제 웬만큼 컸으니, 김재열 잘 돌봐주라는 뜻이다.
김재열의 아버지, 김용만 전무는 김재열을 걱정해서 실제로 김현탁 본부장을 찾아왔다. 정확히는 장남 김기범이 감옥에 가버린 덕분에 차선책인 김재열에게 신경을 쓴 것이다.
“나도 소식 들었다. 시작부터가 문제가 많은 것은 나도 알아. 그놈의 최민혁 때문에 고생한 것도 익히 알고 있다.”
“작은 아버지, 그래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서 더 재열이를 돌봐줘. 민수 꼴 당하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회사가 유치원은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은 못 믿어. 너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무슨 뜻입니까?”
지난 주 감옥 면회에서 김용만 전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최민혁에게 이를 갈던 아들 김기범의 모습을 봤다. 이전까지만 해도 김기범은 최민혁에 대한 내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룹에서 KM 전자 위성 사업부를 인수했다는 말에 그만 울컥해서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용만 전무도 뒤늦게 장남 김기범이 감옥에 간 것이 최민혁의 솜씨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내심 이를 으드득 갈았다.
“넌 민혁이 그놈이 얼마나 흉악한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러니 이곳에 있으면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눈을 갖도록 도와주라는 이야기다.”
“…….”
김현탁 본부장은 안 그래도 DL 스카이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임마, 나도 널 도와줄 날이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일태 이사가 데려온 위성 사업부 직원 중에는 최민수도 있었다.
“현탁 형!”
“어, 그, 그래.”
반갑게 손을 흔드는 최민수 모습에도 김현탁 본부장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무리 디지털 위성 사업이 날로 먹는 사업이라고 해도 이렇게 멍청한 인간만 모여 있어서 잘 굴러갈지 불안했다.
초췌한 이일태 이사가 그나마 나아 보였다.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김현탁 본부장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DL 스카이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잘 굴러갈 것 같지가 않았다.
최근 뽑은 DL 스카이 직원도 다들 눈치를 보면서 쉬쉬했다.
그들도 대기업 분위기는 잘 알지만 이렇게 낙하산 인사가 많은지는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냐!’
* * *
허훈 과장도 DL 스카이 내부 사정을 뒤늦게 알고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디지털 위성 사업으로 말미암은 수익성 자체는 안정적이지만 회사 분위기마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회사일수록 밥그릇 싸움이 심해지는데…….’
특히 낙하산 인사는 능력도 없는 욕심만 많아서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친다.
실무자인 그가 그들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영양가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DL 스카이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없다는 점이다. 있다고 한다면 위성 수신기 쪽인데, 이것도 ETRI 참여 지분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할당이 정해져 있다.
즉, 위에서 주는 대로 나눠 먹기 식이니, 회사가 발전하고 말고도 없었다. 딱 정해진 파이만 그냥 주야장천 하는 공무원 스타일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위에서 다 막혀 있으니, 할 수도 없다.
앞날을 걱정하던 허훈 과장은 마침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KM 전자를 잠깐 들렸다.
그는 다른 직원의 따스한 시선이라도 받을까 나름 기대했다.
그런데 놓고 온 개인 짐을 들고 나가면서 들은 소리는 다른 이야기였다.
[대박, 또 인센티브야!]
[이게 돈이 얼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