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65화 (265/1,021)

#265.

“천만에요.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이제 저에 대한 악감정을 털어버렸나 봅니다.”

사실 권태성 실장은 이번 협상을 주도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일별한 후에 최민혁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전 처음부터 최 실장님에게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없었습니다.”

신사적인 모습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최민혁은 내심 씩 웃으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가요?”

TV 사업부 인수를 염두에 둔 권태성 실장은 계속 최민혁에게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최 실장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오성 전자는 KM 전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흠.”

최민혁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권태성 실장 모습을 보면서 새삼 혀를 내둘렀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TV 사업부를 인수하고 싶나 보군. 쯧, 세상 쉽게 살려고 애쓰네.’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지금 진행하는 일의 마무리가 우선이다.

“아,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권태성 실장은 이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모습과는 달리 단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최 실장님의 요청대로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은 기간을 당기기로 했습니다. 아마 빠르면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에는 공급할 수 있습니다. 혹시 더 일정을 당겨야 합니까?”

이전의 소극적인 태도와 달라진 모습.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의 태도 변화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양산 문제를 비롯해서 아직 남은 문제가 있으니까. 그런데 낸드 메모리 양산을 당기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해결이 잘 되었나 봅니다.”

“KM 전자와 오성 전자는 동반자 관계가 아니겠습니다. 고객의 요청을 최대한 따라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에서 말하는 이야기지만 메모리 양산 일정을 당기는 것은…….”

주절주절 나오는 이야기는 낸드 메모리 양산 기간을 당기기 위해서 오성 전자가 얼마나 손해를 봐야 하는 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건 정말 권태성 실장이 만들어 낸 핑계가 아니다.

메모리 수율 문제가 절대 간단하지 않았고, 낸드 메모리의 다양한 문제는 더 복잡했다. 특히 수명 문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테스트인데, 그 기간을 당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늘어놓은 것이다.

인생 1회차에서 2TB SSD를 경험한 최민혁이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낸드 메모리만 얻으면 오성 전자에 관심이 없는 터라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다 흘렸다.

애초에 메모리 산업 자체에는 아예 손을 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공급 계약서를 보내주시면, 계약금 100억은 바로 쏘겠습니다.”

“네.”

권태성 실장은 이 부분은 썩 마음에 든 얼굴은 아니었다. 오성 전자에서 준 1,300억에서 다시 100억을 돌려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 KM 전자는 결코 자기 돈으로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제까지 참은 본론을 꺼냈다.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이번에 KM 전자가 위성 사업부를 매각하지 않습니까. 혹시 KM 전자 내부적으로 구조조정을 검토하는 중입니까?

“아시다시피 일단 위성 사업부는 DL 그룹 계열사에 매각할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 사업부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이제 남은 사업부가 몇 개 없어서 말이죠.”

권태성 실장은 괜히 까칠한 최민혁 실장을 자극하기 싫어서 말을 계속 빙빙 돌렸다.

“그렇습니까. 혹시 멀티미디어 사업부 쪽도 정리할 생각입니까?”

KM 전자에 남아 있는 사업부 중의 하나인 멀티미디어 사업부는 그나마 수익이 제법 남았다. 비록 오디오 사업부에 비해서 못하다고 해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엄밀히 보면 MP3도 멀티미디어 사업부 쪽에 속하는 것이니까.’

최민혁도 그래서 멀티미디어 사업부 정리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쪽은 아닙니다.”

마른침을 삼킨 권태성 실장은 계속 최민혁 눈치를 봤다.

“가만 그러면 다른 쪽 사업부 매각을 고민한다는 말입니까?”

평소와는 달리 집요하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권태성 실장.

하지만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의 욕망을 보면서 혀를 찼다.

‘기획력은 뛰어난 것 같지만, 생각보다는 순진한 분이네.’

정확히는 권태성 실장은 눈엣가시 같은 KM 전자의 TV 사업부에 욕심을 냈다. 따지고 보면 최훈열 전무가 있을 때부터 오성 전자는 KM 전자의 TV 사업부를 노렸다.

콜린스 초대박 이후에 결국 KM 전자 TV 사업부에 대한 욕심을 버렸는데, 다시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그 일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권태성 실장이 애가 탔다.

최민혁은 딱 여기까지만 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을 잡고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물러서기로 했다. 그는 협상장을 나서는 최민혁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을 보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계약도 겉으로는 제이미 이사 통해서 지분 협상이 진행되었다. 매각 대금도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에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 자금 중에 대부분이 최민혁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이번 계약은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최민혁은 굳이 이번 일은 나서서 알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오성 전자나 DL 그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두를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일이 잘될지는 모르겠어. 솔직히 좀 걱정이다. 최민혁 실장은 결코 손해를 볼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자신도 이번 일은 끝날 때까지 물러날 수가 없었다.

최소한 소니, 아니, 중국에 콜린스가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하기는 싫지만 정 안되면 언론에도 손을 쓸 수밖에 없어.’

* * *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과 이야기를 끝낸 후에 오현종 팀장과도 작별을 고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하하하,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오현종 팀장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번 일 덕분에 그 역시 오큘러스 지분을 일부 얻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평생 놀고먹고도 충분했다.

“아닙니다. 저도 최 실장님의 의도를 잘 몰랐습니다. 디지털 위성 사업 가치를 이렇게 끌어올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현종 팀장님은 의외로 적극 나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이렇게 실장이 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은 아무래도 부담스럽습니다.”

“호오, 그래요?”

“솔직히 실장 자리도 얻고 싶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최 실장 제안을 따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겁니다.”

소심한 오현종 박사는 오랜 경험에도 크게 욕심을 내지 않았다.

최민혁 눈에도 또 그게 인상적이었다.

‘괜찮은데?’

말이 별로 없는 김승구 팀장 역시 오현종 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실무 책임자인 김문호 박사 역시 허리를 이전처럼 세우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양손을 잡은 채 기꺼이 머리를 숙였다.

“이번 일을 통해서 눈을 뜬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과는 달리 김문호 박사는 디지털 위성 사업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는 무궁화 위성 발사와 관련한 일 때문에 방송국 패널 초청도 받았다.

메이저 방송사를 누비면서 디지털 위성 사업을 개척자 역할을 하는 중이다.

오큘러스 지분을 얻는 것보다 이 명성이 더 컸다.

김문호 박사도 이 모든 일이 최민혁 실장이 만든 큰 기획의 일환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그만큼 최민혁이 만든 방식은 경이적이었다.

최민혁이 이들의 태도에 놀란 것은 더 욕심을 내지 않는 점이다.

지분에 관한 것도 제이미 이사의 제안에 쉽게 수긍했다.

최민혁도 원래는 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정 그러면 앞으로 계속 도움을 받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최민혁 옆에서 가장 많이 그를 지켜본 오현종 팀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슨 뜻입니까?”

“혹시 새로운 기술에도 관심을 둡니까?”

“정확히 어떤 기술 말입니까.”

“CDMA 말이죠.”

“CDMA라…….”

세 사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민혁 의도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민혁이 단순히 그냥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 성격상 돈이 되지 않으면 저런 식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혁신이 포함되지 않으면 말이다.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통해서 재미를 단단히 본 세 사람은 CDMA란 말을 깊이 머리에 새겼다.

최민혁도 지금 당장은 CDMA 쪽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가 아직 이 기술을 전혀 모르는 상황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CDMA 상황이 마냥 좋지는 않지. 내가 그걸 다 바로 잡을 필요는 없어. 최소한 시다바리 일을 사전에 해둔다면 그것도 좋지.’

자신은 CDMA 기반이 만들어지면, 핵심 원천 기술만 먹어도 된다.

다만 그건 차후의 일이다.

최민혁은 그저 심유한 불경 속의 선문답 같은 말만 남겨두었다.

“CDMA 쪽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아마 그 일로 다시 보게 될지 모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흥미롭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병신같이 퀄컴에 털리는 것은 놔둘 수는 없지.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는 있으니까.’

* * *

최민혁은 오큘러스 지분 협상이 끝난 후에 기분이 상쾌했다.

몇 달 동안 다양한 목적으로 미끼를 던진 사업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 수익도 나쁘지 않았다.

순이익만 고려하면 콜린스보다 더 수익성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인수 합병이 그래서 좋은 사업일지도.’

다만 사업부 가치를 끌어올려서 매각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인생 1회차를 경험한 최민혁도 오큘러스같은 사업을 막 찍어낼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기반, 정보가 필요했다.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 두 사람은 최민혁이 기획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찾아와서 협상 결과를 질문했다.

최민혁은 간단하게 번 수익만 깔끔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오영근 사장은 혀를 내둘렀다.

“최 실장 자네 정말 대단하이. 별로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렇게 2,200억을 벌다니.”

“적지 않은 조사와 투자도 진행했습니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에게 투자한 돈을 다 합쳐봐야 고작 100억 안팎인 것으로 알아. 수익금에 비할 바가 아닐세.”

“하지만 100억이 적은 돈은 아닙니다. 사장님조차 보고할 때 부정적이었습니다.”

“허, 그 친구도 참. 명색이 사장 아닌가. 리스크를 검토하는 것은 당연해.”

“제가 지금 사장님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고려해서 투자했다는 점입니다.”

“알겠네.”

“다음에는 지금처럼만 안 해주시면 됩니다. 의사 결정을 선처리 후보고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만 해주셔도 됩니다.”

“…설마 또 투자할 건가?”

“아마도.”

“이번에는 어떤 아이템인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당장은 TV 사업부 매각과 MP3 마무리가 더 중요합니다.”

“하긴 그렇지. 하지만 최소한 사전에 전화상으로 정보는 알려주게. 일 처리가 다 끝난 후에 놀라는 일은 더 경험하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문형섭 부사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쉬운 점을 토로했다.

“매각 대금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지만, 위성 사업 미래를 생각하면 굳이 지분을 전량 다 매각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건 디지털 위성 사업이 잘 돌아갈 때 이야기일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성급하게 지분을 팔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설마 STB 사업부처럼 뭔가 다른 함정이 있다는 소리인가?”

“하하하, 다른 사람이 바보가 아닌데, 함정이 있다면 그걸 모르겠습니까. 특히 오성 전자는 이중 삼중으로 검토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 예측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자네 말은 무엇인가?”

“제 말은 디지털 위성 사업이 순탄하게 잘 흘러갈 때입니다. 만약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생긴다면 예상과는 좀 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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